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22) 아름다운 영혼으로 키우는 사랑의 힘
크세노폰(BC 430?~355?) 『향연』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 되는 고대 그리스 고전 가운데 동명의 작품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과 크세노폰이 쓴 『향연』이 그것이다. 둘 다 희랍어 '쉼포시온(Symposion)'으로 쓴다. 우리가 흔히 학술토론회를 가리키는 말로 쓰는 '심포지움(Symposium)'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쉼포시온'을 '향연'으로 부르는 것은 오늘날 심포지움과 다른 특성을 잘 표현한 말이다. 오늘날 학술토론회의 격식을 갖춘 행사와는 달리, 그리스의 쉼포시온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와 가벼운 주연을 곁들여 철학적 담화가 펼쳐졌다. 오늘날 학술토론회를 끝내고 뒤풀이 행사로 갖는 식사나 술자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연용 침상에 앉거나 비스듬히 누워 가벼운 식사를 들거나 포도주를 마시면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돌아가며 차례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박하는 식으로 자유롭게 토론했다. 그리스인들의 향연은 단순한 술자리나 식사 모임이 아니었다. 토론을 즐겼던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특성이 잘 담긴 관습이었다.

향연은 일종의 초대 만찬의 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최자나 초대되는 사람들의 면면에 따라 향연의 분위기와 토론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었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작품은 기원전 5세기 후반의 향연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두 작품속의 '향연' 분위기와 다루어진 토론의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다.

적지 않은 사람이 동명의 작품 '향연'에서 플라톤의 작품에 비해 크세노폰의 작품의 격이 다소 떨어진다고 말한다. 토론 내용의 철학적 깊이에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두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과 향연의 분위기가 토론의 방향과 깊이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고려해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철학적 깊이의 차이라기보다 오히려 두 향연의 토론 주제의 초점이 조금 다른 데서 오는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두 향연에서 토론을 이끄는 이는 소크라테스다. 그는 각각의 향연 참가자들의 지적 수준과 분위기에 맞게 적절하게 향연의 토론을 주도했다. 플라톤 작품의 향연은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비극 작가 아가톤이 호스트다. 게스트는 소크라테스와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알키비아데스, 파이드로스, 그리고 포이닉스와 아가톤의 지인 몇몇이다. 이들은 당시 아테네의 최고 지식인 그룹 가운데 하나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상대로 에로스를 찬미하고, 에로스의 본질을 규명하는 매우 진지한 토론을 주도했다. 향연의 장소는 아테네에 있던 아가톤의 자택이다.

크세노폰 작품 속의 향연은 엘레우시스 제의의 사제 칼리아스가 주최자다. 향연의 명목은 스포츠 제전의 우승자를 축하하는 자리다. 연극 공연 우승자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향연을 다룬 플라톤의 작품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이유다. 향연의 장소는 아테네에서 남서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항구 도시 페이레이에우스에 있는 칼리아스의 저택이다.

이제 크세노폰의 향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때는 아테네에서 가장 큰 스포츠 축제인 대(大) 판아테나이아 제전이 열렸던 시기다. 칼리아스는 그 때 열린 경마 시합에 오늘날의 격투기와 유사한 팡크라티온 경기에서 우승한 소년 아우토뤼코스를 초대했다. 칼리아스는 경마 경기가 끝난 후 아우토뤼코스와 그의 아버지를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향연에 초청했던 것이다.

그 때 주변에 있던 소크라테스와 크리토불로스, 헤로모게네스, 안티스테네스, 그리고 카르미데스도 함께 그 만찬에 초대했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있던 이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다. 칼리아스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던 아우토뤼코스의 우승을 빛내주고, 그에 대한 자신의 따뜻한 배려를 여러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칼리아스가 잘 생긴 아우토뤼코스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향연의 주제를 암시하는 복선이다.

아무튼 작품속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의하면, 칼리아스는 아테네의 왕인 에렉테우스의 후손으로 명문 가문이었고 꽤 부유했던 모양이다. 칼리아스는 익살꾼 필립보스를 불러 좌중을 웃길 수 있는 재담을 벌이게 했다. 또 시켈리아(현재의 시칠리아)의 쉬라쿠사에서 온 한 유랑 극단까지 동원해 볼거리를 제공했다. 플루트 연주자, 키타라와 무용에 능한 노예 소년과 링 돌리기와 내부에 칼이 달린 불붙은 고리 속을 뛰어넘는 재주를 부리는 곡예사까지 등장한다. 아주 성대한 이벤트가 포함된 만찬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특별한 공연단이 향연 참여자들의 대담 중에 간간이 여러 공연을 펼치다보니, 토론의 주제가 깊이 있게 나아가는 데 제약이 있었다. 한편으론 이들의 공연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육체적 재능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중간 토론 주제가 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향연』의 토론 분위기와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작품에서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전날 과음을 했으니 술은 가볍게 하고 에로스의 찬미에 집중하자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었다.

