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정신의 정수…"이봐 해봤어?"·"어렵지만 됩니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어록으로 보는 ‘백발 청년’ 정주영

청춘 - 새뮤얼 울먼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과 격정,
그리고 생명의 깊은 원천에서 솟아나는 생동감을 뜻하나니

청춘이란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
안락함의 유혹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니

세월은 주름을 피부에 새기지만
열정을 잃으면 주름이 영혼에 새겨지니
마음이 시들고, 영혼이 먼지로 흩어지리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회장은 한 평생 청춘을 살다 가셨구나.’ 정주영 회장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장 강하게 드는 생각이다. 만약 나라면, ‘이만하면 됐다.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도전을 그만뒀을 순간이 그의 인생에는 숱하게 많았다. 

그리도 탈출하고 싶었던 강원도 산골에서 벗어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 막노동 현장을 뒤로 하고 쌀 배달원이 되었을 때, 특유의 근면성실함으로 쌀가게를 인수했을 때, 쌀가게에서 번 돈으로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인수했을 때(1940년), 다시 그 돈으로 ‘현대 토건’을 세워(1947년) 큰돈을 벌었을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마쳤을 때(1970년), 자동차 독자 개발에 성공했을 때.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사전에는 ‘멈춤’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듯하다. 그는 이 모든 성공의 순간을 발판으로 삼아 끝없이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정주영 회장의 이런 끝없는 도전정신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불멸의 어록에 함축돼 있다. 정주영 회장은 이 외에도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의 어록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됐는지 쭉 따라가다 보면 그의 끝없는 도전의 여정을 엿볼 수 있다. 

   
▲ 건설, 자동차, 조선, 이후 상선 회사 설립까지. 현대그룹의 기업사는 일일이 설명하기 벅찰 정도로 끝없는 도전이었다./사진=연합뉴스


물 속이 참 시원하군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어록은 정주영 회장의 담대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대사다. 울산 현대 조선소를 만들 때 일이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밤낮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통행금지 시간에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고속도로는 통행금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새벽 3시 폭우로 앞이 잘 보이지 않던 때, 별안간 앞을 막아선 바위덩어리 떨어진 때문에 차가 수심 12미터의 바다로 빠져버린 것이다. ‘

11월의 추운 날씨였지만, 정주영 회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차에 물이 어느 정도 찰 때까지 기다렸다 자동차 창문을 깨고 탈출에 성공했다. 마침 정주영 회장을 발견한 현장 경비원에게 밧줄을 요청했고, 그는 밧줄을 몸에 묶고 겨우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또 밧줄을 갖고 오라는 정주영 회장의 외침에 밧줄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은 경비원에게 화를 낼 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은 몰려온 임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물 속이 참 시원하군.”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도 재치를 잃지 않는 강인함, 그의 이런 성격은 계속된 그의 도전 과정 그리고 성공의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어렵지만…됩니다. 됩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런 그만의 자산을 토대로 ‘불가능에의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남들이 ‘그게 성공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는 일에 도전해 성공했다. 불가능에 도전했던 유명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경부고속도도로 건설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을 위해 독일을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시속 160km로 달려본 뒤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 건설에 나선 것이다. 

아마 우리 세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겠지만, 경부고속도로를 처음 건설할 때만 해도 고속도로 건설은 국민들과 정치권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어 예상낭비가 뻔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돈도 없는 나라에서 무슨 고속도로냐” “나라에 차도 몇 대 없는데 무슨 고속도로냐” “그런 데 쓸 돈이 있으면 농사 못 짓는 시골에 비료공장이나 짓지 무슨 고속도로를 만드냐”는 말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거센 반대 속에서 고속도로 건설에 착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정주영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말했다. “어렵지만...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정주영에게 고속도로의 건설을 맡겼다. 겨우 100km도 안 되는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었지만, 정주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건설 과정에서 당재터널 붕괴 등의 인명사고도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건설 현장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며 현장을 이끌었다. 24시간 현장에서 지휘하고, 자동차에서 잠깐씩 잠을 청하며 여느 현장 근로자보다 열심히 일했다.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많은 인부들이 피와 땀을 흘린 결과, 1970년 7월 그렇게 경부 고속도로(427km)가 완성된 것이다. 총 예산 429억 7300만원이 들었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최단 시일 완공, 최저 예산이란 기록까지 세웠다. 

   
▲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의 사전에는 멈춤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그는 모든 성공의 순간을 발판으로 삼아 끝없이 더 큰 목표를 세웠다./사진=미디어펜

실패하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웬만한 사람을 숨이 턱턱 차는 그의 이야기.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거침없이 다음 도전을 향해 나아갔다. 국가의 ‘대동맥’에 해당하는 고속도로가 생겼으니, 이제 그 위를 달릴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주영은 나라를 인체에 비유했다. 고속도로는 혈관, 자동차는 혈관을 도는 피였다. 

시작은 자동차 ‘조립’이었다. 1970년대 초, 미국 포드 자동차와 자동차 조립 계약을 체결해 포드의 ‘코티나’를 생산했다. 포드는 조립까지 3년을 예상했으나 현대자동차는 1년 만에 코티나 조립을 해냈다. 정 회장은 역시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더 이상 포드의 하청 업체 역할에 머물 수 없다’며 자동차 독자 개발에 나선 것이다.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도 자동차 독자 개발엔 감히 나서지 못하는 때였다. 이때도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이들이 여럿 나왔었다. 

