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 사령부가 판단한 작전의 위험성과 국제정세…세계사의 이정표가 된 전쟁
위험을 극복 할 때 위험은 사라진다
- 인천상륙작전의 사례 -

1. 유엔군 사령부가 판단한 작전의 위험성과 국제정세

한국전쟁 발발이후인 8월 23일 동경에서 열린 회의에서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그의 계획을 설명하자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은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인천보다는 군산을 상륙지점으로 택할 것을 권고하였다.

당시 유엔군 사령부가 판단한 상륙작전의 중요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인천이라는 작전지역의 위험성이 전략가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당시의 계획을 살펴보면, ‘계획 100-B(인천)’, ‘계획 100-C(군산)’, ‘계획 100-D(주문진)’의 3개안 중 낙동강에서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 100-B(인천)’가 선택되어 9월 15일을 예정으로 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여기서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야기 될 수 있었던 연합 및 합동부대 작전계획의 문제점, 즉 인천상륙작전이 실시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고, 작전계획을 반대했던 美펜타곤과 유엔군 사령부의 이유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개 격파의 위험성이다. 인천은 부산에서 240km나 떨어져 있고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소수의 유엔군을 분산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또한 인천에 상륙할 예정병력이 불과 2개 사단 규모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소수의 병력으로 각개 격파당할 염려가 있고, 예비 병력의 증원도 바랄 수 없는 형편에 놓인 다는 점.
 
둘째, 낙동강방어선의 유지곤란이다. 당시 유엔군 계획에 따라서 미8군에서 해병여단을 차출하여 상륙작전 제1대대로 쓰려고 하는 계획이었지만, 해병대를 낙동강전선에서 차출하게 된다면, 부산교두보의 확보가 위태롭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인천상륙작전의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될 거라는 점.

셋째, 일본의 방어 공백이다. 일본에 있는 미국 육국 제7사단을 상륙작전부대로 쓰게 된다면 일본의 육상방어력이 없어지게 되므로 일본 북쪽에서의 소련의 위협과 일본자체의 치안문제오도 곤란이 생길 염려가 있다는 점.1)

   
▲ 처음부터 끝까지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핵심을 기습작전에 두었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넷째, 상륙선박의 부족이다. 인천상륙작전에 쓸 만한 선박은 결코 충분하다고 볼 수 없으며, 미8군에 대한 보급용 선박까지 전부 사용하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만일 작전에 실패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가 있다는 점.

다섯째, 인천의 지형적, 해안적 조건의 부적합이다. 인천의 지리적, 지형적 조건이 모두 상륙작전에는 전혀 맞지 않다라는 것은 대부분이 수긍할 수 있는 사실로 써. 특히 해군측 상륙작전 전문가가 제시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았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곳으로 평균 6.9m이며 최고 10m까지 달할 때도 있다. 따라서 만조의 경우 폭이 1.8km에서 2km, 길이가 90km, 깊이가 10m 에서 15m의 구불구불한 수로를 통과해야 되는데 이 수로의 조류속도가 평균 5m에 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수로에 만일 기뢰를 설치하였다고 한다면 단 한척의 배가 이 기뢰로 말미암아 침몰될 때, 이 수로는 완전히 막혀버리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인천항의 입구에는 표고 105m에 달하는 월미도가 솟아 있는데 인천항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먼저 월미도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지만, 여기가 굳게 지켜져 있을 때에는 적어도 이틀 동안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작전상의 전술적 불가결의 요소인 기습(Counter Attack)효과의 달성이 어려울 것이다.

주상륙은 17:00(만조시간)에 시작함으로써, 야음을 이용(EENT 18:30)하여 실시할 수밖에 없는 인천항의 불리한 조건으로, 자재와 병력을 양륙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두 시간밖에 없었다. 따라서 적의 야간반격을 지탱할 수 있는 물자와 병력을 양륙하려면 특별한 방안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인천항에 상륙용 주정이 접할 수 있는 곳은 5m 이상이나 되는 인천항의 안벽뿐으로 이 안벽으로 직접 통과해야 하고, 통과 후 바로 인천시가의 중심을 향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시가지 전투를 연이어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시 인구 25만이나 되는 도시 안에 높이 솟아있는 건물에서 적의 부대가 반격을 하게 된다면, 양륙시간이 제한되었던 것과 같이 해두보 설치를 위한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또한 인천에 상륙하려면 언제나 만조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만일 북한군이 유엔군의 상륙을 예상한다면, 그들은 9월 15일과, 10월 11일, 11월 3일이 상륙예정일이 되리라는 것쯤은 계산할 수 있고 또한 상륙시간까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륙시기를 기습적인 시기에 임의로 선정할 수 없는 난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제반문제 이외에도 유엔군측 해군이 제해권은 장악하고 있었지만, 적이 기뢰를 부설해 놓았을 때, 이를 극복하는 문제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하여 아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하게 될 때 지금까지 수세로만 몰려있던 낙동강의 전세도 역전되어 공세로 전환되는 한편, 도리어 적이 반대의 입장에서 수세에 몰린다면, 1949년 3월 18일 소련 · 중공방위조약을 체결할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무려간섭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다.

