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면했던 국제정치·안보 위기…냉혹했던 미국 vs 자주국방 강화한 10월 유신
   
▲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10월 유신의 국제정치학적 해석 (하)

4. 박정희 정권의 안보환경: 미국

박정희 집권 18년(1961~1979)의 대외 안보 환경은 문자 그대로 격변의 시대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1962), 월남 전쟁(1965~1975), 닉슨 독트린(1969), 미·소 데탕트(1960년대 후반~1970년대), 키신저의 비밀 중국방문(1971.7.) 그 이후 미·중 관계 개선 및 수교,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1976~), 김일성의 대남 게릴라 전쟁(1968~) 등 모두가 박정희 정권이 헤쳐 나가야했던 엄청난 대내외적 도전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1968년부터 1972년 사이 대한민국이 당면했던 국제정치적 도전은 기왕의 국제정치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는 구조적인 도전이었다. 즉 이전의 사고방식과 발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급속히 전개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두 가문의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들이 상대방을 향해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다가 갑자기 어른들끼리 화해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리전을 치르느라 오히려 더욱 처절하게 싸우고 더 깊은 상처를 입은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는 사전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자기들은 싸움을 그만 두겠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 보고는 알아서들 하라고 한다. 10월 유신이 있기 2~3년 전 한국 정부가 당면한 상황이 바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은 국제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에 대한 적응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라도 국제정치의 격변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동에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게는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는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는 이 같은 난관들을 극복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법을 강구했고 궁극적인 방법은 한국의 통치권을 자신의 수중에 더욱 강화 시키는 10월 유신이었다. 

냉전시대의 논리:  블록 내 결속(Intra Bloc Cohesion), 블록 간 대결 (Inter Blac Hostility)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부터 1969년 미국에서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기 직전까지 박정희 집권 18년 중 초기 7년 동안 대한민국은 국제정치 체제에 상당히 잘 순응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박정희의 쿠데타와 독재에 대해 미국이 불만을 토로한 적은 있지만, 냉전이 치열했던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냉전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미국도 박정희 정권을 비록 독재정권이기는 했지만 미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지원과 대접을 해 주었다.

당시 대한민국과 미국의 대외정책은 대단한 조화(調和, in harmony)속에 진행되었다. 국제정치가 상대적으로 단순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소련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소위 제3세계가 출현했지만 냉전 초반기의 세계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세계를 거의 완전하게 양분한 후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견고한 양극 체제 (Tight Bipolar System)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정치는 긴장이 대단히 높기는 했지만 약소국들은 자신이 속하는 진영의 최고 강대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었고 경제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세계가 둘로 쪼개진 상황에서 양 진영을 리드하는 강대국들은 세계 방방곡곡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하찮은 곳에서 발생하는 약소국들의 분쟁 일지라도 그 배후에는 반드시 소련 혹은 미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냉전 전반기의 모든 국제분쟁은 사실 미국과 소련이 벌여야 할 분쟁을 약소국들이 대리(代理)로 싸워주는 것과 같았다.  

   
▲ 박정희가 통치했던 대한민국은 상대적인 약소국으로서 국가의 생존 그 자체가 국제체제의 제반 상황 변동에 그때그때 ‘적응’(adapt) 함으로써만 가능한 나라였다.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의 싸움이 자신들의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작은 전쟁에도 개입했고, 적정 수준에서 전쟁이 제한(limited war)될 수 있게 했다. 작은 나라일지언정 그 나라가 몰락, 상대방 진영으로 편입된다는 것은 전 지구적인 균형(Global Strategic Balance) 에서 자신이 손해를 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대국들은 작은 국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냉전 시대는 국제정치 사상 특이한 시대가 되었다. 강대국들이 하찮은 약소국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약소국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전쟁에 과감하게 개입하던 시대였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은 바로 남베트남(越南)이라는 작은 나라라도 공산권으로 넘겨주면 안 된다는 냉전 초기의 국제정치적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한국이 미국의 안전에 사활적으로 중요해서가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전 세계로 확산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한국을 지원해 주러 왔었다. 