실제로 자동차 자체 개발의 성공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자동차를 잘 만들면, 그 자동차는 돌아다니는 국기입니다. 내가 건설에서 본 돈을 다 들이고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후대들이 자동차 공업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디딤돌을 내가 몇 개 놓을 수 있다면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실패하더라도 후회가 없을 거라던 정주영 회장. 그의 자동차 개발 도전은, 물론 성공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설사 실패했더라도 도전 그자체로 멋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물론 그는 결국 성공했다. 포드와 결별한 이후 이탈리아와 손을 잡았다. 기술을 익히는 방식은, 지금 돌아보면 그야말로 단순 무식이었다. 기술센터 직원들이 말도 안 통하는 이탈리아로 달려가 미친 듯이 베끼며 그림을 그려왔다. 디자인은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였던 조제토 쥬지아로가 맡았다. 

결국 현대 자동차의 ‘포니’는 1974년에 탄생했다. 포니는 작지만 강한 조랑말이라는 뜻이다.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겠다’며 달려든 정주영 회장 덕분에,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2번째로 독자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당시 한국에는 포니 덕분에 ‘마이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고 한다.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선진국 따라잡나?

정주영 회장은 한국이 경공업 중심의 경제에서 중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발전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산업에의 도전 과정은 출발부터가 극적이었다. 현대가 땅 위의 건물을 잘 지으니, 물 위에 건물을 짓는 것처럼 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소형선은 일본, 대형선은 미국이나 노르웨이 등에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조선 산업을 위해서는 우선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배를 지어본 경험은커녕 배를 만들 조선소도 없는 상태의 회사에 돈을 내어줄 은행은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투자를 받기 위해 조선소를 짓겠다는 백사장 사진 그리고 유조선 도면을 들고 유럽으로 떠났다. 단지 배를 몇 척 팔아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다.  

영국의 은행 바클레이즈에서 거절을 당한 후 정주영 회장은 바클레이즈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만한 인물을 찾아갔다.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이었다. 그의 추천서를 받으면 바클레이즈의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전략이었다. 롱바텀 회장의 반응은 역시나 시원치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때 그가 꺼내들었다는 게 바로 500원짜리 지폐였다. 정주영은 500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한국은 역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우리 민족의 역량을 믿어달라”며 롱바텀을 설득했다. 놀라운 재치다. 정주영은 결국 그를 설득했다. 

롱바텀 회장의 추천서를 받고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또 다시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났다.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이 선박 주문서를 받아와야 차관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아직 조선소도 없는 회사가 선박 발주를 받아야 한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 어려운 일을 또 해냈다.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에게서 26만톤의 배 두 척을 주문받은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 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다 돌려준다는 파격적인 두 가지 조건을 걸어 리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였다. 

드디어 1972년 3월, 울산 백사장에 현대울산 조선소가 세워졌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배를 건조해본 경험도 없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세계 최대 선주인 리바노스가 선박을 발주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배도 아니고 마침내 당시 최대 규모의 선박이었다.저 배가 과연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모였다.

발주 기한은 빠듯했다. 정주영 회장은 배를 제 때 만들어 넘기기 위해 묘안을 냈다. 조선소를 짓는 동시에 조선소 밖에서 선박을 건조해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선박을 건조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있도록 하는 독(dock)도 없는 상황에서 선박 건조는 시작됐다. 양쪽으로 독이 커 나가면서 배의 크기도 따라 커졌다. 

정주영 회장은 도크를 만들면서 26만톤급의 유조선을 건조하고, 바다를 준설하고, 14만평의 공장을 세우는 일을 한꺼번에 진행했다. 그렇게 1974년 6월, 현대조선중공업 준공식이 열리고, 대한민국 1호 선박(애틀란틱 배런)이 탄생했다. 매일 2200여명이 인력이 밤낮없이 매달려서 겨우겨우 해 낸 일이었다.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선진국 따라잡나?’는 정주영 회장의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10년 뒤인 1983년에 건조량 기준 세계 조선업 1위에 올랐다. 

   
▲ 현대 자동차 포니는 1974년에 탄생했다. 포니는 작지만 강한 조랑말이라는 뜻이다. 정주영 회장은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겠다'며 달려들었고 성공했다./사진=아산정주영닷컴 제공

해 보기나 했어

건설, 자동차, 조선, 이후 상선 회사 설립까지. 일일이 설명하기 벅찰 정도로 그야말로 끝없는 도전이었다. 매번 도전을 할 때마다 잃을 것이 많은 상황에서도, 정주영 회장은 모든 것을 걸고 도전했다. 남들이 실패를 단언할 때에도 “해 보기나 했어”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 소개한 시적 표현 그대로, 정주영 회장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와 안락함의 유혹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가진 청년 그 자체였다. 

이봐, 해봤어?

“어려운 길은 길이 아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 않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 

하지만 요즘 진짜 청춘이어야 할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위와 같은 어록이 유행이다. 정주영의 어록과는 너무나도 대조된다. 이런 어록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이 시대 한국의 청년들은 과연 ‘청춘’이 맞긴 한 건지 서글픈 기분이 든다. 정주영 회장이 요즘 유행하는 이런 어록을 보면 뭐라고 할까. 그 옛날처럼,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이봐! 해봤어?”라고 혼쭐을 내진 않을까. 

‘위인’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정주영을 따라할 수도 없고, 정주영처럼 한다고 정주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평생 ‘청춘’을 살다간 정주영의 정신만은 여전히 배울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고, 고생 끝에 성공하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기회를 얻는다는 ‘땀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일단 해 보기나 하다보면, 어려운 일도 가끔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이슬기 자유경제원 객원연구원

(이 글은 20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정주영 서거16주기 세미나-청년이 본 기업가, 정주영’에서 이슬기 자유경제원 객원연구원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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