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배소현 기자] 국내 IT 업계 전반에서 성과급을 둘러싼 노사 갈등이 빠르게 확산되는 분위기다. 반도체 업계에서 시작된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 요구가 플랫폼·통신업계 등으로 까지 번지면서 기업들의 투자 여력과 산업 생태계 전반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과거 연대와 고용 안정 중심이었던 노동운동 기조가 점차 실리와 보상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달 23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의 '투명하게 바꾸고, 상한폐지 실현하자-4/23 투쟁 결의대회'에서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카카오와 LG유플러스 노조는 각각 영업이익 기반 성과급 확대 요구를 내세우며 사측과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단순 임금 인상이 아니라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 재원으로 활용하라는 요구가 확산되면서 업계 전반의 임단협 기준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카카오 노조는 최근 임금 교섭 결렬 이후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다. 노조는 영업이익의 약 13~15% 수준을 성과급 재원으로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카오뿐 아니라 카카오페이, 카카오엔터프라이즈, 디케이테크인 등 주요 계열 사 노조들도 이번 조정 신청에 함께 참여했다.
LG유플러스 역시 상황이 비슷하다. 노조는 올해 임단협 과정에서 영업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임금 총액 8% 인상, 주35시간 근무, AI 도입을 이유로 한 구조조정 금지 등이 요구안에 포함됐다. 반면 사측은 3% 수준 인상안을 제시하며 맞서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흐름의 출발점으로 SK하이닉스 사례를 꼽는다. SK하이닉스가 최근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확정한 이후 삼성전자 노조가 영업이익의 15%를 요구했고, 이후 제조업과 플랫폼·통신업계까지 유사 요구가 빠르게 확산되는 양상이다.
다만 업계 안팎에서는 성과급 요구 확산이 단순 노사 갈등을 넘어 국내 산업 전반의 투자 체력과 경쟁력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통신업계는 요금 규제와 시장 포화로 성장 여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AI 데이터센터(AIDC), 클라우드, 보안 인프라 등 대규모 투자가 동시에 필요한 구조다. 플랫폼 업계 역시 생성형 AI 경쟁 심화로 인프라 투자 부담이 커지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단기 보상 확대가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 노란봉투법 이후 달라진 협상 환경… “산업 경쟁력 논의는 실종”
업계에서는 최근 노사 갈등 양상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기존에는 고용 안정이나 근로 환경 개선이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실적 기반 보상 확대 요구가 임단협 핵심 의제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업계에서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노조 요구 강도가 한층 높아지고 협상 구도 역시 기업에 마냥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원청과 하청의 실질적 지배 관계를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변화하면서 대기업을 상대로 한 보상 요구 역시 더욱 강경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 같은 분위기가 산업 전반의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대기업 노조들의 수억 원대 성과급 요구가 이어지는 가운데 상당수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은 경기 둔화와 투자 위축 속에서 인건비 부담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업계에서는 특히 산업 특성상 인건비 상승 부담이 협력사와 외주 생태계로 빠르게 전가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대기업이 비용 부담을 흡수하기 위해 납품 단가 인하나 외주 축소에 나설 경우 결국 중소 협력업체와 개발 생태계 전반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 분위기도 변수로 꼽힌다. 업계 일각에서는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치권이 노동계 반발을 의식해 관련 논의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실제로 정부는 최근 삼성전자 노조 갈등 등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원론적 수준의 발언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지금과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경우 국내 IT 산업이 AI 등 신산업 경쟁력 확보보다 단기 보상 중심 논리에 더욱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AI 인프라와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은 투자·보안·주주환원·성과급 요구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업계 내 한 관계자는 "기업 실적 개선과 성과급 확대를 단순히 동일 선상에서 연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시점"이라며 "지금은 AI·보안·인프라 투자 경쟁이 국가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만큼 단기 보상뿐 아니라 산업 전체 관점에서 균형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디어펜=배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