하지만 크세노폰의 『향연』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사실 소크라테스도 언급했듯이 향연의 자리에 곡예사들이 위험한 연기를 선보이는 일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익살꾼인 필립보스와 쉬라쿠사 공연단을 이끌고 온 사내까지 간간히 토론에 끼어들었다. 그러니 토론의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들과도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담을 나눈다. 이렇듯 이 작품은 그리스 향연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소탈한 인간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 익살꾼과 공연팀, 그리고 스포츠 스타가 함께 어울리는 이질적인 참여자들 사이에서 토론 주제의 깊이를 적절히 조절하면서 토론을 주도했다.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주연과 공연 분위기에서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토론의 분위기를 만들어간 소크라테스의 유연한 진행이 돋보인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토론의 핵심 주제는 플라톤의 작품과 유사하다. 주요 논제는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다. 플라톤의 작품은 에로스를 찬미하는 것을 확실한 토론 주제로 설정하고 진행된 반면, 크세노폰 작품의 주제는 각자가 자부심을 느끼는 일에 대한 논거를 돌려가며 이야기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크세노폰의 향연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참석자마다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여기는 일을 밝히고, 그 일에 자부심을 갖는 근거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한 사랑의 중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에로스의 여러 속성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향연 참가자들이 자부심을 갖는 일들은 다양하다. 먼저 호스트인 칼리아스는 자신이 타인을 정의롭게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사람들을 정의롭게 만드는 방법은 돈을 나누어 주는 것. 안티스테네스는 칼리아스에게서 돈을 받은 사람들이 칼리아스에게 감사의 뜻을 갖더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칼리아스로부터 자신이 돈을 준 사람들이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만 보이더라는 대답을 이끌어낸다. 결국 칼리아스의 자부심은 근거가 잘못된 것임을 논박한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통째로 암송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니케라토스. 하지만 그는 호메로스 작품에서 배웠다는 단편적 지식을 자랑하지만 다른 이들로부터 그 지식이라는 것이 그저 생활의 요령에 불과하다는 핀잔만 듣는다.

크리토불로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 자기도취에 푹 빠져 있는 그는 잘 생긴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공언한다. 크리토불로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사촌동생인 클레이니아스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는 클레이니아스를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겠으며, 그가 자신을 지배하고자 한다면, 자신은 자유인이기보다 그의 노예가 되길 택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에 빠진 자신의 경험에서 깨달은 듯, 미남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고, 인내와 절제력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가 모든 사람들을 탁월함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논거는 육체적 아름다움이 유인해내는 사랑의 힘인 셈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클레이니아스는 못생기기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보다 자신이 소년소녀들에게 인기를 끈다는 점을 거론하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크리토불로스도 가세한다. 그는 자신과 소크라테스 가운데 누가 더 소년소녀들의 사랑의 키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대결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그는 심사관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클레이니아스를 추천한다.

소크라테스는 대결을 승낙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실 크리토불로스가 같은 학교에 다닌 클레이니아스에게 강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 정황을 그의 아버지가 알고 자신에게 크리토불로스를 돌보아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있음을 밝힌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토불로스가 절제력을 가져야 한다고 다독이는데 더 정성을 쏟는다.

몇 사람의 토론을 더 들은 후에 진행된 투표에서 클레이니아스가 승리한다. 향연 참가자들은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소크라테스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클레이니아스가 일단 더 매력적이라고 인정한 셈이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못생긴 사람의 대명사인 세일레노스와 닮았다는 평을 듣고 있던 추남이었으니 애초에 외모 대결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카르미데스는 자신이 가난하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부자였을 땐 누군가 자기 재산을 훔쳐갈까 두려웠지만, 집안 재산을 다 처분하고 나니 마음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며 가난의 이점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이 참주와 같다고 비유한다. 국가에게 돈을 뜯기는 법이 없고 오히려 국가가 세금으로 자신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거지근성에 의존하는 삶이 아닌가. 결국 그의 가난은 아름다운 청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안티스테네스는 카르미데스와 반대로 자신은 부유함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부유함은 재력이 아니다. 마음의 부유함이다. 그는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도 더 큰 갈망을 갖기 때문에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는 돈을 버는 데 집중하는 사람보다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이 더 정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사람들의 것을 갖고자 열망하지 않는 마음의 부유함이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유자적하며 소크라테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는 무소유의 소유의 철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청빈한 생활 속에서 인을 실천하기 위해 애썼던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떠오른다.

헤르모게네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친구들을 가진 것을 자랑했고, 익살꾼 필립보스는 남을 웃기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곡예단을 이끄는 쉬라쿠사에서 온 이는 뛰어난 곡예 재주를 가진 노예 소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향연 참가자들이 자신들의 자부심의 근거들은 충분히 개진했었지만, 안티스테네스 이외에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을 내놓지는 못한 듯하다.

