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보다 끔찍한 누진세 폭탄,
에어컨은 한여름밤의 꿈?(上)
“6살 아이가 더위를 많이 타는데다가 잘 때 땀이 나면 땀띠가 나기 때문에 아이가 집에 있는 동안은 계속 에어컨을 켭니다. 누진세 때문인지 전기세(전기요금)가 한 달에 많게는 30만원까지도 나와요.”

“그나마 집에 바람이 잘 불어서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켜면 잠들만 하지만 그러면 창밖 소음으로 시끄러워서 잠들 수가 없거든요. 깨지 않고 편하게 푹 잔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출근해서도 내내 지칩니다."

   
▲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9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아파트의 창문이 폭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열려 있다. 가정용 전기요금에만 6단계 누진제를 부과하기 때문에 가정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쉽게 가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서도 전국 곳곳으로 한낮 폭염특보 발효는 기본이고, 열대야마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연일 기록적인 폭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창문을 활짝 열고 있을 수가 없다. 

무더운 날씨 속에 냉방기 수요가 급증하면서 일반 가정에선 전기료 부담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연일 폭염특보가 발효되자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자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집에서 냉방기 한번 쉽게 사용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통상 일반 가정에서 에어컨을 하루 3시간가량 튼다고 가정하면 월 20만원 이상의 전기요금이 나온다. 가정용 전기요금에만 부과되는 6단계 누진세 탓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정마다 에어컨이 설치돼 있음에도 쉽게 가동하기 어려워지게 됐고, 이에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의 목소리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누진제는 전기를 많이 쓸수록 요금 단가가 높아지는 구조를 띄고 있다. 가정용 전기요금은 보통 6단계로 나뉘어 부과되는데, 1단계는 100킬로와트시(100kWh) 이하, 2단계는 200킬로와트시 이하, 6단계는 500킬로와트시 초과 등이다. 

1단계에 해당하면 킬로와트시 당 전력량 요금이 60.7원이지만 6단계에 들어가면 709.5원으로 11배 가량이나 차이가 난게 된다.

상가에 적용되는 일반용 전기요금은 1킬로와트시에 105원, 대기업 공장 같은 생산현장에 적용되는 산업용 전기요금은 킬로와트시 당 81원가량으로 정해져 있다. 

이에 반해 가정용 전기요금은 2단계에만 해당해도 킬로와트시 당 125원가량으로 산업용이나 일반용 전력 요금 단가를 훌쩍 넘어선다. 가정용 6단계 요금을 적용하면 산업용이나 일반용에 비해 7~8배 가량 치솟는 것이다. 

전력량 요금에다 기본요금까지 합산할 경우 요금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국내 가구 10곳 중 7곳가량이 가정용 전기요금 2~4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점쳐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서민층 대부분이 산업용이나 일반용 전기요금보다 더 높은 요율을 적용받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구간과 전력량 요금 수준을 전면 재검토해 서민층을 위주로 가정용 요금부담을 완화해 주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 연일 전국 곳곳에서 폭염특보(기상특보)가 계속되는 가운데, 폭염 속에서 전력수요가 사상 최대치를 찍으며 전력수급에 노란불이 켜졌지만, '개문냉방'(냉방기를 켠 채 문을 열고 냉방 하는 것) 영업행태는 여전하다. / 연합뉴스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면서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시민들의 소송도 급증하고 있다.

폭염에도 '요금 폭탄'을 우려해 집에서 마음대로 에어컨을 틀지 못해 뿔난 시민들이 법정 다툼을 통해서라도 과거 책정된 누진세의 시시비비를 가려보자고 뛰어드는 모양새다. 

이처럼 전기료 폭탄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가정용 전기요금 부과 체계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부 당국은 ‘부자감세’, ‘전력대란’의 우려로 누진세를 개편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해 빈축을 사고 있다.

가정용 전기요금에 적용되는 누진세가 불만의 요체임에도, 정부는 ‘폭염특보에 따라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등의 주문만을 내놓으면서 그야말로 속수무책 수렁으로 깊이 빠져드는 모습이다.

정부는 2007년 전력을 많이 쓰는 가정에 높은 요금을 부과해 전기사용 절약을 유도하고 전력을 적게 쓰는 저소득 가구의 전력 요금은 낮춰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내기 위해 누진제를 처음 적용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전력사용 행태가 크게 달라졌는데 소비자들에게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관련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전기 요금제 개편을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전력 관련 학계 등 전문가들은 10년째 유지해 온 전기요금 체계를 이제는 바꿀 데가 됐다는 데는 대체로 공감한다.

애초 취지였던 소득 재분배 효과는 점점 떨어지는 반면, 오히려 저소득층에만 절약을 강요하는 상황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에너지경제연구원 관계자는 "가구당 전력소비가 증가하면 이런 추세를 반영한 누진구간이나 누진 배율의 조정이 필요함에도 10년간 전혀 변화가 없었다"며 "적정원가를 반영한 요금구조보다 소비절약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현행 누진세 적용이 저소득층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저소득층에는 복지할인요금이 적용되긴 하지만, 장애인 가구처럼 전력사용이 많을 수밖에 없는 가구는 결국 누진제로 인해 원가 이상의 요금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제도 시행 기관인 한국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전기요금을 두고 불만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도 "전기요금은 물가, 가계경제, 신산업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쳐 고려할 부분이 많다는 게 한전 관계자의 설명이다. [미디어펜=김세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