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권력 영역 최대한 줄이고 개인의 자유와 책임·헌정 질서 엄정해야
   
▲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내가 하면 정의, 남이 하면 부정?
 
우리는 유난히 '공정’과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 사람들은, 대통령을 탄핵까지 몰고 간 최근의 사건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공정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적인 사례라고 믿는다.

'수저 계급론’이나 '헬 조선’과 같은 말들은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을까? 우리 사회가 과거와 비교하여 더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가 아니면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그런가?
 
그러면 도대체 공정이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과 정의에 대해 다양한 철학적 논의가 존재하고, 공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여기서는 공정은 절차와 관계된 것으로, 정의는 샌델이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과 같은 것들의 분배와 관련된 것’으로 제한하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의를 논의할 때도 공정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의에는 '소중히 여기는 것’을 분배하는 절차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철학적 개념이다. 최근 한 일간지에도 '공정’을 문제 삼는 글이 실렸다. 하나는 광고문에 실린 것으로,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 정부의 이중 잣대에 국민들이 분노한다!”는 큰 제목 아래 “정부에 묻는다! 공정한 정책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소제목이 나온다.

이 광고를 낸 단체들은 오색케이블카 사업을 부결시킨 문화재청의 결정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환경부는 사업을 승인했는데, 같은 정부 기관인 문화재청이 부결시킨 것은 국민의 혼란을 가중하고, 정부 불신을 초래하는 불공정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정성은 '일관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이 광고는 문화재정이 오색케이블카 사업에 반대하는 단체의 억지 주장에 편승하여 이 사업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담고 있다.

양쪽 말을 모두 들어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한쪽의 주장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재청의 입장을 듣지 않고, 이 광고를 낸 단체들의 주장에 따라 오색케이블카를 허가하지 않은 결정을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는 것 또한 '불공정한’ 판단이 될 것이다.
 
같은 날 신문에는 “이정미 대행 첫날 일성은 '절차 공정성’”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렸다. 대통령 탄핵 심판 10차 공개 변론이 열린 헌법재판소에서 오갔던 말에 대한 기사이다. 헌재 소장의 퇴임으로 소장대행을 맡게 된 이정미 재판관이 “탄핵심판 사건의 국가적·헌정사적 중대성과 국민 전체에 미치는 중요성은 모두 인식하고 있다.”며 “심판 과정에서의 절차적 공정성과 엄격성이 담보되어야만 심판결과의 정당성도 확보될 것”이라고 했다.
 
이 소장대행의 모두(冒頭) 발언이 끝나자마자 대통령 측의 변호사는 “전임 박한철 소장은 '3월 13일 이전에 탄핵 심판 선고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선고 기일을 미리 정한다는 것은 이 사건 심판결과의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우려가 있다.”며 “헌재가 심리 절차의 신속을 강조한 나머지 공정함을 잃어버린다면 이번 탄핵 심판 사건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뿐 아니라 세계 사법 역사상 비웃음을 사게 될까 두렵다.”고 했다. 나아가 이 변호사는 “청구인 (국회) 측에는 예리한 일본도(刀)를 주고, 피청구인에겐 둔한 부엌칼을 주면서 공정한 진검 승부를 하라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통령 탄핵 심판을 두고, 심판 주체인 헌법재판소는 '절차의 공정성’을 말하고, 변호인 측은 '결과의 공정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공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결과의 공정성’이 아니라 '결과의 합당성’ 또는 '정당성’, '타당성’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공정한 판결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헌정 질서가 엄정하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사진=미디어펜

 
위의 두 사례에서 사용된 '공정’은 정부의 판단과 관련된 것으로, '공정’은 정부의 의사 결정 과정이 어떤가를 묻는 것이다. 분쟁 중이거나 대립관계에 있는 양자의 입장을 정부나 정부의 대표 기관이 조정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않거나, 양 편의 말을 모두 경청하여 반영하지 않거나,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게 하지 않거나, 한쪽 편을 들 때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공정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공정한가? 공정하지 않은가는 무엇을 공정성의 기준으로 설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물론 불공정은 국내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미자유협정(NAFTA)나 한미 FTA가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무역협정의 F에는 free뿐만 아니라 fair의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자유무역이 아니라 공정한 자유무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멕시코나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가 높기 때문에 균형을 이루어야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점이다.

자유무역은 쌍방 모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성립하고 있다는 통념을 깨고 트럼프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잡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동안 서로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했던 자유무역을 왜 트럼프는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공정성의 기준이 사전에 정해져 있고, 양자가 이 기준에 동의하고, 그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여 판단하였다면, 그것은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준이 엄격히 적용되었는가에 대해서 한 쪽이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결과의 정당성은 의심을 받는다.