이처럼 냉전 초기, 각 진영 내부 국가들 간의 결속력은 대단했다. 미국은 한국을 적극 지원해 주었고 한국은 미국이 하는 일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경우 적극적인 외교,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냉전 시대 미국 진영에 속한 약소국들은 소련 진영에 속한 모든 약소국들을 적국으로 취급했다. 예로서 한국은 폴란드와 적국이었다. 두 나라가 적대적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은 미국 편, 폴란드는 소련 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사실상 별 적대적인 일이 있을 리 없는 폴란드 혹은 헝가리는 한국을 적대시했고 적극적으로 북한을 편들었다. 

이처럼 냉전 전반기 국제정치는 간단했다. 같은 진영 소속 국가들은 결속력(intra-bloc-cohesion)을 과시했고 다른 진영 소속 국가들에 대해서는 사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적개심(inter-bloc- hostility)을 보였다. 냉전 초반 미국 진영 소속 국가들과 소련 진영 소속 국가들은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적과 친구가 헷갈릴 이유가 없었고, 양 진영에 소속된 작은 나라들은 소련 혹은 미국으로부터 안전과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냉전 전반 시대의 한반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미국에 의해, 북한은 소련에 의해 그 안전이 보장 받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한 이유는 한국 그 자체가 미국의 국가안보에 중요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소련의 영향력이 한반도 전체에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미국인들의 관점이 당시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정당화시키는 더 중요한 이유였다. 

6·25 전쟁 이후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휴전선은 사실상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전(全) 지구적 전략균형선(Line of the Global Strategic Balance)이었다. 한국이나 북한이 감히 터뜨릴 수 없는 선 이었다. 김일성 혹은 이승만이 통일을 호언했던 것은 이 선을 자신들이 무너뜨리겠다는 말이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정치 작동 원리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냉전 초반 한반도의 휴전선은 무너질 수 없는 선이었다. 

휴전선이 무너질 수 없는 선이었다는 사실은 통일도, 전쟁도 모두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북한 혹은 한국의 단독적인 능력으로 미·소 양극체제의 중요한 갈등선인 한반도의 휴전선을 터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1968년 미국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이 같은 패러다임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시아인의 방위는 아시아인들이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행정부의 정책은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에게 충격적인 도전으로 다가왔다. 미국은 그동안 세계의 지도국가로서 행동했지만 닉슨-키신저 외교팀에 의해 갑자기 전통적인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회귀, 강대국 세력 균형정책의 회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동안 안정된 양극체제 하의 냉전구조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진영의 주도국가에 의존하고 안주해 왔던 약소국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안보 공황 상태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국가 안보가 위태로운 한국의 경우 박정희와 집권세력은 미국의 정책 변화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충분한 국력이 존재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대만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릴 수 있다는 사실, 또 중국과 한편이 되기 위해 월남을 포기하고 중국 앞바다를 주기적으로 항해하던 미국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서태평양 해역에서 빼 준 사실, 무엇보다도 미국이 공산국가인 중공과 화해를 한다는 사실은 아시아 주변 반공 국가들이자 미국진영에 속하던 국가들에게는 충격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 1969년의 7월 닉슨 독트린, 뒤이은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 월남을 포기하려는 미국의 태도, 미국과 중국의 접근, 남·북한 간의 접촉과 7·4 남북공동선언 등 당시 국제정치적 사건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미국 외교의 패러다임 변화: 베트남 포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 사람들은 자신의 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이 부여한 책임’을 맡아 지구의 질서를 재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천명 된 미국의 이 같은 대외정책은 약 25년 정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시작된 냉전시대의 논리는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히 변질되었다. 1970년대의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 담당했던 역할을 더 이상 담당할 생각이 없었다. 닉슨과 키신저에 의한 1968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세계의 경제와 안보에 책임을 지던 초강대국의 역할을 포기하고 현실주의에 입각, 다수의 강대국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을 추구하고자 했다. 미국은 세계 도처에서 담당했던 안보 수호자의 역할을 지역의 동맹국들과 보호국들이 스스로 알아서 담당해야 한다며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다.

