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국내 정유업계가 배럴당 20달러를 돌파한 정제마진에 힘입어 2분기 실적 개선세를 보일 전망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를 완연한 호황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나온다. 정제마진 상승을 견인한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원유 조달 비용과 물류 불확실성을 동시에 키우면서 실질적인 이익 구조를 압박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때문이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배럴당 평균 약 24.74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국내 정유사의 손익분기점으로 통용되는 4~5달러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최근 미국과 이란의 긴장감 고조, 이집트 다미에타항 인근 FSRU(부유식 저장·재기화설비) 드론 공격 등 중동 분쟁이 에너지 인프라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지정학적 프리미엄이 유지되는 양상이다. 실제로 SK이노베이션은 전날인 30일 2분기 매출 29조1572억 원, 영업이익 3조4873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고 밝히며 이런 시장 환경을 일부 반영했다.
◆ 제품 공급난이 만든 고수익 프리미엄…비용 폭탄·유가 변동성 우려
업계에서는 이번 수익성이 경기 회복에 따른 구조적 수요 호조보다는 중동 분쟁 여파로 인한 정제시설 복구 지연과 러시아 정유설비 가동 차질 등 공급망 마비가 빚어낸 공급 차질성 강세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조사 결과 중동 수출형 정유공장의 정상화 지연과 러시아 정유설비 가동 차질 등이 겹치며 세계 정유 가동량은 전년 동월보다 하루 600만 배럴가량 감소한 것으로 파악된다. 원유 공급은 일부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휘발유·경유 등 완제품 시장의 수급이 타이트하게 유지되면서 정제마진이 수년 만의 최고 수준까지 밀려 올라간 상태다.
문제는 이런 공급 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국내 정유사들이 부담해야 할 후행 비용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유사들은 7~8월 도입 물량을 전년 동기 대비 상당 수준 확보해 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호르무즈 해협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얀부항과 홍해 수송로의 위험성이 상존하면서 선박 운임과 전쟁위험 보험료 상승 압박이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국제 해상 물류망의 불안정성이 이어짐에 따라 외교·안보적 리스크 관리의 필요성도 함께 커지고 있다.
국제유가의 급격한 변동성 역시 정유사들에게 잠재적 하방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원유를 구매해 국내로 들여와 제품으로 가공·판매하기까지 수개월의 시차가 발생하는 정유업 특성상, 유가가 기습적으로 하락할 경우 비싸게 도입한 원유의 가치가 떨어져 재고평가손실을 떠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두바이유가 하루 만에 배럴당 8달러 이상 급락하는 등 널뛰기 장세가 관측되면서 겉으로 보이는 정제마진이 높더라도 유가 변동과 운송비 추이에 따라 실제 수익성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신중론이 대두된다.
◆ 원가 상승·출고가 묶인 최고가격제…수익성 저하 기로
정부가 물가 안정을 기치로 시행 중인 석유 최고가격제의 향방 역시 정유사들이 예의주시하는 핵심 변수 중 하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휘발유와 경유 등 국내 석유제품 출고가격의 상한을 동결하는 조치를 연장한 바 있다. 정부가 중동 정세와 국내 물가 추이에 따라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제도의 종료 시점을 예측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로 인해 정유사들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반영된 높은 국제가격으로 원유 도입비와 운임·보험료를 지불하면서도, 국내 대리점과 주유소에 공급하는 판매가격은 일정 상한선 이하로 관리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됐다. 원료비는 시장 가격을 추종하는 반면 제품가는 일정 부분 규제 기조에 묶이면서 외형상 실적 지표와 달리 정유사들의 기초 체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최고액 정산위원회 운영세칙 제정안을 행정예고하며 손실 보전 가능성을 열어두기는 했으나 업계 내에서는 실효성에 대한 관망세가 이어진다. 실제 손실액을 보전받기 위한 기준 설정과 정산 지급 시점을 둘러싸고 조율 과정이 길어질 수 있어서다. 가격 통제 기조 속에서 대규모 미수금 정산이 적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하반기 정유사들의 현금흐름과 재무 건전성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 GS칼텍스 베네수엘라산 시험대…물류·수율·제재 해소 숙제
대외 리스크 통제 불가능성이 커지자 국내 정유업계는 중동 의존도를 완화하기 위한 대안 조달처 다변화에 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한국은 전체 원유 수입량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 의존해 왔지만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해 지난 5월 중동산 원유 수입량이 전년 동기 대비 32% 급감하는 등 물류 차질 위험이 가시화됐기 때문이다.
조달선 다변화 측면에서 가장 먼저 움직임을 드러낸 곳은 GS칼텍스다. GS칼텍스는 지난 6월 베네수엘라산 원유 11만 배럴을 시험 도입해 실제 공정에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원유의 품질과 공정 적합성, 제품별 생산수율을 다각도로 평가해 비상시 대체 유종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HD현대오일뱅크와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등 여타 정유사들 역시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경제성과 도입 타당성을 신중히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베네수엘라산 원유는 대표적인 중질 고유황유로 점도가 높아 추가 정제 비용이 발생할 수 있으며 국내 고도화 설비에 투입했을 때 고부가가치 제품의 수율이 다소 떨어질 수 있다는 기술적 과제가 상존한다.
중동산 대비 할인된 가격에 구매하더라도 장거리 운송비와 보험료 가산분을 고려하면 가격 경쟁력이 희석될 수 있고 미국 재무부의 금융 제재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추가적인 법적·행정적 실사 부담도 남아있다.
이에 따라 업계는 관세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 캐나다산 원유 수입량을 확대하는 방안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미국산 셰일오일은 대규모 장기 계약 체결이 상대적으로 까다로워 대체 우선순위에서 다소 밀려난 흐름이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자회사를 통해 호주 바로사 가스전에서 확보한 초경질유를 직도입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 자원개발과 정제공정을 연계한 자체 밸류체인 구축을 통해 장기 불확실성을 상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단기적인 정제마진 지표만 보고 시장 상황을 낙관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라며 "지정학적 변수나 특정 규제에 흔들리지 않도록 원유 도입선을 선제적으로 다변화하고 대체 유종에 최적화된 공정 수율을 확보하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