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깨달은 이들의 절박함이 대한민국을 진보하게 해
   
▲ 황정민 자유경제원 연구원
진보진영은 진보적인가?

첫인상은 참으로 중요하다. 한번 형성된 첫인상은 그것을 뒤바꿀만한 충격적이거나 지속적인 사건이 있지 않는 한 강력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초두효과, 첫인상효과, 콘크리트효과 등으로 설명한다. 첫인상을 결정짓는 데에는 목소리, 생김새, 사용 어휘 등 다양한 요소가 있다. 그 중, ‘이름‘도 중요한 요소다. 아무리 세련된 외모의 소유자라도 이름이 김말년, 혹은 이갑돌이라면 아무래도 사랑에 빠지는 데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대한민국을 뒤흔든 이슈에서도 이름이 갖는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대통령 탄핵 사건을 촉발한 주요 인물이 대중에게 ‘최순실’로 각인 돼 있다. ‘최서원‘이라는 개명된 현대식(?) 이름이 있음에도 언론에서는 최순실이라는 촌스러운 호칭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했던 이들도 의도적으로 그녀의 개명 전 이름을 사용했다. 그 결과 대중의 머릿속엔 최순실만 남아있다. 호칭을 이용한 선동전략은 최서원을 ’무식하게 돈만 밝히는 옆집 아줌마‘로 이미지화 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좋은 첫인상을 주는 용어, 진보

호칭은 비단 사람의 첫인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집단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도 결정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가 대표적이다. 진보(進步)는 나아갈 진(進)에 걸음 보(步)라는 한자어를 사용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유의어로는 개화, 발전, 향상 등의 긍정적 느낌을 주는 단어 일색이다. 보수(保守)는 지킬 보(保)에 지킬 수(守)의 한자어로 구성돼 있다. 지키고, 또 지킨다는 것이다. 고수, 보전 등 수동적 느낌의 단어가 유의어로 묶인다. 

단어가 주는 초두효과만 놓고 보면 보수가 백전백패다. 특히 체제의 부정적 단면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우리는 학교에서 부의 양극화, 소득격차 등 자본주의의 그늘을 개선해야 한다고 배운다. 뉴스를 봐도 대한민국에서 금수저는 노력 안 해도 떵떵거리면서 사는가 하면, 실업률은 해가 갈수록 높아진다. 

고위관료와 대기업 총수의 부정부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1면을 장식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를 ’보수’하자고? 당연히 ‘진보‘해야지!“라며 ’진보‘라는 용어가 주는 긍정적 초두효과에 빠져버리기 십상이다. 진보라는 단어를 선점한 세력은 그 시작부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유리한 고지에서 시작하게 되는 셈이다.

   
▲ 대통령 탄핵 사건을 촉발한 주요 인물 최서원은 대중에게 최순실로 각인 돼 있다./사진=미디어펜


‘대한민국 정체성 부정’이 한국 진보의 본질

용어가 주는 강력한 초두효과로 인해 청년들은 대한민국 진보진영 주장의 본질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즉, 진보에 호감 가는 첫인상을 갖게 된 이상, 이들이 ‘어디로’ 진보하자는 것인지 이성적으로 따져 묻지 않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세력이 대중을 이끌고자 하는 목적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인 공산주의, 사회주의, 혹은 북한식 전체주의인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발자취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공산 좌익과 종북 좌익이 ‘진보’라는 용어 뒤에 숨어있는 것이 한국 진보의 본질인 것이다. 

한국 좌익의 특성은 이렇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시장경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대한민국이 탄생한 순간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지 않는 이유다. 누가 뭐래도 1948년 8월 15일 이전 한반도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거(1919년)와 공산주의와의 투쟁(1945년)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좌익은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한반도에 도입한 이승만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승만에서 박정희, 그리고 오늘날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지는 정권을 ‘독재파쇼’로 규정하고 인민재판을 해서라도 끌어내리려 한다. 이 과정에서 법치주의는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법 위의 ‘떼법‘과 폭력도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정당화되곤 한다. 시위현장에서 쉽사리 발견되는 쇠파이프, 대나무 죽창, 횃불, 단두대, 피 묻은 조형물 등이 그 증거다. 

대기업에 대해선 경제 번영의 주축이라는 긍정적 평가보단 ‘사회 악(惡)’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대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정경유착을 하는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성장했다고 매도하는 이유다. 그래서 정부권력에 의한 재벌개혁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또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자본주의의 효시인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이들은 반미(反美)의식이 강하고, 이러한 경향은 미군철수, 한미 FTA 반대, 사드배치 반대 등의 기조로 구체화된다. 반면 공산주의 체제의 중국이나 북한에게는 온정적 태도를 보인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정부에는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가도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과 북한 핵실험에는 침묵한다.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에 대해선 시위하자고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며 북한을 대변한다. 결국 이러한 주장들이 수렴하는 지점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혹은 북한식 전체주의다. 

