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보수인 동시에 진보였던 '진짜 보수'
약팔이가 되고 싶은 젊은 보수 이야기

I. '빨간약'을 먹으니, 보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보수로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역사적 실험을 통해 이미 그 우월성이 입증됐다. '자유’를 선택한 쪽은 살아남았고, 그 반대를 선택한 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들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선한 마음 또는 본능적인 감정적 동요와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정교한 작동 원리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헌법적 가치들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청년들은 종종 수구라든가 재벌의 앞잡이라는 비아냥거림을 견뎌야 한다.
 
때때로 보수 청년이 된 상황이 괴로워서, '빨간약을 괜히 먹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좌파로 남아 사회 탓, 부자 욕이나 하며 대충 묻어갔으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내게 보수가 됐다는 것은 '빨간약을 먹었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 얘기다. 주인공은 파란약과 빨간약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얻는다.

파란약을 먹으면 가상의 매트릭스 세상에서 기존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지만, 빨간약을 먹으면 가상의 세계에서 깨어나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알고 있던 세계는 모두 가짜이며 컴퓨터가 매트릭스라는 공간을 만들어 인간을 배양하고 있다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진짜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컴퓨터와 힘겨운 투쟁을 이어나간다.
 
대한민국에서 빨간약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의 삶은 영화 속과 같이 더 힘들어진다. 누구의 탓을 할 수 없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떼를 부려서도 안 된다. 자기책임은 보수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다. 물론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바르게 알게 되는 순간 보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젊은 세대는 한국이 무너지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지킬 것이 많은 분들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은 젊은 세대가 더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 나라가 무너지면 젊은이들은 가장 먼저 설 자리를 잃게 된다./사진=미디어펜


II. 한국의 발전 역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한국인들은 대개 잊고 살지만, 한국의 발전 역사는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의 땅에서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경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가 탄생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한 위대한 지도자 덕분이다.
 
처음 남북이 분단됐을 당시, 남한은 북한보다도 훨씬 못 살았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공장 시설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고, 대부분의 전기가 북에서 생산됐기 때문이다. 남한은 미래가 없는 나라, 원조가 없이는 살 수 없이는 살 수 없던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만드는 데 시동을 건 사람들이 나타났다. 시장경제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정책을 발판삼아 세계로 나아간 선구자들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쟁’을 활용한 지혜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수출을 늘리기 위해 원화를 절반으로 평가절하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다. 60년대 초에는 광물 수자원 철광석 무연탄 흑연 갯지렁이 등을 내다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수출했고, 차차 봉제품을 수출 목록에 올렸다. 70년대에는 섬유류, 합판, 가발 등을 수출했다. 그렇게 64년 수출액 1억달러에서 13년(77년) 만에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기업가들은 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박정희는 이를 받아들여 놀라운 수출 성장을 이뤄냈다.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기, 철, 반도체 등의 생산도 시작했다. 64년도에 포항종합 제철을 건설했고, 75년도에 처음 석유회사를 설립(현 SK석유)했다. 66년도에는 카이스트를 설립해 반도체 등 과학 기술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전국을 단일 시장으로 통합한 경부고속도로는 야당의 심각한 반대를 극복하고 70년에 완공됐다. 물론 모두 박정희 대통령 때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 과정에서 모든 정치적 논리를 배제하고 오로지 경제적 결정 방식을 선택했다. 우수한 민간기업을 주체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공에는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의 꽃인 '경쟁’의 이점을 활용한 박 대통령의 지혜가 바탕이 됐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가능케 한 우남의 결단력
 
이 모든 발전의 기반을 닦은 사람은 물론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공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다는 것이다. 우남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려면 소련 스탈린과 그의 지시를 받은 북한 김일성의 계획을 가까스로 막았다. 소련은 북한의 공산주의화를 위해 김일성을 지도자로 세웠다. 북한은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해 사실상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과격한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의 토지개혁까지 단행했다.
 
이승만은 소련이 북한을 친소 공산국가로 만들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남한 우익진영의 지도자 가운데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의도와 이후 북한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 유일했다.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이념의 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이승만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우선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1946년 6월 3일, 그 유명한 '정읍발언’의 배경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가까스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국가체제로 출발했다. 다시 생각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 우남 이승만 초대 건국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은 시장경제 번영과 기업 성장에 관한 토대를 만들었다.


경제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발전의 토대도 닦았다. '경제 대통령’ 하면 박정희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도 이승만의 기틀 닦기가 아니었다면 상당시간 지체됐을 것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2년이었다. 1948년 건국 이후 혼란스러운 정치 체제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1952년부터 약 3년간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완전히 새로운 나라의 토대를 세우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이승만 대통령은 1963년부터 이룩한 초고도성장의 기틀을 탄탄하게 다졌다.
 
