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직전의 낙동강전선·부산 교두보 구축…김일성 파멸의 전주곡이 된 '5천분의 1' 작전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부 겸임교수
인천상륙작전 획기적인 발상? 정해진 수순?

1.

전쟁에 대한 기록은 결국 승자에 대한 미화다. 승자에 대한 미화는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우리는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잃었으며, 7월 3일에는 인천까지 점령당한다. 미군의 최초 선발대로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7월 5일 오산에서 최초의 전투를 했지만 허무하게 패배했다. 패배한 한국군은 계속 밀려나면서 결국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에까지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북한군 14개 사단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9월까지 낙동강전선은 붕괴직전의 한국군 사단 5개와 미8군에 의해서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보일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 양욱 수석연구위원 발제문 중에서 -
 
반면 김용삼 기자의 ‘김일성 신화의 진실’에는 6.25에 대한 매우 흥미진진한 분석이 등장한다.

남침초기의 불의의 기습을 통한 전술적 승리는 그 후의 무계획적인 전쟁수행으로 인해 엉망이 되고 말았다. 북한군 정예인 6사단은 주력에서 이탈하여 호남지역으로 이동했다. 북한군의 불필요한 우회는 한국군이 부산에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고 8월 7일부터 11일 사이 유엔군이 마산 근처에서 북한군 6사단을 격파하자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일성이 정규군 사단장 정도의 군사지식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이처럼 모험적이고 위험천만한 전쟁수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는 100~200명 이상의 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없는(특히 현대의 전차전인 탱크 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전형적인 빨치산 게릴라 중대장 출신으로 초전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합리적 이성을 상실했다...(중략)...7월에 접어들면서 소련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김일성이 전쟁에 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중략)..말리노프스키 원수는 1964년. ‘스탈린과 김일성’의 저자 가브릴 코로트코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략) 그는 서울 주력부대가 포위망을 뚫고 나가도록 놔두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파멸의 전주곡은 시작되었다. 전쟁 상황을 신중히 분석한 결과 김일성은 1950년 8월에 패배했음을 알게 되었다.” - 김용삼 상기 저 690~691p 중/괄호 강조는 필자 -

두 기록은 경미하게 충돌한다. 김용삼에 따르면 전쟁은 이미 8월 중순 김일성이 패배를 자각한 상황이다. 이는 전쟁 개시일은 6.25로 잡은 것과 연동해서 생각할 때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설득이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은 수많은 가능성 중 한 두 개의 사례를 들어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둘 다 사실일 수 있다는 얘기다. (토론인 까닭에) 김용삼의 주장을 전제로 개인적인 의견을 이어가자면 8월 중순부터는 이미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마칠 것인가 그리고 유엔군이 어떻게 반격을 해 올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논의를 좁힐 수 있겠다. 전면적인 반격에 대해서는 서로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희생도 크고 효과도 없다. 그렇다면 다음의 고려는 당연히 상륙작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는 6월 29일 최초로 전선을 시찰한 그 날에 이미 상륙작전을 떠올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맥아더 전기에 따르면 시찰 20분 만에). 그때 붙여놓은 이름이 블루하츠다. 절반은 영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군사적 지식의 총합이다. 상륙작전을 염두에 둔 것은 당연히 공세를 벌이는 쪽도 마찬가지다. 마오쩌뚱은 “적은 인천, 남포, 군산으로 온다”고 아예 찍어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인천을 조심하라”고 확정까지 했다. 다행히 김일성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고 생각한다). 전사戰史를 읽어봤으면,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해했더라면 다 접어두고 상륙작전 저지에 전력투구했을 것이다.

   
▲ 김일성이 정규군 사단장 정도의 군사지식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모험적이고 위험천만한 전쟁수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는 100~200명 이상의 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없는(특히 현대의 전차전인 탱크 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전형적인 빨치산 게릴라 중대장 출신이었다. 김일성은 초전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합리적 이성을 상실했다./사진=(좌)김일성, (우)박헌영

 
상륙작전의 효과는 일차로 보급선 차단이다. 다음이 적을 싸안아 괴멸시키는 효과다. 인천상륙작전을 20세기의 칸나에 전투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전이 어느 지역으로 결정될지는 명확해진다. 남포는 너무 멀다. 군산은 너무 가깝다. 인천은 그 중간이며 서울과 근접하여 성공할 경우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다만 셋 중 조건이 최악이다. 여기에 맥아더의 탁월함이 있다. 하나는 이를 설득하는 것이다. 둘은 실행하는 것이다. 9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작전을 승인받기까지 기울인 맥아더의 노력은 그것 자체가 작전이다. 실행의 탁월함은 양욱 위원의 발제 중 ‘군사사軍事史속의 의미’에 설명되어 있어 생략한다.