이 같은 변화가 특히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은 아시아 지역에서였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은 공산국가들을 한 진영으로 취급해서 대항했고 중국을 중요한 적대국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이 되었을 경우 중국과 미국은 잠정적인 동맹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한 관계가 되었다. 

중국과 친한 관계가 된 이유는 물론 미국이 주적(主敵)으로 삼았던 소련을 견제하고 궁극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이래 급속히 관계가 악화된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간파한 미국은 중국을 소련 진영에서 떼어냄으로써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 진영을 결정적으로 약화, 분열시키고자 했다.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떼어 내기 위해 미국은 베트남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사전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은 ‘국제질서를 위해 민족주의를 감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럴듯한 말은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유 월남(남베트남)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기는 했지만 미국은 그동안 지원했던 월남을 팽개쳐 버리고, 공산주의로 포장을 하기는 했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보다 강한 월맹(North Vietnam)이 월남을 무력 흡수 통일 하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중국의 세력이 동남아로 진출하는 것을 더 잘 막아줄 세력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공산 월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월맹이 베트남을 통일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베트남에 5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파병, 미국의 월남 전쟁을 지원했던 한국은 이 같은 사태의 진전에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 더 나아가 배신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10월 유신을 설명하며 오버도퍼 기자는 ‘남한을 비호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약해지는 상황’이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지만, 월남 전쟁의 종결 방식을 보면 미국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공산주의 국가인 월맹이, 자신이 그동안 지원해 왔던 월남을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것조차 눈감아 줄 수 있는 나라로 보여질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불변의 국제정치적인 논리다. 적과 친구는 영원하지 않고 오직 국가이익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미국은 월남 전쟁에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미국을 의리를 지키는 혈맹으로 믿고 있던 당시 한국 국민들과 박정희 대통령이 받았던 충격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닉슨 독트린과 주한 미군 감군

인류 사상 처음으로 달을 정복한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이 지구로 귀환하던 1969년 7월 25일, 닉슨 대통령은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태평양 상에 있던 미국 항모 호네트 호에 승선했다. 지구로 귀환한 우주인들을 환영한 후, 닉슨은 아시아 5개국 순방을 위한 일정이 시작되기 전날, 미국령 괌(Guam) 섬에 도착했다. 

이날 밤 닉슨은 돌연히 백악관 수행 기자단과 예고 없는 기자회견을 갖고 아시아 전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 했다. “앞으로 세계 평화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이 아시아에서 올 가능성이 있다. 이는 주로 침략 전쟁을 추구하는 중국, 북한, 월맹 등에서 오는 위협이 될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이 침략에 대비해 대미 의존도를 버리고 스스로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자립적으로 국내 안보와 국방 문제를 해결하게 되길 바란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철수하지 않고 계속 우방으로 남아 적절한 경제 원조를 지속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군사적 개입 및 군원 계획은 점차 축소될 것이다.”   

닉슨의 언급은 베트남 전쟁의 1차적 책임을 베트남인들에게 맡기겠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선언이었다. 당시 미국은 4년 째 월남 전쟁에 빠져들고 있던 중이었으며, 이미 2만 5,0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戰死)한 상태였다. 미국은 월남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미국 국내의 월남전 반대 무드 역시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명예롭게 빠져 나올 수 있느냐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사실 1968년 선거전에서 닉슨 후보가 내세운 공약도 월남 전쟁을 명예롭게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괌 선언에 근거, 미국은 1973년 베트남과 전쟁을 종식하는 평화조약을 맺게 되며 월남은 궁극적으로 월맹에 의해 무력 흡수 통일 당하게 된다.

