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류준현 기자] '갚을 수 있는 만큼만 빌려라'는 뜻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제도가 최초 언급된 건 지난 2017년 1월이었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에 이어 강화된 가계대출 심사지표로 DSR 개념을 꺼내들었다. 가계부채 문제는 단기적이고 대증적인 방법보다 근본적 철학과 가이드라인을 통해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사실상 레버리지로 내 집 마련에 나서려는 영끌·빚투족에게 부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신호였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도 금융위 부위원장 재임 당시 가계부채 문제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지난 2018년 3월 DSR 제도를 본격 도입한 인물 중 한명이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고, 가계부채는 어느덧 2000조원 돌파를 앞두고 있다. 한국은행의 '2026년 1분기 가계신용 잠정통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가계신용 잔액은 1993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은행들은 '역대급 이자장사'를 거듭 경신하면서도, 대출자산의 부실 위기를 의식하며 건전성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의 '잔인한 금융' 발언과 이를 옹호하는 정부 고위 관계자의 지원사격은 천문학적 가계부채 문제를 너머 자본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금융이 못 갚을 확률이 높은 집단을 신용등급으로 구분해서 이자를 더 많이 내게 한다"면서 "그게 자본주의와 시장 논리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고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뒤이어 김용범 실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스스로를 '잔인한 금융의 설계자이자 공범'이라며, 자학적 고해성사에 나섰다. 그러면서 "(은행이) 리스크는 관리해야겠고 비용은 쓰기 싫으니, 그 구간(중·저신용자)을 다루지 않는 선택이 더 합리적으로 작동해 온 셈이다"며 "금융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은 규제가 아니라 면허에 따른 책임이다"고 금융의 공적기능을 강조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은행들이 가장 쉽고 편하고 안전한 쪽으로만 가다 보니 금융의 문턱은 높고 금융의 경계는 좁아졌다"며 "초우량 차주만 상대하고 중금리 차주들은 밖으로 밀려나면서 금리단층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잔인한 금융' 발언 이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금융권에 포용금융 요구를 노골화하면서, 금융권이 포용금융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한편으로 포용금융 확대의 부작용으로 금융권의 건전성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하지만 은행들도 오랜 포용금융 요구에 고군분투 중이다. 대표적으로 인터넷은행 3사(카카오뱅크·케이뱅크·토스뱅크)의 올 1분기 전체 대출액 중 중·저신용자 신규대출 비중은 △카카오뱅크 45.6% △케이뱅크 33.6% △토스뱅크 34.5% 등으로, 올해 금융당국 목표치인 30%를 일제히 웃돌았다. 금융당국의 입김을 의식해 포용금융 목표치를 채워야 하는 은행들이 2금융권 및 불법사금융을 전전하는 중·저신용자를 적극 유치한 덕분일 것이다.
다만 3사가 당국 압박에 못이겨 꾸역꾸역 중저신용자를 포용한 결과, 건전성은 크게 악화됐다. 업계에 따르면 3사의 지난해 매·상각 연체채권 규모는 총 1조 669억원으로 2024년 9159억원 대비 약 16.5% 증가했다. 단순 연체를 너머 시쳇말로 돈을 떼이게 된 셈이다. DSR 제도의 취지를 생각한다면 대출을 일으켜 제때 갚지 못한 중·저신용자에게만 누군가(금융권)의 희생으로 저리 자금을 내어주는 게 과연 공정한지 되짚어봐야 한다. 아울러 저리로 자금을 내어준들, 이들이 대출 원리금을 꼬박 상환할 것이란 보장도 없다. 정부의 포용금융은 아름다운 말들로 포장돼 있지만, 결국 은행이 까다로운 건전성 규제를 충족하면서 악성채권도 홀로 떠안아야 하는 구조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저신용자들도 "생활비가 늘어서" "다니던 직장을 실직해서" "사업에 실패해서" 등 저마다 신용도가 낮아지게 된 불의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인터넷은행권이 미담으로 내놓는 포용금융 사례를 보더라도 금융을 발판삼아 중·저신용자가 고신용자로 재기하는 사례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금융 혜택이 일방적이어선 곤란하다. 고소득자는 돈을 잘 번다는 이유로 각종 수당·정책모기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고신용자는 신용도가 높다는 이유로 중·저신용자보다 높은 대출금리를 부담하는 잔인한 역차별을 외면해선 안 된다. 또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그저 신용관리를 잘해온 고신용자를 고소득자와 동일 선상에 놓아선 안 된다는 점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정부가 할 일은 중·저신용자에게 시혜성 정책을 베푸는 게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신용점수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 아닐까. 아울러 대출은 DSR 제도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원칙대로 국민 누구나 갚을 수 있는 만큼 빌려주는 게 옳지 않을까.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국가에서 신용은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남의 돈은 원래 무섭고 잔인하다. 대통령 등 고위 공직자의 감성적 발언 한마디가 업계에는 불만을, 재기해야 할 이들에게는 자칫 도덕적해이를 부추긴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미디어펜=류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