[미디어펜=조우현 기자]대한민국 경제사의 고비마다 새로운 산업의 물길을 텄던 SK그룹이 창립 73주년을 맞았다. 1953년 휴전 직후, 경기 수원에서 버려진 직기 부품을 모아 세운 '선경직물'은 이제 반도체와 에너지, ICT를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SK의 73년은 단순한 기업 성장을 넘어, 한국 경제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을 거쳐 첨단 기술 강국으로 진화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 준공식에서 최종건 창업회장(왼쪽)과 최종현 선대회장(오른쪽) /사진=SK 제공
◆ 최종건, 폐허 위에서 일군 섬유 국산화의 기틀
창업주 최종건 회장의 경영 철학은 '돌파'와 '재건'이었다. 전쟁 직후 생필품조차 부족했던 시절, 그는 부서진 부품을 모아 직기를 재조립하며 섬유 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1960년대 초반, 국내 최초로 나일론 안감을 생산하고 해외 수출의 문을 열며 한국을 섬유 강국으로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우리의 슬기와 용기로 뚫지 못할 난관은 없다"는 그의 신념은 오늘날 SK 정신의 모태가 되었다.
최종건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자생적 산업화'의 상징과도 같다. 당시 외제 원단이 시장을 점령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는 "우리 기술로 만든 옷감을 우리 국민에게 입히겠다"는 일념으로 국산화에 매진했다.
특히 1960년대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이미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서며 한국 경제가 '수출 강국'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폐허 위에서 일군 선경직물의 성공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산업적 자신감을 심어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1980년 12월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유공(現 SK이노베이션) 인수 후 첫 출근해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사진=SK 제공
◆ 최종현, ‘석유에서 통신까지’ 수직계열화의 완성
창업주의 뒤를 이은 최종현 선대회장은 거시적인 안목으로 SK의 체질을 바꿨다.
1980년 유공(대한석유공사)을 인수하며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전무후무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자원 하나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정유 산업을 민간 주도로 끌어올린 것은 국가 경제 안보 측면에서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그는 미래 먹거리가 '정보통신'에 있음을 직감하고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 현재 글로벌 ICT 리더인 SK텔레콤의 초석을 놓았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안목은 시대를 앞서갔다. 그는 단순히 석유를 정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원료로 섬유까지 뽑아내는 '수직계열화'를 통해 대외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 산업 구조를 체계화했다. 또한 오일쇼크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해외 유전 개발이라는 무모해 보이던 도전을 시작해 오늘날 '무자원 산유국'의 기반을 닦았다.
그의 통찰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인 1전화 시대가 오기 전 정보통신을 '국가의 대동맥'으로 정의하며 ICT 강국 코리아의 기틀을 마련한 경영의 거장으로 기억된다.
GTC 2026 키노트에 참석 중인 SK그룹 최태원 회장(가운데) /사진=SK하이닉스 제공
◆ 기술 패권 시대 연 최태원 회장의 '반도체·AI 굴기'
현재 SK를 이끄는 최태원 회장은 '딥 체인지(Deep Change, 근본적 혁신)'를 통해 그룹을 글로벌 기술 기업으로 재편했다. 2012년 그룹 내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 인수를 단행한 것은 한국 경제사의 흐름을 바꾼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최 회장의 뚝심 아래 SK하이닉스는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났으며, 현재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차세대 반도체와 AI 인프라를 선점하며 한국의 반도체 주권을 수호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제조 중심의 SK를 기술 중심의 글로벌 토탈 솔루션 기업으로 진화시켰다. 특히 하이닉스 인수는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엔진을 '내수'에서 '글로벌 첨단 기술'로 전격 교체한 결단이었다.
그는 반도체 업황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조 단위의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며 기술 초격차를 유지해왔다.
최근에는 탄소 중립과 AI 시대를 대비해 '그린'과 '디지털'이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혁신하며, 한국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100년 기업으로"
SK의 73년은 한국 경제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을 거쳐 첨단 기술 산업으로 진화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최근 최태원 회장은 '사회적 가치(SV)'와 'ESG 경영'을 경영의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기업의 성장이 국가 사회의 문제 해결과 맞닿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SK의 역사는 위기의 순간마다 국가적 미래 산업을 통찰하고 과감히 투자한 경영인들의 '기업가정신'이 만든 결과"라며 "창립 73주년을 맞은 SK가 AI와 친환경 에너지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 앞에서 어떤 혁신을 보여줄지 주목된다"고 평가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