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이 정치권으로까지 번진 가운데 박정희·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잇따라 관객을 만난다. 산업화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민주화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각각 다룬 작품이다.
두 영화가 서로 다른 정치적·역사적 관점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큰 만큼, 올해 영화계에서 불거진 진영 논리가 다큐멘터리 영역으로까지 확산할지 관심이 쏠린다.
20일 영화계에 따르면 김정희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프레지던트박 정희’는 이달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제철소 설립, 새마을운동 등 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의 주요 성과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산업화 과정을 돌아본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토대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자는 취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프레지던트박 정희'가 이번 달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진=킨스튜디오 제공
제작사 킨스튜디오는 박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의 성과를 결과물 중심으로 사실대로 담아내는 것이 제작 목표라고 설명했다. 최근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과 관련해서는 특정 작품과의 비교나 대립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영화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암살자(들)’은 극 중에서 사건 배후에 박 전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의 경계를 놓고 논쟁을 불렀다. 일부 정치권과 관객의 비판이 제작진과 출연 배우를 향한 공방으로 이어지면서 영화가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다만 ‘프레지던트박 정희’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가상의 이야기를 구성한 극영화가 아니라 전직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논란의 양상은 다를 수 있다. 특정 사건의 배후를 추정하거나 허구적 인물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작품과는 달리, 공개된 기록과 성과를 어떻게 선택하고 해석하는지가 주요한 평가 기준이 될 전망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두 대통령의 상반된 유산
내년 1월 6일에는 정성훈 감독의 다큐멘터리 ‘대통령 김대중’이 개봉한다. 김 전 대통령의 탄생 103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작품으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그가 마주한 주요 국정 현안을 다룬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 과정과 일본 대중문화 개방,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책임과 결단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 기획 의도다. 민주주의를 향한 김 전 대통령의 여정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2024)의 후속작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김대중추모사업회가 기획에 참여했다. 전작은 약 12만 8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두 작품은 각각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과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 동시에 유신체제와 권위주의 통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김 전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재임 시절의 정책과 국정 운영을 둘러싼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엇갈린다.
결국 두 다큐멘터리가 각 인물의 어떤 업적과 한계를 다루고, 논쟁적인 역사적 맥락을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담아내느냐가 작품의 균형성과 신뢰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도 피하기 어려운 진영의 시선
영화계에서는 두 작품이 ‘암살자(들)’과 같은 형태의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특성상 역사적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인물을 조명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역시 제작진의 관점에 따라 특정한 사실을 부각하거나 불편한 대목을 축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3주년을 기념해 내년 1월 6일 개봉 예정인 다큐멘터리 영화 '대통령 김대중'. /사진=명필름·시네마6411 제공
특히 두 전직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인물들이다. 박 전 대통령을 산업화의 공로자로 평가하는 시각과 권위주의 통치의 책임을 강조하는 시각이 공존하고, 김 전 대통령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시각과 집권기의 정책적 한계를 지적하는 시각도 맞선다. 어느 한쪽의 성과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다른 측면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면 상대 진영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
실제 ‘암살자(들)’ 논란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의 해석이 어떻게 정치적 공방으로 확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영화 속 설정을 둘러싼 비판은 제작진에 대한 책임론을 넘어 출연 배우를 향한 공격과 정치권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창작의 자유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책임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영화 자체를 둘러싼 논쟁이 진영 간 대립으로 옮겨간 것이다.
두 다큐멘터리 역시 공개 이후 상대 진영으로부터 편향된 역사 인식이나 특정 인물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러한 논란이 실제로 발생할지는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과 근거 제시 방식, 역사적 쟁점을 다루는 태도를 확인한 뒤 판단해야 한다. 개봉 전부터 정치적 성격을 단정하는 것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개봉 시차에도 남는 정치적 부담
그나마 두 작품이 극장에서 정면으로 맞붙는 상황은 피할 것으로 보인다. ‘프레지던트박 정희’가 이달 먼저 개봉하고 ‘대통령 김대중’은 내년 1월 6일 관객을 만나는 만큼 두 작품의 개봉 시점에는 두 달여의 간격이 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해 관객 동원 경쟁을 벌이는 직접적인 맞대결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대통령 김대중’은 전작 ‘길위에 김대중’의 관객층과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관객을 모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제작사 측은 개봉 전 전국 시사회를 추진하고, 홍보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크라우드펀딩도 진행할 계획이다.
그러나 개봉 시점이 다르다고 해서 정치적 논쟁까지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공개되는 ‘프레지던트박 정희’에 대한 평가가 후속작인 ‘대통령 김대중’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반대로 김 전 대통령을 다룬 작품의 내용이 앞선 작품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할 수도 있다. 두 작품이 각각의 관객층을 넘어 얼마나 폭넓은 관객과 만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기록하는 장르이면서도 어떤 사실을 선택하고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드러날 수 있다"며 "역사적 인물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완성도나 균형성을 미리 판단하기보다는 실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두 영화가 박정희와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진영 대결로 소비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두 작품이 다루는 인물의 상징성과 한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를 고려할 때, 영화에 대한 평가가 스크린 안에만 머물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진영 논리에 얼룩진 2026년 영화계가 두 다큐멘터리를 통해 역사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