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견희 기자] 국내 중견 기업들이 경영권을 사모펀드(PEF)에 매각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경영 악화에 따른 최후의 선택이 아닌 징벌적 수준의 상속세 재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승계를 포기하는 구조다. 최근 칼라일 그룹에 매각된 청호나이스를 비롯해 한샘, 락앤락 등 토종 알짜 기업들이 PEF 품에 안기면서 과도한 상속세가 중견 기업의 생태계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호나이스, 충북 진천 제조본부 전경./사진=청호나이스 제공
2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은 청호나이스 지분 100%를 인수하는 주식인수계약(SPA)을 체결했다. 매각에는 창업주인 고(故) 정휘동 전 회장 지분 75.1%와 계열사이자 필터 제조사인 마이크로필터 지분 13% 등이 포함됐다. 거래 조건은 미공개이나, 시장에선 매각 금액이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故) 정 전 회장이 1993년 설립한 청호나이스는 지난 33년간 단 한 번의 연결 기준 영업적자도 내지 않은 토종 알짜 기업이다. 정수기 제조사로 출발해 완제품 렌탈은 물론 핵심 부품(필터) 제조, 자체 설치 및 사후관리(A/S) 서비스까지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으며, 2014년 세계 최초로 얼음정수기를 출시하는 등 국내 환경·건강 가전 시장을 선도해왔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전년비 6.7% 늘어난 5102억 원, 영업이익은 전년비 31% 감소한 448억 원을 기록했다. 2024년과 2023년에도 각각 영업이익이 649억 원과 450억 원을 기록하며 견조한 수익 창출 능력을 입증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정 회장의 별세로 유족들은 승계 문제에 직면했다. 승계에 따른 상속세는 약 3000억 원 규모로 알려졌다. 정 회장 일가는 안정적인 경영권을 유지하며 가업을 이어가려 했으나, 비상장 주식 비중이 높은 자산 구조상 세금 납부를 위한 재원 마련에 한계를 느끼고 매각 결정을 내린 것으로 파악된다.
업계에서는 청호나이스가 내부적으로 연부연납·인수금융 등 재원 마련 방법을 논의했지만, 결국 지분 매각 이 외엔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과도한 상속세 부담이 경영권 유지보다 기업 경영의 큰 리스크가 된 사례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한샘 본사 전경./사진=한샘 제공
◆ 한샘, 락앤락 등 토종 기업도 PEF 품으로
청호나이스 이 외에 밀폐 용기 대명사인 락앤락도 2017년 창업주 김준일 회장이 상속세 재원 마련 등을 위해 지분 전량을 사모펀드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에 매각한 바 있다. 매각 이후 락앤락은 사모펀드의 엑시트(투자금 회수) 전략에 따라 대규모 배당과 자산 매각 등을 거치며 과거의 성장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가구 업계 1위 한샘 역시 지난 2021년 사모펀드 IMM프라이빗에쿼티에 매각됐다. 당시 한샘 측은 창업주의 경영 철학을 이유로 들었으나, 업계에서는 높은 상속세율과 가업 승계의 어려움이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상속세 부담은 이미 여러 중견 기업의 가업 승계를 끊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상속세 최고 명목세율은 50%지만, 최대주주 할증 과세가 더해지면 실질적인 최고 실효세율은 60%까지 치솟는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을 웃도는 가장 높은 수치다.
정부 차원에서 중견기업의 상속세 부담 완화를 위해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운영 중이나, 까다로운 사후 관리 요건(고용 및 업종 유지 등)과 엄격한 매출 기준 탓에 현장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는 비판이 지속되고 있다.
또 상속세 최고세율을 40%로 인하하고 과세표준을 개편하는 등 세제를 손질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있었으나, '부자 감세'라는 정치 프레임에 갇혀 번번이 무산됐고 오너 일가들이 체감할 만한 세 부담 완화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영계 역시 기업의 영속성을 위해 상속세제 개편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기업이 영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상속세율을 낮추고 납부 유예 기간을 길게 거치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자국 내 토종 기업의 영속성을 보호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게 국가 경제에도 이득이라고 본다"며 "다만 상속세제 개편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엇갈린 여론 탓에 실제 법 개정까지는 쉽지 않을 것이란 일각의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견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