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소희 기자] 경기 안성시 일죽면에 자리한 서일농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독대다. 3만여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는 장독대뿐 아니라 연못과 잘 조성된 나무, 잔디, 곳곳의 쉴 공간과 함께 식당과 카페까지 들어서 있다.
농식품부가 언론과 인플루언서, 조리학교 학생 등이 함께하는 ‘대한민국식품명인을 만나는 미식 여행길’ 행사를 진행했다. 서분례 청국장 명인이 경기 안성의 서일농원에서 장독대를 닦고 있다./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전통 장류를 만드는 농장이면서 동시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손색없는 하나의 관광농원이다.
이곳의 주인공은 장독대에 담긴 시간이다. 3000개가 넘는 큰옹기 항아리에는 청국장, 고추장, 간장 등 전통 발효식품이 익어가고, 방문객은 단순히 완성된 음식을 맛보는 게 아닌 명인의 손을 거쳐 전통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볼 수도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진하는 ‘K-미식 여정’이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이곳이다. 음식 자체를 넘어 그 음식이 만들어지는 공간과 사람, 지역의 이야기까지 하나의 여행 콘텐츠로 묶는 것이다.
농식품부는 9일 서일농원에서 언론과 미식·여행 인플루언서, 조리학교 학생, 외식업계 관계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대한민국식품명인을 만나는 미식 여행길’ 팸투어를 진행했다. 올해 공개한 K-미식 여정 제3탄이다.
앞서 6월에는 ‘K-치킨벨트’, 7월에는 ‘찾아가는 양조장’을 선보인 데 이어 이번에는 전국의 대한민국식품명인과 지역의 농촌·관광자원을 연결했다.
핵심은 명인을 찾아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명인의 음식이 지역의 풍경과 문화, 체험으로 이어지고, 다시 관광객이 그 지역을 찾도록 만드는 ‘미식 여행길’을 만드는 데 있다.
장독대에서 시작되는 맛 여행…“백문이 불여일식”
서일농원을 운영하는 서분례 대한민국식품명인 제62호(청국장)는 이날 참가자들에게 청국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오랜 시간 발효되는 장류는 사진이나 영상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장독대의 풍경, 발효되는 냄새, 콩을 다루는 손길, 직접 맛보는 과정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음식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서 명인은 이날 전통음식의 가치를 설명하며 “아무리 나라가 발전되고 달나라에 신혼여행을 가도 입은 달나라에 가면 못 삽니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생활이 편리해져도 결국 사람이 먹는 음식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 “시각은 앞으로 가고 미각은 뒤로 간다”는 표현으로 전통의 맛이 갖는 의미를 강조했다. 농식품부 역시 이번 프로그램에서 ‘보는 관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오감형 미식 체험을 강조했다. 전통음식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경험 자체가 여행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날 조리학교 학생들이 명인의 현장을 직접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통음식의 제조 과정을 눈앞에서 경험하면서 음식 교육을 넘어선, 새로운 음식 콘텐츠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서 명인은 자신을 “청국장 주무르는 할매”라고 소개하면서 장 담그는 과정을 일일이 소개하고 노하우를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그간 정성껏 담아 관리하던 장독대의 장류 맛도 볼 수 있도록 아낌없이 내주었다.
그간 서 명인은 명인의 유명세와 그에 못지않은 부가가치를 모두 맛봤다. 최근에는 성공한 사업가들이 출연하는 ‘백만장자’라는 유명 TV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다시 한번 전통의 맛을 과시했지만 이날 K-미식 여정 행사에서 울컥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내비쳤다.
마치 한평생을 바쳐 전통의 맛과 멋을 이어온 명인의 삶을 국가가 인정하고 알아주며 새 길을 열어준다는 데서 느끼는 벅찬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온 것 같았다.