   
▲ 특단의 방식으로 헌정(憲政)을 중단시키고, 집권 기간을 사실상 종신제로 만들어 놓았던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7년 만에 종식되었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베트남은 물론이지만 닉슨의 괌 선언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라는 한국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괌 선언은 탈 이데올로기, 데탕트로 개편된 국제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은 냉전 시대의 외교정책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미국은 더 이상 자유 진영을 위한 헌병 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며, 월남이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붕괴 당하면 이웃인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이 줄줄이 공산화 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도 폐기 되는 것이었다.

괌 독트린, 차후 닉슨 독트린으로 명명 된 이날의 선언은 1970년 2월 18일 「197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대외정책 백서에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동(同) 백서는 ‘어떤 나라의 국방도 경제도 미국 혼자만이 떠맡을 수는 없다.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백서는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서의 군사적 개입을 줄이고, 우방국이 핵  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은 군사 및 경제적 원조만 제공하고, 당사국은 미국의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1차적인 방위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앞으로는 미국이 아시아의 전쟁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닉슨의 이 같은 정책은 당연히 당장이라도 주한 미 지상군도 철수 내지 감축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주한미군이 빠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월남 전쟁에 5만 이상의 병력을 파견한 박정희의 월남전 파병 결단이 헛수고가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1970년 5월 9일 미국의 「성조」지(Stars and Stripes)는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 감축을 고려한다고 보도했다.  5월 29일에는 ‘레어드 국방장관이 한 연설에서 미 국방성은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으며 이 철수는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고, 시초는 1개 사단 이하의 병력이 될 것’ 이라는 외신이 보도되었다.  

주한미군 감군과 박정희 정부의 대응

이제는 기억에서 멀어졌고 당시의 상황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1970년 미국의 감군 통보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반응은 애절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의 정책 변화는 마치 배신처럼 받아들여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 1개 사단 철군의 일방적 통보 운운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신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6월 16일 국무회의는 ‘주한미군 감축이란 중대 결정이 어느 일방의 필요나 편의에 의해 한국 정부와의 합의 없이 강행된다면 이는 한미 상호 협정의 위배이며 맹방으로서의 신의를 저버린 행위’라는 대미 경고 성명을 채택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결국 미군 철수의 상황이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에 전전 긍긍한 나머지 내각 차원의 경고를 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1970년 7월 6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주한미군 1개 사단의 감축을 통고했다. 

7월 8일 로저스 미 국무부 장관은 월남전 참전 7개국 회의에 참석했던 최규하 외무 장관에게도 1개 사단 감군을 통고했다. 최규하 장관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통고를 받은 당일 서울로 돌아왔다. 외무장관이 청와대 회의 참석을 위해 급거 귀국해야 할 정도로 주한미군 철수는 엄중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한국 정부는 청와대를 정점으로 주한미군 철군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7월 9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은 정일권 총리, 최규하 외무, 정래혁 국방장관,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등을 청와대로 소집, 미국 측 통고 내용에 대한 대책을 협의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강구한 최선의 방법은 미국의 철군 정책이 확고한 이상 한국의 국가 안보에 결함이 생기지 않는 최대한의 ‘사전 보장’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김동조 주미 대사도 7월 11일 급거 귀국했다. 7월 11일 주한미군 감축을 위한 협의를 하자는 미국 측의 제의를 일축한 한국 정부는 한국 측의 전투력 증강 및 노후 장비 대체 등 장비 현대화가 선행조건으로 합의되지 않는 한 감군 논의에 응할 수 없다며 버텼다.

한국 국회 본 회의는 대미 결의문을 채택하고 정일권 내각의 총 사퇴설마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22일 오전 8시 30분(한국 시각) 호놀룰루 미 태평양 사령부에서 제 3차 한·미 연례 국방각료 회담이 열렸다. 7월 23일 한·미 양국은 이틀간 열린 회담을 마무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골자는 한국의 방위력 증강을 위해 미국의 군사원조가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추가적인 방위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태평양 지역의 타 미군기지로부터 일부 공군기를 한국 내 기지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발전시키며 가능한 한 단시일 내에 상당수 S-2형 해군 초계기를 제공한다는 것 등이었다.

