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주·기업이 공짜로 불로소득 가져간다? 평등한 시장 외면하는 '무지'
시장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경제학과 관련된 도서를 몇 권만 읽어봐도 시장의 매력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능력만 된다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아이디어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투자를 함으로써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시장의 속성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직도 시장이 어떤 곳이고, 어떤 가치를 갖는지 모르거나 오해하여 시장의 역할을 매도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신이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고, 심지어 시장을 비난하는 글을 쓰는 종이와 펜,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스 프로그램까지 모두 다 시장의 참여자들이 시장원리에 따라 사익을 추구하면서 형성되었음을 부정한다. 
 
지난 2월 12일에 한겨레신문에 올라온 박정훈 알바노조 위원장의 글은 시장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를 하나로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다. 그는 글의 첫마디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합당한 반론을 그저 '논란’으로 치부하며 “15살 이상 인구 4341만 명 중 비경제활동 인구는 1616만 명, 실업자는 101만2000명으로 무려 1718만1000명이 백수다. 10명 중 4명은 논다. 그럼에도 세상이 안 망하고 백수가 굶어 죽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는 표현으로 비꼰다.

<칼럼개요>
● 매체 : 한겨레신문
● 칼럼명 : [2030 잠금해제] 1700만 백수의 가치 
● 필자 : 박정훈 알바노조위원장
● 등록일자 : 2017년 02월 12일

하지만 실질적으로 비경제활동 인구의 구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 사람의 빈정거림이 통계적 자료나 사회분석에 입각한 것이 아닌 본인의 망상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계청의 비경제활동 인구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보면 박정훈 씨의 빈정거림은 의도적으로 많은 것들을 배제하거나, 선동을 위해 조작한 측면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를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 표는 통계청에서 매월 발표하는 연령별 비경제 활동 인구에 대한 도표다.
 
   
▲ 연령별 비경제 활동 인구./사진=통계청 제공

 
위 도표에 따르면 연령별 비 경제활동 인구에서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은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다수를 점한다. 정년을 마치고 퇴임한 사람이나 고등학교를 이제 갓 졸업한 사람을 동일한 선상에 올려놓고 “대한민국의 4분의1이 백수인데 세상이 안 망하고 있으니 신기한 노릇” 이라고 논평하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다. 또한 15세~19세 인구의 비중이 200만을 육박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군 복무를 하는 사람들, 혹은 질병,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인원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통계자료이다. 이것을 가지고 인구의 4분의 1이 백수라고 말하는 것은 통계자료에 대한 의도적 왜곡이다. 실제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인원의 범위가 아닌 통계자료의 전체를 제대로 분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구의 4분의 1이 백수”라는 논지를 형성하여 선동하는 모양새다. 
 
글을 더 읽다보면 읽을수록 가관인 내용들이 차고 넘친다. “취준생들은 학점, 토익 등 좋은 인재가 되기 위해 자기 돈 주고 밤낮없이 공부하지만, 기업과 국가는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의 노동력을 공짜로 가진다. 되레 학원비, 응시료, 등록금, 빚 등으로 돈을 빼간다.”는 주장은 실제 한국의 경제 환경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상태에서 망상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실제로 한국노동연구원의 2017년 2월 <노동리뷰>에 따르면 2016년 구직인구들의 71.8%는 사무직, 서비스업, 연구, 개발 등 속칭 '화이트칼라’ 노동을 선호하는 반면, 기업체에서는 대체로 기능, 제조, 생산, 플랜트 등 속칭 '블루칼라’ 노동자를 선호하는 상황이다. 송민수, 정재우 <주요 노동동향>,《월간 노동리뷰 2월호》 , 2016. 2. 서울, 한국노동연구원 

구직자와 기업체가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른데 취업이 매끄럽게 될 리도 없을뿐더러 이러한 미스매치 상황에서 원하는 직종을 얻기 위해서 경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시장원리다. 이것을 기업체가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이는 과도한 억지 논리일뿐더러 실제 시장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트럼프의 트위트를 리트위트하는 '트잉여’들은 미디어를 만들고, 오늘 당신이 페이스북에 올린 포스팅은 저커버그의 수익에 기여한다. 알파고가 학습한 기보는 승부에서 패배한 수많은 기사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기록인데, 구글이 그냥 가져간다. 인류는 알파고를 보며 구글의 위대함이 아니라 패배자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논지도 시장원리에 대한 몰이해다. 이런 것에 불편해하기 전에 왜 당신들은 그러한 구조를 만들 노력을 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저커버그나 구글이 이런 이익을 얻은 배경에는 이러한 지식을 사용하는 구조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과 투자가 있고, 이러한 아이디어를 위해 많은 시도와 도전이 있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기업가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착취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는 논리만 남아 있으니 세상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 민주주의와 평등을 방패삼아 북한을 찬양하고,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놀고먹는 사람이 맞다./사진=연합뉴스
 
글쓴이의 '복지’에 대한 생각도 문제가 있다. “세상이 도움을 주고 싶을 만큼 열심히 불쌍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게 '복지’다.” 라며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을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한국엔 가난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공시생이 매일 커피 사들고 공부하는 게 사치로 비난받는 세상이 됐다.”라고 이야기 한다. 다른 이면을 한번 살펴보자. 본 필자도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들을 본 바 있다. 스타벅스 커피를 손에 들고, 고시원 비용을 내면서 공부만 하는 삶은 비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노량진과 신림의 밤은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시끄럽다. '스터디 그룹’이 '술터디 그룹’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는가? 과연 그게 '사치’가 아닐까? 또한 경쟁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다 보니 복지의 대상이 “경쟁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을 돕는 일”이라고 보는 '선택적 복지’의 시각자체를 없는 시각으로 규정해 버리는 태도를 보인다. 과연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때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진짜 놀고먹는 사람은 따로 있다. 불로소득을 가져가는 투기꾼, 공동체가 만든 가치를 공짜로 가져가는 대기업이다. 건물주의 집값은 누군가가 10년 동안 모은 돈이고, 주주의 배당금은 노동자와 실업자에게 돌아갔어야 할 임금이며, 백수들의 노동은 사회가 지불하지 않은 체불임금이다. 이제 떼인 돈을 돌려받자.”는 저자의 결론을 보며 나또한 다른 결론을 내 보았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평등을 방패삼아 북한을 찬양하고,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놀고먹는 사람이 맞다. 기업이 공짜로 가져가서 놀고먹는다는 눈을 가진 사람은 시장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기를 권한다. 모든 문명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제발 시장에 대해 눈을 떠라, 시장은 충분히 평등하다, 당신이 시장을 모르기 때문에 그 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제발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김동현 경제진화연구회 회원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언론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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