서 명인은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내 청국장을 먹었어요. 그러니까 시골 오지 출신이 서울에 와 청국장에 한 획을 그었다니까 너무 감개무량해서 눈물이 났던 것”이라며 “죽기 전에 이런 기회를 한번 느껴볼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국장은 보약”이라는 서분례 명인이 준비한 청국장 한상./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K-푸드 열풍에…전국 44곳을 하나의 ‘미식 지도’로
K-미식 여정 행사에 참석한 대한민국식품명인들이 대표 먹거리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승검초단자(떡)과 조기김치, 연근부각, 장류 및 각종 전통주 등 미식 여행 지도 중 서울·경기권 명인들의 제품들./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이번에 농식품부가 공개한 ‘대한민국식품명인을 만나는 미식 여행길’은 전국 6개 권역의 44개 식품명인 관련 체험·관광시설을 연결했다. 경기권 11곳, 충청권 8곳, 전라권 12곳, 경상권 9곳에 이어 강원과 제주에서도 각각 2곳씩 선정됐다.
지역별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여행 코스가 될 수 있는 특징이 드러난다. 경기에서는 안성 청국장, 포천 유과·약과, 수원 포기김치, 파주 조기김치 등 다양한 전통식품을 만날 수 있다.
충청권에는 전통주와 떡이, 전라권에는 담양을 중심으로 유과·조청·쌀엿·추성주·진장 등 다양한 전통식품이 자리 잡고 있다.
경상권에서는 안동 지역의 전통주를 비롯해 부각과 차, 식초 등을 경험할 수 있다. 강원과 제주에서도 지역의 특색을 살린 김치와 한과, 장류와 전통주 체험이 가능하다.
이번에 선정된 44곳은 지역 대표성, 체험 프로그램의 품질, 지역 농산물·향토음식과의 연계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전문가 심사를 거쳤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서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먹을 것인가’로 미식 관광의 개념을 확장하려는 시도다.
K-푸드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전통음식을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 전통식품 산업 규모는 성장세다. 2024년 전통식품 생산액은 8조3000억 원으로 전체 식품산업 생산액 137조 원의 6.1%를 차지했다. 2020~2024년 전통식품 생산액의 연평균 성장률은 6.3%였다.
수출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전통 발효식품과 장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2025년 소스류 수출액은 4억1200만 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장 담그기’ 발효문화가 유산으로
서일농원에서 진행된 장 담그기 체험행사에서 등장한 메주와 재료들./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장 담그기 시연에 나선 서분례 명인. “우리 학생들 보면 눈이 반짝반짝한데, 나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훌륭한 사람이 돼 가지고 이 우리 전통을 끌고 가야 됩니다”/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2024년 12월에는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면서 우리 전통 발효문화에 대한 관심을 확장할 계기도 마련됐다.
하지만 산업 규모가 커지는 것과 전통음식의 현장 기반이 유지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식생활 변화와 간편식 소비 확대, 1인 가구 증가, 전통 제조기술의 고령화 등은 전통음식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과제다.
이 때문에 이번 K-미식 여정은 전통을 ‘보존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 경험하고 소비하는 관광 콘텐츠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식품명인은 1994년부터 2025년까지 모두 106명이 지정됐으며, 현재 활동 중인 명인은 88명이다.
농식품부는 이들의 음식과 이야기를 지역 관광과 연결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명인의 기술과 제조과정을 기록하고 후계자 양성을 지원하는 한편, 서울 종로의 식품명인 체험·홍보관 등을 통해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
지역에서도 반길만하다. 특화 농산물이 음식이 되고, 음식이 체험이 되고, 체험이 관광이 되면서 지역에서 소비가 발생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K-푸드가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금, 다음 단계는 한국 음식을 해외에서 먹게 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맛을 찾아 한국의 농촌과 생산 현장까지 오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서일농원의 장독대에서 시작된 이번 미식 여행이 전국 44곳, 6개 권역으로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일 아침 날씨를 체크하고 장독 뚜껑을 열어가며 관리해 온 장류들. “아 맛있네. 진짜 내가 담갔어도 맛있다. 진짜 느그들 안 먹어보나, 얼른 먹어봐” 서분례 명인이 정성껏 담가둔 장맛을 선보이며 자부심을 드러냈다./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서 명인은 된장은 오래 묵어야 깊은 맛이 난다며 2019년에 담근 된장도 선보였다./사진=농식품부 기자단 공동취재단
짧지만 강렬했던 이날 K-미식여정 체험은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청국장과 달큰하면서도 청량한 매운맛이 살아있는 빨간 고추장, 오래 묵을수록 맛이 깊어지는 된장 등 이날 경험한 전통 장류의 미각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듯하다. 다음 여정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