기대되는 마지막 화자는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에로스를 찬미하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토론이어서, 맨 마지막 화자였던 소크라테스는 앞에서 좋은 이야기들을 다해서 정작 자신은 어려움에 처했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각자의 화두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상호 비교될 여지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가 자부하는 중매술에 대한 좌중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중매쟁이 역할에 능하다고 자부했다. 소크라테스는 안티스테네스가 중매술에 뛰어난 사례를 보여주었다 말한다. 안티스테네스가 자신이 무슨 뚜쟁이술을 갖고 있냐며 펄쩍뛰지만, 소크라테스는 안티스테네스가 칼리아스를 현자 프로디코스에게 중개한 것을 그 예를 들었다. 이는 칼리아스를 철학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한편, 돈이 필요한 프로디코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니 성공적인 중매가 아니었냐는 것이다. 이로써 소크라테스가 의도하는 중매쟁이의 역할은 남녀 간의 사랑의 중매술을 넘어 지혜 사랑을 포함하는 차원 높은 사랑에 대한 담론임을 드러낸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서로를 알고자 열망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탁월한 중매술로 보았다. 좋은 뚜쟁이의 역할은 어떤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잘 가르치는 일이다. 남녀 간에 잘 사귀도록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을 국가 전체의 마음에 들도록 만드는 일도 역시 뚜쟁이의 역할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소크라테스는 일생을 중매쟁이로 산 철학자다. 무지한 사람을 일깨워 지혜를 사랑하게 이끄는 일에 매진했으니 말이다. 그는 지혜를 중매하는 차원 높은 뚜쟁이인 셈이다.
 
   
▲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 좌상.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새로운 주제는 위대한 다이몬(Daimon), 에로스 신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이에게 육체적 힘과 참을성, 용기 그리고 자기절제를 증명해" 보이기를 열망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성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두 종류를 설명하면서 어떤 사랑이 바람직한 사랑인지 설명한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우라니아 아프로디테와 판데모스 아프로디테로 나뉜다. 전자는 천상의 아프로디테요, 후자는 범속의 아프로디테다. 이는 영혼의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상징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랑은 정신적 사랑, 즉 영혼의 사랑이라고 말하며, 육체를 열망하는 자는 마땅히 거렁뱅이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두 가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속성을 소크라테스는 땅을 임대하거나 소유한 사람에 비유해 설명한다. 상대의 겉모습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땅을 임대한 사람처럼 어떻게 하면 땅에서 최대한 많은 농작물을 수확할 것인가에 관심을 둔지만, 진정한 우정을 원하는 사람은, 그 땅을 더 가치 있게 돌보는 모든 방안을 다 활용하는 데 매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과거 신들이 훌륭한 영혼을 가졌던 영웅들을 불사의 존재로 만들어준 설화를 전해주며 영혼의 사랑의 고결함을 강조한다. 오레스테스와 필라테스,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모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유명했던 남성 커플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이 최고의 반신으로 추앙받는 것도 이들이 동침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존경하고 위대한 일들을 공동으로 추구하여 성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바이가 사랑받는 소년과 그를 사랑하는 애인들로 군대를 구성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예도 든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사랑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즉 정신적 사랑의 힘이 서로를 발전시키고 더 위대한 성취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이 향연의 주최자인 칼리아스에게 그가 열망하는 아우토뤼코스에 대한 사랑을 영혼의 사랑으로 가꾸어가라는 직접적 교훈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칼리아스가 이번 향연에 미소년 아우토뤼코스를 초대하면서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함께 초청한 것을 영혼의 사랑의 징조로 기정사실화하면서 그를 격려한다. 그가 만약 육체적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면, 그의 부모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숨기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칼리아스와 좌중을 영혼의 사랑과 인연을 맺어주는 뚜쟁이 역할을 훌륭히 한 셈이다. 결국 애초에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며,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중매술이야말로 가장 충실하게 합당한 주장이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실로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덕으로 이끄는 탁월한 중매쟁이임에 틀림없다. 이는 말미에 칼리아스가 자신이 정치 활동을 하고 항상 국가의 호의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와 중매해 달라고 소크라테스에게 요청하는 것으로도 소크라테스의 탁월함이 입증된다.

이 작품은 어떻게 하면 인간들을 선하고 훌륭한 영혼의 소유자로 만들 것인가를 평생 고심하며, 실천하고자 했던 소크라테스 철학의 일면을 충실히 보여준다. 그는 지혜와 선한 영혼을 갖고자 갈망했고, 그리스인들을 그 지혜와 선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끌고자 했다. 그는 사랑 밖에 아는 게 없다고 말하고 했다. 맞다. 그는 에로스에 달통한 현인이었다. 그는 무지와 탐욕에 찌든 인간과 선한 영혼 사이를 끈끈한 에로스로 결합시키고자 했다. 그의 철학은 이런 자신의 소명을 실천해 나가는 수단이었다. 그는 '지혜(sophia)'를 '사랑(philo)'하는 진정한 철학자 필로소피아(philosophia)였다.

지금 우리 사회야말로 사람들을 선한 영혼과 덕성을 갖춘 시민들로 인도하는 영혼의 중매자가 필요한 시기다. 하지만 그런 소크라테스의 부활은 요원해 보인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향연』, 크세노폰 지음, 오유석 옮김, 작은이야기(2005), 229쪽.

[미디어펜=편집국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