1950~1961년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총 27억달러의 경제원조를 받았다.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됐다는 일간의 폄훼와 달리, 이승만은 독립운동시절부터 사사건건 미국과 각을 세웠는데 이는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물가상승률을 억제하고 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소비재 공업을 우선적으로 건설하기 원한 미국과 달리 이승만은 기간제 산업과 생산재 공업을 먼저 일으키길 원했다. 자립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원조달러로 수입한 물품을 팔아 적립한 대충자금을 국방비, 도로·항만·수도·전기 등 사회간접자본과 민갑기업에 대한 투융자에 활용했다. 이승만은 대충자금의 대부분을 투자에 활용함으로써 1950년대 한국 경제 부흥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54~1960년 한국은 연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4.9%를 기록했다.
 
이승만의 또 다른 경제 업적은 바로 귀속재산의 민영화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기업체, 은행, 회사 설비, 주식, 토지, 주택 등 귀속재산은 미군정을 거쳐 한국 정부로 이관됐다. 귀속재산 규모만 해도 3,053억원으로 당시 한국 정부 1년치 예산에 5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건국 당시 헌법은 알려진 대로 굉장히 사회주의적이어서 중요한 산업은 '국영’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귀속재산을 과감하게 민간으로 불하(국가의 재산을 개인에게 매각)했다. 귀속재산의 규모가 매우 커서 정부가 운용할 수 없다는 판단뿐 아니라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육성을 종용한 미국의 등쌀도 작용했다. 귀속재산의 취득이 상당한 특혜였던 만큼 정경유착, 부패의 문제도 뒤따랐지만, 결과적으로 귀속재산의 민영화는 1950년대 대기업 성장의 계기가 됐다.
 
이 외에도 전쟁으로 파괴된 면방직 사업의 재건, 경제 개발의 토대를 닦은 비료공장·시멘트공장·제철소의 건설 등이 모두 이승만 시대의 일이다. 2차 산업에 대한 공격적 투자로 50년대 후반에는 이미 동남아 등 해외시장 개척도 시작했다.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은 이승만이 일군 공업화의 성과를 딛고 도약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완전히 새로운 국가의 탄생
 
이런 역사 위에 내가 인식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그 이전에 한반도에 세워졌던 국가들과는 단절된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에는 조선시대의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있고, 우리가 매일 쓰는 지폐와 동전에도 조선시대의 인물들인 이황과 신사임당 등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조선의 연장선인 어떤 국가가 아니라, 완전히 단절되고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대한민국 이전의 나라들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점 하나 남겨보지 못했던 국가들이었다. 이제는 세계사의 주요 흐름에 당당하게 들어갔다. 세계 초강대국들과도 동등한 관계를 맺고, 긴밀하게 협의한다. 위대한 지도자 덕분에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나는 항상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이 나라를 이렇게 잘 먹고 잘 살도록 만들어준 과거의 위대한 선구자들에게 감사한다. 여기까지가 나를 보수를 만든 역사 인식이다.
 
   
▲ 보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현실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기에, 이 나라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을 위협하는 북한의 존재에 대해서 엄격한 안보관을 키웠다./사진=미디어펜


III. 보수인 동시에 진보인 대한민국의 '진짜 보수'
 
한국의 정치를 공부하면서 너무 헷갈리고 이해가 안 됐다는 한 미국 이민 2세 친구가 생각난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생각되는데, 왜 박정희가 보수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런 혼란은 한국의 보수가 보수이자 진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한국의 보수는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 발전을 추구한다. 자유의 확대는 발전의 핵심적인 동력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호는 보수 정권이 키를 쥐었을 때 더 많이 발전했다. 오히려 진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현실 인식은 낡은 집단주의나 유토피아적 공동체주의에 갇혀 있다. 보수가 진보고, 진보가 보수인 이상한 나라다. 그래서 한국에서 '진짜 보수’의 의미는 각별하다.
 
게다가 한국은 이 모든 발전 역사를 위협하는 북한이라는 존재도 머리 위에 이고 있다. 북한은 2006년을 시작으로 지난해 9월까지 5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해왔다. 한미동맹을 위협하고 적화통일의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다. 2010년도에는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다. 대한민국 국민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빼앗아간 끔찍한 사건이었다. 북한은 '한민족’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주적이다.
 
보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현실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기에, 이 나라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을 위협하는 북한의 존재에 대해서 엄격한 안보관을 키웠다. 이런 국가 안보의식은 많은 젊은 보수가 '보수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안보 현실과 발전 역사를 생각하면, 한국에서 보수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가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보수는 나라를 지키는 세력인 동시에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특히 젊은 세대는 한국이 무너지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지킬 것이 많은 분들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은 젊은 세대가 더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 나라가 무너지면 젊은이들은 가장 먼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약을 팔고 다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을 올바로 알게 해주는 빨간약을 끊임없이 권할 것이다. 더 많은 젊은 세대가 빨간약을 먹고 정확한 현실 인식을 하고 대한민국 지키기 세력으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나는 기꺼이 약팔이가 되고 싶다. /이슬기 자유경제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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