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④] 우산국 정복...동해 內海化 완성

목우사자로 우해왕 겁박

1) 우해왕

   
▲ 김인영 언론인
울릉도에는 동해 한가운데서 바닷길의 험함을 믿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는 신라를 우습게 여긴 우산국의 마지막 우해왕과 그 섬의 정복자 이사부에 관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은 사실에 가깝게 묘사돼 전설이라기보다 역사 재료로도 가치가 있다.

지금의 울릉도를 옛날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시절은 우해왕(于海王)이 다스릴 때라고 한다. 우해왕은 신체가 건강하고 기운도 장사여서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바다에서는 힘이 세었다.

우해왕은 우산국에 와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해 그들의 본거지인 대마도에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갔다. 대마도의 왕은 우해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하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대마도를 떠나려고 하니 대마도의 왕은 자신의 세 딸 중에서 인물도 마음씨도 뛰어난 셋째 딸 풍미녀(豊美女)가 우해왕을 따라가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만약 왕이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굶어 죽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해왕은 할 수 없이 풍미녀를 데리고 우산국으로 돌아왔다. 풍미녀의 용모와 마음가짐이 단정하여 왕후로 삼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 우해왕은 풍미녀를 왕후로 삼기로 했다. 우산국의 백성들은 우해왕과 풍미녀를 온 힘을 다해 받들었다. 그러나 풍미녀가 왕후가 된 후부터 우해왕의 마음이 전과는 달라지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왕은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기를 자기 일 같이 했는데, 지금은 사치를 좋아했다. 그리고 풍미녀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려고 했다.

우산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보물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우해왕은 신라까지 신하를 보내어 노략질을 해 오도록 했다. 신하 중에서는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거나 바다에 처넣었다. 백성들은 우해왕을 겁내게 되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빠지게 됐다.

신라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있다고 보고를 했으나 우해왕은 도리어 그 신하를 바다에 처넣었다. 이 광경을 본 신하는 될 수 있으면 왕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결국 풍미녀가 왕후가 된지 몇 해 뒤에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 <울릉문화원>

이 설화에 따르면 우산국의 우해왕은 대마도를 쳐들어가 대마도왕의 딸 풍미녀를 데려와 부인으로 삼는다. 이른바 결혼동맹이다.

설화는 풍미녀의 사치에 빠져 우해왕이 신라를 노략질해 이사부의 공격을 자초했다고 전개한다.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여자에 빠져서 그랬을까.

바다를 육지처럼 주름잡던 우해왕으로선 오랫동안 신라를 노략질한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복속시킨후, 동해 바다에선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이 없다고 우쭐하게 됐을 것이다. 우해왕은 신라 변방에 배치받은 이사부쯤은 상대라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 원 내가 독도. /사진=울릉군청 웹페이지


울릉도에는 이외에도 이사부와 연결되는 전설로 사자바위와 투구봉 전설이 남아있다. 우산국의 최후를 전해주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사부의 목우사자(木偶師子)에 놀란 우해왕은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사부가 제시한 항복조건은 우해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우산국은 신라의 속국으로서 해마다 공물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우해는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부디 데려오신 짐승을 남겨두어 내가 죽더라도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사부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

우해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전설은 남아 있다. 우해가 죽을때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신라군이 가져온 나무사자가 지금의 사자바위가 되고, 우해가 벗어던진 투구는 지금의 투구봉이 됐다고 한다.

울릉도에는 우해왕에 대해 또다른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풍미녀가 죽자 우해왕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뒷산에 병풍을 치고 백 일 동안 제사를 지냈다. 또 왕비를 모시던 열두 명의 시녀에게 매일 비파를 뜯게 했다. '비파산과 학포 이야기'를 보면, 평소에 왕비가 사랑하던 학이 백 일 제사를 마치던 날 소리 높이 슬프게 울며 학포(鶴圃) 방면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울릉문화원>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우해왕이 연주하던 비파였다고 한다.
 
2) 목우사자

실직군주에 임명된 이사부의 포부는 곧바로 동해를 내해로 만드는 일로 실현된다. 실직 군주로 임영된지 7년후인 지증왕 13년 (서기 512년) 이사부는 하슬라(강릉) 군주로 임명됨고 동시에 우산국(울릉도) 공격에 나서 성공한다.