7월 23일 오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래혁 국방장관을 맞아 회담 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보장이 확실치 않다고 판단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 내 방위산업 육성과 국군 현대화 등에 관한 대응책이 감군에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양보할 수 없는 대원칙’으로 삼았다.

이 무렵 우리나라 신문들에는 연일 미국 측의 대안들인 팬텀기 부대 배치, M-16 자동소총 공장 건설 등 주한미군 감군에 얽힌 뉴스들이 보도 되었다. 8월 24일 오후 2시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 미 부통령이 닉슨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서울을 방문 했다. 8월 25일 상오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애그뉴 부통령은 최규하 외무, 포터 대사 등을 배석, 회담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군 현대화를 위한 종합 목록을 제시하고 미국이 원조해 준다는 추가 군사원조 2억 달러를 증액, 연차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애그뉴는 확실한 대답을 못했고 2시간으로 계획된 회담이 6시간으로 길어졌다. 점심을 커피와 케이크로 때웠다. 

다음날 아침 8시 30분 청와대 조찬 형식으로 2차 회담이 1시간 30분 동안 있었다. 한미 양측은 앞으로 한국의 안전보장과 미군 감축 문제를 동시에 논의하기로 약속하고 장비 현대화, 장기 군사원조, 2만 명 이상 감축하지 않는다는 미국 측의 보장 등을 앞으로 있을 고위 군사회담에서 계속 협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날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기내에서 애그뉴 부통령은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아마도 앞으로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완전 철수될 것이다”라는 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언급을 했다.

결국 1970년 10월 15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경기도 운천(雲川)에 있던 미 제7사단 제1여단 사령부 캠프 카이저(Camp Kaiser)가 11월 15일을 기해 폐쇄된다고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감군 관련 협상을 벌이고 있던 한국 정부는 미국 측으로부터 캠프 카이저 폐쇄에 관해 아무런 사전 협의를 받은 바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1970년 10월 16일 미국 「성조」지는 주한미군 철군 예정 병력의 절반이 넘는 1만 2,000명이 이미 한국에서 철수 했다고 보도함으로써 한국의 미국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주한미군 당국은 캠프 카이저의 폐쇄는 부대 이동을 의미할 뿐 병력 감축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미군기지에서 근무하고 있던 한국인 종업원들은 “수개월 전부터 상당수 미군이 빠져 나갔다”고 증언했다.

11월 15일 미군 당국은 예정대로 캠프 카이저를 폐쇄하고 그 시설을 한국군에 이양했다. 그날 오후 기지 해체식이 거행되어 캠프 카이저의 성조기는 17년 만에 하강되었다. 7사단 뿐 아니라 2사단도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결국 1971년 3월 말까지 미군은 휴전선 일대에서 철수를 완료하고 대간첩 작전 지휘권을 비롯한 모든 휴전선 지역의 방위 책임을 한국군에 이양했다. 이로써 한국전쟁 휴전 18년 만에 한국군은 판문점 주변 500m의 경비를 제외한 155마일 휴전선 전체의 방위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냉전시대 미국의 외교정책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 안보를 거의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한국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이 같은 임무 교대를 ‘국민소득 5000달러 대 200달러의 교체’로 표현한, 가슴 저미게 하는 기사가 있다. 미군들은 밤이면 5m마다 철책선에 매달아 놓은 등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적의 야간 침투를 경계했지만 한국군은 돈이 없어 철책선의 전등을 모두 끄고 달빛과 별빛으로 경계에 임했다. 

미군은 트럭 1대 당 8달러의 물을 사다가 날마다 샤워를 했지만 한국군은 우물을 파서 식수 문제를 해결했고 1개 분대가 거주하던 미군 내부반에는 한국군 1개 소대가 기거하게 되었다. 한국군 장병들은 “미군은 돈으로 지켰지만 우리는 피와 땀으로 지키겠다”며 미군이 게을리 했던 철책선 전면의 사계 청소, 교통호 구축작업등으로 구슬땀을 흘렸다. 

