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명이 사망한 테러의 도시 1년 2개월만에 상흔 치유…국가에 대한 신뢰가 답
   
▲ 이석원 언론인
유럽의 수도라고도 일컬어지는 벨기에 브뤼셀 중심에서 북동쪽으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브뤼셀 국제공항. 규모는 유럽의 다른 공항들에 비해 그리 크지 않지만 끊임없이 열리는 국제회의와 또 유럽 배낭여행족들로 인해 적잖게 붐비는 곳이다. 특히 우리 인천공항 등과는 달리 시내 중심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탓에 거주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2016년 3월 20일 오전 8시. 자벤템(Zaventem) 지역에 있는 이 국제공항 출국장에서 정체모를 굉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메리칸 에어라인 발권 창구에서 두 번째 폭발음이 들린다. 

주위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정체모를 굉음에 사방으로 뛴다. 이미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뿌연 연기에 사위를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유럽의 수도 브뤼셀의 국제공항은 전쟁터가 돼 버린다. 14명이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한 시간 쯤 지난 9시 20분 경, 이번에는 브뤼셀의 한복판 중앙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말베이크(Maalbeek) 메트로 역에서 세 번째 폭발이 일어난다. 브뤼셀 관광의 핵심인 그랑 플라스(Grand Place)에서 중앙역을 거쳐 브뤼셀 공원까지 걸어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이곳은 브뤼셀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한 번쯤은 들리는 곳. 이곳에서의 폭발로 20명이 숨졌다.

브뤼셀 시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얼마 전 파리 테러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IS의 소프트 타킷 테러가 바로 자신들에게서 벌어진 것이다. 유럽에서도 가장 관용의 힘이 강하고, 백인이나 유럽인이 아닌 다른 인종과 민족에 대해 편견이 없기로 유명한 그들에게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이 발생한 것을 그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하고도 2개월이 지난 브뤼셀에는 그 당시의 참혹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도시는 지난 수세기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로 들끓는다. 

   
▲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랜드마크인 시청사 건물. /사진=이석원

시민들은 바쁘게 자신의 일상 속에서 생활하고, 1년 전 그 테러로 인해 타민족이나 타국가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나 편견의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다. 브뤼셀 시민이든 브뤼셀에 들린 사람이든 구분 없이 그들은 함께 그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다.

브뤼셀은 이미 여름에 다다르고 있다. 한낮 최고 기온은 섭씨 28도까지 오르고, 브뤼셀의 심장과도 같은 그랑 플라스에 모인 젊은이들은 비치 패션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과감한 노출 의상으로 멋을 내고 있다. 

밤 10시가 돼야 겨우 어둑어둑 해지는 백야의 기운은 젊은이들 뿐 아니라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도 쉽게 귀가하거나 잠들지 못하게 해 그랑 플라스의 노천카페에는 나이와 국적,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손님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지난 해 브뤼셀 테러를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수많은 나라와 민족의 구성원들이 한데 어우러져 뒤섞인 그랑 플라스에 어지간해서 경찰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아주 드물게 보이는 경찰의 주 업무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술 취한 젊은이들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너희 나라 아직까지도 테러 비상 단계 아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테러를 대비한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시 물으면 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넌 여기서 지금 테러의 기운을 느낄 수 있나?"고 되묻는다.

   
▲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그랑 플라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아예 광장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앉거나 눕기 시작한다. 이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기다리는 것은 그랑 플라스의 야경이다. /사진=이석원

브뤼셀은 지난 해 테러 때부터 지금까지 국가위협경보가 3단계다. 총 4단계 중 '공격이 임박한 단계'인 4단계의 바로 아래인 3단계는 '공격 가능성이 있는 단계'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진돗개 2'나 '데프콘 3' 쯤으로 보인다. 

무려 34명이 사망자가 난 폭탄 테러 이후에도 국가위협경보가 4단계가 아닌 3단계인 것도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3단계라고 할지라도 도대체 브뤼셀의 분위기는 그런 위기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브뤼셀에서는 오는 25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열리고, 이 때문에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방문한다. IS가 됐든 다른 테러 조직 누가 됐든 제대로 된 테러의 기운이 충분히 감지될 수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벨기에의 국가위협경보 상태가 4단계가 아닌 3단계라는 점 때문에 트럼프 측에서 벨기에 정부에 우려를 표하기까지 했다는데도 벨기에 정부는 "국가안보 위협에 대한 평가를 한 결과 현재로써는 국가위협 경보 수준을 상향 조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의 분위기는 그대로 브뤼셀의 젊은이들에게서 읽힌다. 그랑 플라스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만난 안나(24세 대학생. 브뤼셀 거주)는 "지난 해 테러는 잘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벨기에가 또 다시 테러의 위협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또 다른 대학생인 기욤 프랑드르(22세. 벨기에 거주)도 "테러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가 우리를 지킬 것이다. 늘 불안해서는 살 수 없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 브뤼셀 그랑플라스의 야경. /사진=이석원

미국의 여행객인 마크와 셀리 커플은 "처음에는 지난 해 브뤼셀 테러 때문에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브뤼셀 여행을 재고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와서 3주째 지나면서 브뤼셀의 전반적인 분위기 탓에 불안감은 씻은 듯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오히려 트럼프의 벨기에 방문이 더 불안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저녁 10시가 넘어선 그랑 플라스는 오히려 한낮보다 더 번화하다. 아예 광장 한복판에 자리 잡고 앉거나 누운 사람들은 맥주나 와인 한 병 씩을 들고 이대로 밤을 샐 작정으로 보인다. 마치 1986년 서울 대학로의 주말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그러다가 10시가 돼서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브뤼셀 시청 건물과 시립 박물관, 그리고 17세기 길드들이 세운 금박의 화려한 건물들에 일제히 조명이 들어오자 광장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어쩌다 보이는 그들 사이의 경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낯빛에는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도 없다. 그저 오늘 이 밤 이 곳에서의 열정에 대한 뜨거운 기대감만이 비쳐진다.

이들이 너무 무사태평한 것일까? 또는 '오늘만 산다'는 지나친 현세주의적 낙관일까? 지난 4월에도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스웨덴 스톡홀름에도 테러가 있었고, 또 지척에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도 테러가 있었는데, 이들은 왜 이토록 여유롭게 행복한 것일까? 

광장에서 만난 그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한 뚜렷한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의 브뤼셀은 여름으로 달리는 밤,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이석원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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