   
▲ 한국전쟁 발발이후인 8월 23일 동경에서 열린 회의에서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그의 계획을 설명하자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은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2. 맥아더의 판단

위와 같은 반대여론은 당시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 평가받던 맥아더를 견제하려는 유엔군과 워싱턴 현지의 관료적 해석에 의한 “목적 없는 반대”라는 것이 정설 이였지만, 2차 대전을 경험한 당시의 군 수뇌부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이였다. 그럼에도 맥아더 사령관이 작전 감행을 고집하게 된 이유는 맥아더 사령관의 연설문에 잘 나와 있듯 처음부터 끝까지 맥아더는 작전의 핵심을 기습작전에 두었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군이 위와 같은 문제들로 인해 작전의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만큼, 적의 지휘부도 역시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요소가 적에게 기습을 가할 수 있는 충분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둘째, 맥아더 사령관이 “전사는 우리에게 십중팔구가 병참선의 차단으로 인하여 격파 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한 바와 같이 아군이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한다면 적은 양쪽에서 협공을 면치 못할 것이고, 부산교두보의 압력을 당장 완화 시킬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적은 당시 모든 보급품과 탄약을 서울을 통해 공급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차단하면 낙동강전선의 교두보를 공격하는 적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판단한 점이다.

셋째, 인천을 점령하면 곧 수도 서울을 탈환할 수 있으며, 이로써 한국국민들에게 정치 · 심리적인 면에서 안심을 주고 국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적은 불의의 역습을 당해 대혼란을 일으켜 낙동강 전선도 그대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넷째, 미국의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만약 아시아에서 전쟁에 패배하면 유럽의 균형도 중대위기에 직면할 정도로 한국전쟁이 중요한 전쟁이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공적인 작전수행을 위해서는 인천이 적합하다는 점이다.

다섯째, 인천의 선택으로 약 10만 명의 인명살상을 막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군산의 선택은 적의 병참선 차단이 불가능하고 적을 포위 섬멸할 수 없기에 상륙작전의 궁극적인 목적달성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발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 부대를 포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3.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업적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발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 부대를 포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 피해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인천상륙작전 없이 낙동강에서 38선으로 단계적으로 북상했을 경우 소요시간은 30일, 아군 인명 피해는 13만 9957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미군 측의 평가였다.2)

실제로 인천상륙작전 후 38선까지 도달하는 데 유엔군과 국군이 입은 전 · 사상자는 8478명에 불과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을 때의 추산치와 대비해 겨우 6%에 불과한 인명 손실만으로 전세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양영조 박사는 바로 이점이 인천상륙작전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라고 본다. 

양영조 박사는 “낙동강에서 단순히 총반격으로 38선으로 올라갔을 때와 비교할 때 불과 10여 일간의 전투로 서울 탈환에 성공해 전체 전투일수를 3분의 1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아군 병력 14만여 명과 국민 200여만 명의 피해를 줄인 것으로 평가된다.”고 인천상륙작전의 의의를 평가했다. 

인천상륙작전의 또 다른 의미는 핵무기의 등장과 함께 그 중요성이 평가 절하되던 상륙작전의 유용성이 다시금 부활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과 유럽에서 미군이 전세를 역전시킨 발판은 모두 상륙작전이었다. 하지만 핵무기가 개발된 이후 상륙지점에 단 한 발의 핵무기만 떨어져도 상륙부대가 전멸될 것이라는 생각에 상륙작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편견을 보기 좋게 깨며 상륙작전이 시기적절한 상황에서 실행될 경우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줬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체 18개 군단급 부대 중 무려 9개 군단을 동해안과 서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6·25전쟁 전문가들은 “유엔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공산군 측은 무려 전력의 50%를 후방에 배치해야 하는 뼈아픈 상황에 빠져든 것” 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단 한 번의 작전 성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6·25전쟁의 결정적 작전 중 하나” 라고 평가할 수 있다. 