1970년 말 철수한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은 1950년 9월 17일 인천 상륙작전의 주력 부대로 한국전에 참전, 서울을 탈환한 데 이어 11월 21일에는 예하 17연대가 압록강이 흐르는 혜산진에 도착한 최초의 유엔군 부대였다. 7사단은 철의 3각 지대, 펀치볼 등에서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였으며,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중공군 2개 사단을 맞아 5일간의 혈전에서 7,000명의 중공군을 섬멸한 전승을 기록한 부대다. 1971년 3월 27일 한국에서 이한(離韓) 고별식을 마친 메 제7사단은 같은 해 4월 2일 미국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에서 창설 54년 만에 해체되었다. 

1969년 당시 6만 6,531명이었던 주한미군은 1970년에는 5만 2,179명, 1971년에는 4만 740명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월남 전쟁의 확대로 인해 주한미군이 철수 될 것을 염려하여 5만 명에 이르는 한국군을 월남 전쟁에 파견 했던 박정희는 주한미군이 단 2년 만에 2만 6,000명이나 빠져 나가는 상황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냉혹함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스스로 국방력을 강화해서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 발상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나왔던 것이다. 

   
▲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2017 특별기획전 '잘 살아보세-희망과 도전의 시간들'의 개막식이 지난달 10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사진=미디어펜/사진=미디어펜

5. 국제안보 환경 변화가 유신체제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필자는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박정희가 당면하고 인식했던 국제정치적 사건들이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출범 시킬 수 있는 근거로 작동 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아무리 막강한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어떤 변혁적 사건을 기획하는 경우, 그것을 정당화 시킬 일말의 근거라도 제시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박정희처럼 ‘형식적’이나마 국민투표 등의 절차를 밟아 일을 진행한 사람일 경우, 최소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필자는 1968년 이후 1972년 까지 박정희가 인식하고 경험한 사건들은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계획하는데 충분한 자극제가 되었으리라고 판단한다. 즉 박정희와 당시 대한민국이 당면했던 국제정치 상황, 안보상황은 박정희가 유신체제라는 비상한 체제를 출범하도록 하는 충분한 조건을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같은 논의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명제들을 분석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1) 상황 변수가 전혀 없는 경우라도 박정희는 유신을 단행했을 것이다.

(2) 상황 변수가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3) 상황 변수가 있었더라도 유신을 단행하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위의 명제들은 심리학적 분석이 포함되어야만하기 때문에 사실상 객관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의 압도적 다수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명제 (1)을 따르는 분석가들이 그렇게 볼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 이니까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박정희가 다른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연구자들의 개인적인 판단일 뿐이지 객관적으로 검증 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명제 (2)는 사회과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분석을 대변한다. 불난 집(House in Fire)의 비유와 비교될 수 있는 명제인데, 집에 불이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모두 집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계단을 통해 달려 나갈 사람도 있고, 성질 급한 사람은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당황할 것이고 살 길을 강구할 것이라는 점에서 명제 (2)는 설득력이 있다. 

박정희는 약소국의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혁명가로서, 국제정치의 파도에 늘 시달리던 인물로서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계단을 통해 뛰어나갈 것을 택하지 않고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가 가만히 있는 것이 나았다. 즉 명제 (3)이 타당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아마 박 대통령은 좋은 의미에서는 한 4년 국정을 더 맡아 벌려 놓았던 일을 마무리 지었으면 하는 집념이 강했다고 할 수 있고, 또 달리 생각하면 나 말고는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없다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도 여겨진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슷한 논리로 필자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대통령이 부시(George W. Bush)가 아니었다 해도 미국 대통령의 반응이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박정희가 당면했던 상황은 적어도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출범 시킬 수 있는 필요조건을 제공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하비브 대사는 박정희의 10월 유신 단행을 “야당을 무력화하고 통치권을 강화해 적어도 앞으로 12년간 장기 집권하겠다는 의사의 표명,” “객관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판단할 때 이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미국에 보고했지만 미국은 몇 달 전 필리핀에서 유사한 조치가 야기되었을 때 뒷짐을 지고 구경만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비브는 10월 유신과 미국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급급했다. 그는 미 국무부에 보고한 문건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작금 진행되는 일과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고 건의했던 것이다. 워싱턴은 하비브의 조언을 받아들여 박 대통령이 단행한 조치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기로 결정 했다. 