* 중간에 질문 하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통속적인 설명이 성공 확률 5천분의 1 작전이다. 대체 1/5000은 어떤 확률인가. 참고로 프로 골퍼의 홀인원 확률은 1/3000이다.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많은 것이 변한다. 애초에 유엔군의 참전 목적은 38선 밖으로 침략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천의 성공으로 최초의 유엔 결의는 수정되고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결정된다. 10월 1일 한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는다. 38선 이북으로 유엔군이 넘어올 경우 참전하겠다는 중공의 경고는 위협으로 여겨졌지만 나중에 현실이 된다.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2.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꼭 기억되어야 할 것이 장사상륙작전이다. 삼척 근처에서 상륙작전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이나 군산에서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작전은 있었지만 실제 병력이 상륙까지 한 것은 장사상륙작전이 유일하다. 그리고 앞의 둘과는 성격 자체가 다른 것이 장사상륙작전이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서 벌어진 작전이다. 육군본부 기록에는 작전명 제 174호라고 되어 있으며 최종 승인자는 정일권 참모총장이다. 작전의 목적은 독립 제 1유격대대 772명이 LST(landing ship tank) 문산호(2,700톤 급)를 타고 장사에 상륙하여 200고지를 확보하고 7번 국도를 봉쇄,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유격대란 일정한 제복을 착용하지 않고 정규군에 속한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은 채 전투 행위를 하는 부대다. 쉽게 말해 게릴라전이다. 유격대대원 772명은 인민군 복장을 한 채 배에 올랐다. 말이 좋아 유격대대지 실은 전원이 학도병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들이 받은 전술, 전투 교육은 2주가 전부였다.

   
▲ 사진은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 장사 해변에 도착한 문산호. 후미의 닻이 끊어지면서 문산호는 좌초됐다./사진=자유경제원 세미나 자료집


9월 14일 오후 4시, 부산항을 출발한 문산호가 장사 해변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새벽 5시였다. 태풍이 부는 중이었다. 후미의 닻이 끊어지면서 좌초된 배는 해변과 수십 미터 거리를 두고 평행으로 늘어서면서 인천상륙작전보다 더 최악의 상륙작전이 개시된다. 고무 보트를 타고 해안으로 향하는 학도병들에게 인민군 1개 대대가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가까스로 해변에 상륙했지만 엄폐물이 전혀 없는 해변이었다. 상륙한 중대 하나는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전멸했다. 학도병들은 손으로 모래를 파서 개인호를 만들어가며 싸웠다. 그렇게 10시간의 혈투 끝에 상륙작전은 성공을 거뒀다. 이들의 성공은 단 하루였다. 대규모 부대가 상륙한 것으로 착각한 인민군은 무적의 김무정 군단을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학도병들은 200고지를 버리고 다시 해변으로 후퇴했다. 식량은 딱 사흘치만 지급 되었는데 그나마 상륙을 하면서 물에 빠뜨린 병사들이 많아 이들은 배고픔과도 싸워야 했다. 학도병들은 민가에서 밀가루를 구해 수제비를 해 먹으며 버텼다. 3일째 되던 날 미군 헬기가 나타나 식량 약간과 의약품을 떨어뜨리고 갔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조치원호가 도착한 것은 작전 개시 나흘 째 되던 날이었다. 근처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의 헬레나 함도 달려왔다. 그러나 구출작전은 쉽지 않았다. 조치원 호에 오르려다가 더러는 파도에 쓸려갔고 밧줄그물을 타고 오르다 총에 맞아 죽었다. 다 구하지도 못했다. 악천후와 다시 상륙작전이 펼쳐지는 줄 알고 사정없이 퍼부어지는 사격으로 조치원호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해변에는 30명이 남아있었다. 좌초한 문산함에도 학도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겨놓고 조치원호는 뱃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오랫동안 작전 날짜가 9월 14일로 기억되는 바람에 한동안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주의를 돌리는 작전으로 오해를 받았다. 사실과 다르다. 상륙작전의 기미가 보이면 경계가 강화되기 때문에 상륙개시일인 9월 15일 오전 6시까지는 모든 작전이 중지된 상태였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진행된, 낙동강 전선 반격 작전의 양동작전이었다.

장사상륙작전 동지회 사무실에는 맥아더가 보낸 편지 한 장이 남아있다.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하며 용맹과 희생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학생들이 그 큰 배를 몰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산함을 운행한 선장과 선원들은 상륙작전 당일 모두 전사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선장이었던 민간인 황재중씨가 출항 전에 남긴 글이다. 문산 호는 1997년 3월 6일에 난파선으로 발견됐다. 배 안에는 유골도 다수 들어있었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부 겸임교수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최초의 유엔 결의는 수정되고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결정된다. 10월 1일 한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는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이 글은 지난 12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인천상륙작전의 세계전쟁사적 의미’ 세미나에서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입니다.)

[남정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