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49) 로마의 일인자가 되기 위한 카이사르의 전쟁
카이사르(BC 100~BC 44) 『내전기』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인류 역사상 벌어졌던 숱한 전쟁의 동기는 다양하지만 결과는 늘 비극적이라는 점에서는 한결같다. 더구나 같은 종족 간의 전쟁이 가져오는 외상과 심리적 내상은 더욱 혹독하다. 기원전 1세기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이집트,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5년여 동안 벌어진 로마군 사이의 내전의 상흔이 그러했다.

카이사르는 8년 동안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정복한 이후, 로마 원로원과 평민파 사이의 대립적 정쟁의 와중에서 내전의 한쪽 주역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에 맞닥뜨린다. 원로원으로 대변되는 귀족파의 중심인 폼페이우스와 평민파의 지원을 받는 카이사르의 격돌이 바로 그것이다.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오리엔트를 평정한 영웅 폼페이우스와 갈리아 정벌로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된 카이사르는 거대 영토의 제국이 된 로마의 막강한 권력을 놓고 대결한다. 이미 내전의 조짐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는 한 때 서로를 의지하고 지원하며 보수적인 원로원에 맞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개인적 결속인 '삼두동맹'을 맺었었다.  

하지만 삼두동맹의 안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가 출산 중 죽게 되자, 장인과 사위 간의 정략적 끈마저 사라졌다. 또 민중파와 원로원파의 대립과 폭력사태로 정상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게다가 폭동과 소란이 들끓어 이미 내전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원로원 건물이 군중들에 의해 불살라지기도 하는 등 무정부적 혼란이 가중되자,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소집해 공공질서를 회복시킬 권한을 부여했다.

결국 로마에 남아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폼페이우스와 갈리아를 정복한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카이사르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재관으로서 정치권력과 군사지휘권을 확보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귀국 후 개선장군으로서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을까 우려한다. 

이에 원로원과 결탁하여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즉각 로마로 복귀하라는 '최종 권고'를 내린다. 이는 비상시에나 선포되는 것으로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카이사르는 '국가반역자'로 몰리게 된다. 

갈리아와 로마의 국경지대인 '루비콘 강' 앞에서 카이사르는 운명적 결정을 하게 된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상이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장악함으로써 군사쿠데타에 일단 성공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에 불복하며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로마의 군대와 5년간에 걸쳐 제국의 곳곳에서 동족상잔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갈리아 전쟁에서 거의 연전연승하던 카이사르는 동족과의 대결인 폼페이우스와의 전투에선 쓰라린 패배도 많이 겪는다. 로마인의 전법이나 전략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휘하 부장이나 주요 지휘관들도 과거의 인연에 따라 한 때 부하나 동료였다가 적으로 맞서는 경우도 많았다. 내전이 서로에게 버거운 전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더구나 육상 및 해상 전력, 자금력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 비해 '10대 2' 정도로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지휘관과 병사들의 역량의 차이, 사기와 단결력에 의해 결판이 났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에겐 거친 게르만인과 갈리아인과의 8년간 전쟁으로 다져진 풍부한 실전 감각과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탁월한 전투 지휘 능력이 군사력의 열세를 극복하게 했다. 반면에 폼페이우스는 오리엔트 제패이후 8년간 전투를 치른 적이 없었다. 병사들의 숙련도 역시 떨어졌다. 이런 상황은 파르살루스 대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귀결됐다. 이후 패주하던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살해되고, 폼페이우스의 아들과 지지세력 마저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모두 소탕되면서 내전이 종결된다.

카이사르의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선에서 보여주었듯이 내전과정에서도 기동성을 극대화하고 끊임없이 장병들의 자긍심을 북돋웠다. 사실 내전에 참가하는 병사들은 어느 쪽 편을 들어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이러한 병사들의 심리적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이에 따라 내전의 발발 원인이 로마의 영토를 넓힌 전쟁 영웅인 자신을 몰아내려던 폼페이우스 측에 있다는 점을 설득했고, 승리에 대한 후한 보상을 약속했다.  

카이사르는 항복하는 적은 함부로 목숨을 빼앗지 말거나 누구에게도 폭력을 가하거나 재산상의 피해를 입히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는 비록 적으로 맞섰지만 동족인 병사들을 포용하기 위한 적절한 정책이었다. 갈리아 정복 전쟁기보다 자비와 관용을 최우선으로 강조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카이사르는 내전 동안에도 폼페이우스 시기의 법에 따라 부패행위로 재판을 받고 지위를 박탈당했던 사람들의 권리를 회복시켰다. 또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사람들의 부채를 탕감하는 등의 시책을 통해 로마시민의 인심을 얻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도 내전을 승리로 이끈 동인이 된 것 같다.

 <내전기>는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들어가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클레오파트라가 결부된 왕위쟁탈전에 휘말려 벌인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서 끝을 맺는다. <내전기>는 카이사르가 치른 대부분의 내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로마인들끼리 싸운 비극적인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카이사르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여 폼페이우스에게 굴복하였다면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안정과 평화를 이끌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폼페이우스의 역량과 자질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강토와 국가의 부가 급격하게 팽창하고 확장되면서 제국을 완성해 나가던 로마가 안고 있던 갖가지 문제와 갈등요소를 현명하게 해결하고 국가의 부강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카이사르 역시 내전의 승리가 로마 유일의 절대 권력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후일 공화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내전기』,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사이(2012, 1판 9쇄), 283쪽.

[박경귀]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