미 국무부는 미국과의 어떠한 사전 조율도 없이 그처럼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지만 박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도록 노력하라고 권고하지는 않았다. 미 국무부는 하비브에게 미국이 유신에 반대하는지를 누군가 물어오면 “그것은 남한 내의 문제이며… 그가 결정할 일”이라고 대답하라는 지시했다. 

미국은 박정희의 독단적인 결정에 분노했지만 미국 역시 한반도의 운명을 미국의 독단으로 논한 적이 많았다. 1971년 6월 미 하원 외교 극동소위원회 청문회에서는 ‘한국 중립화 안’이라는 황당한 안이 나오기도 했다. 이 안건은 미·중 타결에 의해 남한에서 중공에 위협이 되는 미 군사력을 철수시키며, 일본 군사력을 한반도에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중공은 북한을 설득, 김일성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군사적 통일을 저지하게 한다는 것이 중립화의 의미였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는 1972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주한미군이 “감축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유엔군이 여기에 남아 있고 한미방위조약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우리 안보에 하나의 주축이 되어 북한 공산집단의 전쟁 도발을 막는 유일한 방파제가 되는 것이지, 4대국 보장론 운운하는 것은 하나의 잠꼬대 같은 소리입니다”, “강대국들이 배후에서 개입할 경우 이해가 틀리면 절대로 합의가 안 된다는 것… 강대국들이 입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 승부는 다 끝나 버립니다…”라며 미국의 한반도 구상을 격하게 비난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시민자유, 인권, 민권 등의 개념으로 판단할 경우 대단히 잘못된 나쁜 체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말은 극히 모호한 개념으로, 보편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종북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내재적 접근에 의하면 그들이 비난하는 박정희의 인권 문제도 근거가 없게 된다. 

유신시대에 관한 미국의 평가가 갈리는 이유도 여기 있다. 미국 정치가들 일부가 한국의 인권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비판한 게이너와 스트리이더(Jeffrey B. Gayner, James Streeter)는 “한국 정부의 조치들을 판단하는데 미국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 것은 잘못이며, “더구나 미국은 한국처럼 워싱턴으로부터 30마일 거리에 미국과 거의 대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적국과 대치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과연 한국이 그 현실적 역사적 난국을 감안 할 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민주주의관을 그대로 따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애초 10월 유신을 격하게 비판했던 필립 하비브도 프레이저 상원의원의 질문에 대해 “한국의 ‘위협에 대한 인식’은 정당하다”고 대답했다. 차후 좌파적인 시각에서 한반도를 분석한 셀릭 해리슨(Selig Harrison) 역시 “ 박정희 대통령의 장점은 개인적 욕망을 초월한 스파르타 적 강직성을 지닌 인물로서 쌓아온 욕망과 신임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공격에 초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박정희가 유신을 통해 개인적으로 득을 보고 있었는가? 혹은 개인적인 권세의 추구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주의적인 숙려에 의해 행동하고 있었는가의 문제를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본 논문은 보다 큰 연구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진행했지만, 필자는 글라이스틴 대사가 말했던 것처럼 “역사가들이 균형을 잡았을 때, 그들은 박정희를 현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추대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37주기 및 탄생 100돌을 맞아 박정희기념재단이 2017년 창간한 '박정희정신'에 게재된 글입니다.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하에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쓴 '심층분석, 10월 유신의 국제정치학적 해석'(하편)입니다. 미디어펜은 이를 상, 하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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