진보를 가장한 좌익의 주장에 감염된 이들 

스스로를 진보세력이라고 여기는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세상은 결코 공산주의, 사회주의 혹은 전체주의가 아닐 것이다. 아마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는 건전한 국민들이 더 많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우리 체제의 부정적 측면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위와 같은 주장에 동조해 왔다면, 이게 정의고 진보며 대한민국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왔다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시대가 어느 땐데 간첩이 어디 있고, 공산주의와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어디 있냐는 말에 이끌렸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좌익의 선전선동에 지독하게 감염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렇다. 매력적인 첫인상에 가려진 한국 좌익의 실체를 모르고, 이성적으로 따져보지 않은 채 여기에 선동돼서는 결코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 진정한 진보는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오늘날 한국의 자칭 진보세력이 진보하고자 하는 방향은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퇴보에 가깝다.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겨우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을 다시 공산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로 돌려놓자는 반동이다./사진=연합뉴스

선전선동에 탁월한 좌익, 대중 의식화에 성공하다

수많은 이들이 왜 좌익의 주장에 매력을 느끼고 동조하게 됐을까. 좌익의 목소리는 감성적이다. 차별 없이 모두가 똑같이 잘 먹고 잘살자는데 누가 이를 대번에 싫다 할 수 있을까. 게다가 탁월한 선동력까지 갖췄다. 좋은 첫인상을 주는 용어 선점에 성공한 것처럼 좌익은 대중선동의 가치를 알고, 이에 능하다. 

인류의 절반이나 빨갛게 물들였던 그들의 전성기는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모순을 가리기 위한 뛰어난 선전선동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레닌은 선전선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스크라(Iskra)’라는 선동지를 발간했으며 라디오와 영화를 대중선동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한국 좌익도 마찬가지다. 과거 종북 좌익운동에 가담했던 이동호(미래한국 편집위원)는 아래와 같이 전언한다.

“선전선동은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을 의식화 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다. 공산주의 운동은 대중을 의식화하여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여, 종국적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에 최종 목적이 있다......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은 사회주의 나라 건설에 모든 목표가 맞추어져 있다.”

80년대 한국 대학가를 지배한 좌익운동권 사이 대표서적으로 알려진 강석진의 『대중선동론』에도 아래와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공산주의자들은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정치폭로, 정치선동이 갖는 중요성을 되새겨야 한다. 왜 남한민중들은 민중생존권투쟁에 대한 정권의 가혹한 탄압, 썩을 대로 썩어빠진 정경유착의 비리, 광주학살 등 잔인한 인권말살을 보면서도 공공연한 정권타도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가? 이는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신속하고 포괄적인 정치선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다.”

과거 주체사상과 공산주의를 신봉한 운동권 주장의 본질은 오늘날 한국 좌익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중의 입맛에 맞게 덜 공격적이고 좀 더 세련되게 변화했을 뿐이다. 이에 속고 있는 많은 청년들은 ‘인지부조화’를 경험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산물을 향유하면서도 입으로는 반(反)자본주의를 말한다. 

대기업의 일원이 되길 간절히 희망하면서 대기업을 해체하자는 주장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시장경제의 산물인 스타벅스 커피를 한 손에 든 채 시장경제는 오류투성이라고 설파한다. 자유를 달라면서 정부에 의한 경제적 자유 침해에는 무감하다. (모든 자유의 기초는 경제적 자유다. 부모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순간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순간인 것처럼 말이다.) 미국 NBA 중계는 챙겨보면서(북한 김정은도 그랬다.) 미국은 이 땅에서 떠나라는 외침에 박수 친다. 오랜 기간 대중을 의식화하려 했던 좌익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깨달은 이들의 절박함이 대한민국을 진보하게 해

오늘날 한국의 자칭 진보세력이 진보하고자 하는 방향은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퇴보’에 가깝다.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겨우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을 다시 공산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로 돌려놓자는 '반동‘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실체가 진보, 정의, 인권, 평화 등 온갖 달콤한 용어 뒤에 가려지게 됐다. 

한편, 좌익은 그들의 실체를 깨닫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반(反)민주, 수구, 꼴통, 틀딱, 일베충, 친일파, 냉혈한, 기업앞잡이 등의 모욕적 용어로 위축시킨다. (‘진보’와 대비해 ‘보수’라는 호칭도 좌익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선동당한 대다수의 좌경세력은 좌익의 목소리에 ‘양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이념 지형은 좌로 심각하게 기울어져버렸다. 20대 청년들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학계에서도, 문화계에서도, 교육계에서도, 정치계에서도 좌익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먹힌다. 이미 그렇게 형성된 기류가 더 많은 좌익 동조자를 생성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설인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말하는 이들이 수세에 몰리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이 오늘날의 현주소다. 

자유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이념의 ‘낙동강전선’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가 증명해낸 진리가 한순간에 거짓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니다. 한반도의 대다수가 공산주의를 원했을 때, 꿋꿋이 자유주의를 선택한 이승만이 지금의 번영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듯 소수의 깨달음과 절박함이 대한민국을 더 나은 방향으로 서서히 ‘진보‘케 할 것이라 믿는다. /황정민 자유경제원 연구원


(이 글은 지난 6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생각의 틀 깨기-청년 편’ 2차 세미나 『진짜 진보를 보여줄게 - 청년이 이야기하는 진보와 보수』에서 황정민 자유경제원 연구원이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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