이사부의 우산국복속 기사는 <삼국사기>에 두차례 나오고, <삼국유사>에도 실려있다. 두 사서에서 스토리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내용에 약간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1) 지증왕 13년(512년) 여름 6월,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해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木偶師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했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 지증왕 13년(512년) 임진에 그는 하슬라주(阿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병합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니 꾀로서 항복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나무로 사자의 형상을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는 속여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했다. <삼국사기 열전>
 
3)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다]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 한다]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이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했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우두머리(州伯)로 삼았다. <삼국유사>
 
하슬라(何瑟羅)와 아슬라(阿瑟羅), 울릉도(鬱陵島)와 우릉도(羽陵島)는 한자 표기상의 차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이사부를 박이종이라고 했다. 삼국시대엔 성(姓)씨의 개념이 약해 전승(傳乘)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해 저저 일연(一然)이 받아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종(伊宗)은 이사부의 '이(異)'가 발음이 같은 '이(伊)'로 옮겨갔고, '부(夫)'는 뜻이 같은 '종(宗)'으로 변했다. 음과 뜻에 따라 표기하는 이두식 표현이다. 이사부의 또다른 이름인 '태종(笞宗)'도 이두식 표기다.

두 사서에서 중요한 차이는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에 부임한후 우산국을 정복했는지, 우산국 정복을 한후에 하슬라의 우두머리가 됐는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본기와 열전에서 모두 하슬라 군주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우산국을 정복했다고 하는데 비해, <삼국유사>에서는 우산국을 정복한 대가로 지증 임금이 이사부를 아슬라 주백(州伯)으로 삼았다고 했다.

두 사서의 이 차이로 인해 이사부 출항지를 놓고 강릉시와 삼척시가 다투기도 했다. 강릉시는 하슬라 군주로서 경포호 입구에서 출항했다고 주장하고, 삼척시는 오십천 하구에서 출항했다고 내세웠다.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기술대로 하슬라 군주가 먼저라고 해도, 강릉에 가자마자 대규모 선단을 제작하기 어려웠을 터이고, 실직 군주를 7년간 맡으면서 우산국 정벌에 관한 전투 준비를 했을 것으로 관측하고, 삼척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사부가 삼척에서 출항한 또다른 이유는 울릉도의 정서(正西) 방향에 삼척이 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엔 울릉도의 위치가 "명주(강릉)에서 정동(正東) 쪽 바다에 있다"고 했지만, 울릉도를 정동으로 항해할수 있는 곳은 삼척이다.

신라시대엔 항해술이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정방향 항해술'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선 방향으로 항해하다가는 목표 지점을 놓치거나 조난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사부 함대는 정동쪽으로 방향을 잡아놓고 울릉도를 향해 진군했을 것이고, 그 출항지로는 삼척이 가장 적합했다.

두 사서에서는 목우사자를 동원해 우산국 사람들이 공포에 떨어 항복했다는 대목에서 일치한다. 사자는 우리나라에서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하지만 법흥왕때 불교가 들어오면서 인도의 사자 이야기가 신라에 전해졌고, 이사부도 절에 가거나 불경을 공부하면서 사자에 관해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해석하면, 우산국은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있던 시절에 이미 신라에 복종해 해마다 신라에 조공을 바쳤다. 그러던 우산국이 바다가 가로막혀 있는 지리적 장애를 믿고 조공을 끊고 신라에 대응한 것이다. 이에 이사부는 육지로는 강릉(하슬라)까지 관할 영역을 넗힌 후에 울릉도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사부가 나무사자를 만들어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낸 일화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목마에 비견된다. 트로이 목마는 수많은 군인들이 들어갈수 있도록 대형으로 제작됐지만, 나무사자는 군선에 실어야 했으므로 트로이 목마보다 규모가 작았을 터이지만, 우산국인들이 두려워 항복할 정도였으니, 상당한 크기로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척시에서는 여름에 매년 이사부 축제를 열고 나무사자 깎이 행사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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