공정한 사회가 되려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절차가 공정했다면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절차가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이 널리 퍼져 있는 이유는 결과를 받아들이려는 승복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최근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소득과 부의 격차가 확대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실제 소득이 증가하지 않았거나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했거나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정의’는 법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소득과 부의 분배와 관련하여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소득과 부의 격차가 큰 사회를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부나 소득의 총량의 증가보다 분배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정의롭지 않다고 느낀다. 뿐만 아니라 정의롭다는 판단을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경향도 있다. 우리가 과거보다 더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다거나,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더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이런 판단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부와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된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더 정의로운 사회일까? 북한이 우리보다 부와 소득이 더 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고 한다면, 북한이 우리보다 더 정의로운 사회일까? 우리 사회에서 과거보다 지금이 부와 소득이 더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면, 지금이 과거보다 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까?
 
그렇지 않다. 부와 소득이 더 평등하게 분배되었다고 더 정의로운 사회는 아니다. 모든 정의론이 평등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샌델이 잘 정리하였듯이 무엇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동일한 상황이 정의로울 수도 있고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공리주의, 자유를 기준으로 삼는 자유주의, 미덕을 기준으로 삼는 공동체주의는 소득과 부의 분배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할 때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동일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입장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의 판단이 갈린다.
 
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가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와 소득의 격차가 확대되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가 더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평등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입장에서 정의를 판단하는 것이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통해 이 격차를 줄이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평등을 교정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믿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많은 사회에서는 부와 소득의 평등한 분배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지선주의자들은 소득 재분배를 위해 정부가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것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사회가 어떤 기준을 정의의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는 철학의 문제가 아니고 정치의 문제다. 정의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이론 가운데 어느 이론을 국가 정책에 반영할 것인가는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곧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 부와 소득의 평등한 분배를 정의라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많으면 그런 정책을 내놓은 정당이나 정치가가 국민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지선주의는 평등주의 정책의 시행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요약하면 정의는 정의론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정의론을 지지하는가에 상관없이 어떤 상황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권을 보장하지 않거나, 자유를 억압하거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거나,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권과 자유의 보장은 부·소득의 분배보다 우선하는 정의의 조건이다. 인권이나 기본적 자유는 정의로운 사회가 갖추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이다. 이런 정의의 조건은 공리주의자나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냐에 관계없이 모두 받아들인다.

   
▲ 누구나 공정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공정한 판결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사진=미디어펜
 
'객관적 사실’과 '심리적 사실’ 혼동하지 말아야
 
공정이나 정의에 대한 논의는 철학적으로 복잡하다. 또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은 대체로 사람들의 주관적인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거나 “우리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와 같은 표현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심리적 사실’과 '객관적 사실’은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기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불공정한 것’과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명백하게 구별된다. 공정성에 대한 기준을 높이 잡으면 높이 잡을수록 불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은 많아진다.
 
어느 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의 정도’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공정’과 '정의’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강조는 사회 구성원 사이의 불신만 가중시켜 사회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정’과 '정의’와 같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보다는 매년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고 있는 부패인식지수(CPI)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부패인식지수는 한 국가의 '공공부분 및 정치부분에 존재하는 부패의 정도’를 측정한 것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부패’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적 지위를 남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인식지수는 정부부분의 뇌물이나 부패의 존재여부, 공적 자금 유용, 계약에서 뇌물 제공 관행, 공적 지위를 남용한 공직자의 처벌 정도, 정부의 부패 예방의 효과성, 공직자의 사익목적 지위 남용 예방 정도, 정치  시스템 내부의 부패 수준, 행정부·사법부·경찰·군인·입법부 공직자의 사적 이익을 위한 공적 지위 악용과 남용에 대한 정도가 포함되어 있다.
 
2017년 1월 30일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한 2016 부패인식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29위를 했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는 100점 만점에 53점이다. 53점은 '절대부패에서 벗어난 정도’이다. 70점 이상을 받은 국가들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투명한 상태’라는 평가를 받았다.

공동 1위를 차지한 나라는 덴마크와 뉴질랜드로 90점을 받았다. 상위권에 속하는 나라일수록 1인당 국민 소득이 높다. 부패는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부패는 정부의 핵심 기능을 마비시키고 세금 납부자들의 납세 동기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헌정 질서가 엄정하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제시되는 많은 현실적 증거들은 사실 공정과 정의 이전의 부정부패의 문제다.

정부의 고위공직자나 정치인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하고,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를 행한다면 이것은 '불공정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다’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범법(犯法) 행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권력의 사사화(私事化)를 엄단하고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부분’과 권력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중섭]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