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호르무즈 해협 선박 피격과 미국의 이란 재공습으로 지정학적 위기가 다시금 고조되면서 국내 정유업계가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제 유가가 급등하며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절대적인 국내 정유사들의 원가 방어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정부의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출구전략과 정유사 손실보전 셈법마저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형국이다.
9일 업계에 따르면 한 달 남짓 이어지던 미국과 이란의 휴전 기대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양해각서(MOU)는 끝났다"는 선언과 함께 사실상 무너진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중부사령부(CENTCOM)는 호르무즈 해협의 상선 피격 책임을 묻겠다며 이란의 레이더 시설과 대함미사일 기지 등 80여 개 목표물을 겨냥해 이틀 연속 공습을 단행했고 이란산 원유 판매에 대한 제재 면제 조치마저 전격 철회했다.
이에 맞서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역시 바레인과 쿠웨이트 내 미군 시설 85곳을 겨냥한 미사일·드론 보복 공격을 감행하며 역내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합동해양정보센터(JMIC)는 호르무즈 해협의 위협 수준을 '심각'으로 상향 조정했으며 원유 현물 시장에서는 전 세계적인 원유 조달망 차질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무력 충돌의 파장은 즉각적인 유가와 환율의 변동성 확대로 이어졌다. 8일 아시아 시장에서 북해산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배럴당 76.18달러까지 치솟으며 전장 대비 2.72% 급등했고 앞서 정규장에서는 5% 넘게 오르며 78달러 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원·달러 환율까지 동반 급등하면서 외부 거시 지표에 가장 민감한 원재료 수입 산업인 국내 정유업계의 셈법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진 양상이다.
◆ 원유 70% 중동 의존 정유업계…대체 불가한 공급망 한계
정유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20~3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가능성이다. 단일 운송로에 대한 구조적 의존도가 높은 중동산 원유의 핵심 길목인 만큼 이곳의 물류망이 교란될 경우 정유사들의 조달 밸류체인 전체에 심각한 충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적 긴장으로 통항이 제한됐을 때도 원유 수급 차질과 도입 단가 급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한 바 있다.
특히 국내 정유 4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는 공급망 구조상 중동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라 타격이 우려된다. 최대주주가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인 에쓰오일은 원유 조달 구조상 중동 리스크에 근본적으로 노출돼 있다. SK에너지와 GS칼텍스 역시 미국산 등 비중동 원유로 도입선 다변화를 꾸준히 시도해 왔으나 HD현대오일뱅크를 비롯한 국내 정유사들이 구축해 놓은 고도화 설비에 최적화된 중동산 중질유를 단기간에 완벽히 대체하기는 물류비용과 수율 측면에서 한계가 뚜렷하다는 평가다.
사우디의 공식판매가격(OSP) 인하 등으로 기초 조달 비용 완화를 기대했던 정유업계는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돌발 변수에 부딪히며 마진율 훼손을 방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단기적으로는 기확보한 원유의 재고평가이익이 발생할 수 있지만 사태 장기화로 초고유가 국면에 진입하면 글로벌 석유제품 수요 자체가 위축되는 이른바 '수요 파괴' 현상이 발생해 핵심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이 급락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꼬여버린 최고가격제 출구전략…담합 수사에 사면초가
글로벌 유가 변동성이 다시 커지면서 국내 에너지 정책과 정유업계를 둘러싼 역학도 복잡해지고 있다. 당초 물가 안정세에 맞춰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의 종료를 검토해 온 정부는 중동발 리스크가 재확산되자 출구전략을 잠정 보류하는 분위기다. 당장 가격 통제의 고삐를 풀 경우 유가 상승분이 주유소 판매가에 즉각 반영돼 인플레이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고가격제 유지에 따른 후속 조치인 정유사 손실보전 정산 절차 역시 안갯속에 빠졌다. 정부는 가격 통제 기간에 발생한 정유사들의 억울한 손실을 메워주기 위해 4조2000억 원 규모의 예비비를 마련해뒀지만 최근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가 14조 원대 가격 담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면서 기류가 급변했다. 검찰이 담합을 통한 부당 이익 규모를 면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정유사가 정부에 제출한 손실 규모 자체에 대한 강도 높은 검증 요구가 커진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책 당국은 과도한 보전금을 지급할 경우 담합 기업에 혈세를 지원했다는 역풍에 직면할 수 있어 검찰 수사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정산 심의를 진행하겠다며 신중론으로 돌아선 상태다. 정유업계 내부적으로도 사법 리스크가 불거진 탓에 정당한 손실보전을 선뜻 요구하기 부담스러운 기류가 감지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원가 변동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내수 가격 통제와 사법 리스크까지 겹쳐 기업이 대응할 수 있는 운신 폭이 극도로 좁아졌다"며 "단기적인 유가 상승에 따른 장부상 이익에 기대기보다는 장기적인 수요 파괴와 마진 하락 가능성에 대비해 정유업계 전반의 보수적인 생존 시나리오를 가동해야 하는 엄중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