   
▲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체 18개 군단급 부대 중 무려 9개 군단을 동해안과 서해안에 배치해야 했다./자료사진=연합뉴스

4. 냉전의 서막을 알린 한국전쟁, 세계적 차원에서 평가해야

우리가 인천상륙작전 뿐만 아닌 한국전쟁에서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은 당시 한국군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의 병력들이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직후에 곧바로 투입된 전쟁 인력들이라는 점이다.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했던 여론도 찬성했던 여론도 실전경험이 풍부한 전략가들의 머리에서 나온 평가이기 때문에 단순히 인천상륙작전 이라는 성공한 군사작전의 사례로써만 평가해서는 안 되고, 더 큰 의미로써 한국전쟁 자체를 긍정적 차원에서 평가해야 한다.

애초부터 대한민국의 비극은 공산주의의 탄생과 실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국에 관한 한 미국의 좌파세력(liberal)의 책임도 크다. 대한민국은 결코 스탈린의 소련 관할권으로 넘겨서는 안 될 국가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일본 전쟁에서 소련과 스탈린이 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좌파세력은 역사의 방향을 오도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막다가, 한반도에 공산 제국주의의 확산을 허용했던 것이다. 공산 제국주의자들에게 대한민국과 우리민족의 절반을 유린하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2차 대전의 영웅이자 영국의 육군원수 버나드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당시 미국대통령의 “루즈벨트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분명치 못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몽고메리는 더 나아가 당시 “스탈린은 손쉽게 루즈벨트를 우롱했다”고 적고 있다. 좌파적 성향을 가진 세력의 우유부단함과 연약함이 60년간 대한민국 절반의 민족에게 저런 참혹한 참상을 가져오게 만든 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3)

한국전쟁의 본질은 한반도내의 공산주의 역량만으론 대한민국의 공산화가 불가능해지자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동맹에 의한 침략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소련은 북한에 3개 사단을 최신식으로 무장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고 전투기, 정찰기 등 140대를 배치시켰다. 한반도에는 없던 당시 최고 무기인 T-34 탱크 100대를 지원, 배치하고 군사고문을 타스통신과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위장하여 북한군을 지휘한 것이 바로 소련과 스탈린이다. 

모택동의 중국도 한반도의 공산화는 곧 중국혁명 완수의 일부분이고 중국 공산혁명의 연속이라고 보았다. 모택동은 조선인 4만 2천명을 소련이 제공한 무기로 무장시켜 제5, 제6 및 제12사단으로 만들었고 제4사단에 배속시켜 서울 점령의 선두에 서도록 했다. 그 밖에도 동북야전군 제38, 제39, 제40군 등 18만 동북변방군을 압록강 북방에 예비 병력으로 대기시켜놓았다가 결국 참전시켰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은 바로 공산제국주의에 맞선 반제국주의전쟁이자, 공산주의의 확대에 맞선 반공산화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 붕괴시키기 위한 공산세력과 김일성의 반민족적 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은 노예와 독재, 그리고 민족 멸망의 길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민주주의와 그리고 시장경제체제를 지키고 민족 번영의 길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세계는, 세계사는, 세계인류는 바로 한국전쟁을 통해 공산주의와 새로운 공산 제국주의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 때부터 전세계적 차원에서 세계 인류는 악의 체제인 공산 제국주의에 맞서 봉쇄(containment)를 시작하고 압박(rollback)을 시작했던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 세력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에도 한국에도 좌파가 힘을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그 세계사적 반격의 시작이었고 그 끝은 바로 중국의 개혁개방(1978), 베트남의 도이모이(1986), 동독의 붕괴(1989)였고 소련의 붕괴(1991)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은 바로 세계사가 가야할 이정표(里程標)를 만들어 세운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 1백만의 사망과 5백만의 희생을 가져왔다. 인류 전쟁사에 7번째 대규모 전쟁이자 인류 세계사에 3번째로 가혹한 전쟁이란 희생을 치루고 서야 우리 민족이 세계와 만들어 세운 세계사의 이정표였던 것이다. 그 이정표를 보고서 일로매진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떠오르는 용>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고, 그 중심에 인천상륙작전의 세계사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1) 당시 일본에는 미8군 예하 보병 제24사단(큐슈), 제25보병사단(일본본토 서부), 제1기병사단 (일본본토 동부), 제7보병사단(훗카이도)이 위치하여 점령군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보훈논총 제9권)

2) 조병희 (국방일보, 2010. 09. 15)

3) 조갑제 : 조갑제 닷컴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미”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12일 개최한 ‘인천상륙작전의 세계전쟁사적 의미’ 토론회에서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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