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 복속으로 제해권 장악, 금관국 합병으로 倭의 연결로 차단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⑨] 倭의 침공을 차단했다
우산국 복속으로 제해권 장악, 금관국 합병으로 倭의 연결로 차단
 
   
▲ 김인영 언론인
이사부(異斯夫)가 활동하는 6세기 이전에 신라를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가 왜(倭)였다. 왜와 관련한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무려 49회나 나온다. 이중 33회가 침략 기사다.

신라에게 왜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네차례나 수도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백성 1천명을 끌고 가는 침략 세력이었다. 임금의 동생을 볼모로 잡았고, 툭하면 대신의 딸을 왜왕에게 시집오라고 했다.

왜의 공격에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인 금성을 지켜 농성하고, 왜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수세적인 방법을 취했다. 신라는 '물의 싸움(水戰)'에 약했다. 임금도 이를 인정했다. 바다를 건너가 선제 공격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관문을 지켜 왜병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냥 당하기만 하던 신라는 5세기 들어 해상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자비 임금은 즉위 6년(463년)에 담당관에 명해 전함을 대대적으로 수리케 하고, 지증왕 6년 (505년)엔 '선박이용의 제도(舟楫之利)'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륙이 아니라, 해안에서 왜의 침공을 저지했다. 실성 14년(415년), 신라 수군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512년 이사부가 바닷길을 건너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물을 두려워 하던 신라 수군으로선 엄청난 발전이며, 신라군에 바닷 싸움(해전)에서 자신감을 얻게 한 전투였다.

이사부는 울릉도를 복속시켜 동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와 울릉도, 왜의 연결고리를 차단했다. 아울러 금관국을 합병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던 왜선의 해상로를 끊어버렸다.
 
 
   
▲ 왜구 소굴의 하나로 추정되는 일본 시라하마의 산단베키 동굴.

1)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

사료를 뒤적이다 보면 의문이 드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하나가 한반도 남쪽에 왜족(倭族)가 있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면 몇가지 의문을 제기해 보자.

중국 서진(西晉)시대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이런 의문의 답을 구할수 있다. 몇구절을 보자.
 
1)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경계를 접하니(南與倭接), 면적이 사방을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는데 그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가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2)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편평하다. 왜(倭)에 인접한 곳의 남녀들(男女近倭) 또한 문신을 한다.

3)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其瀆盧國與倭接界) <삼국지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은 3세기 후반에 동이족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기행담을 모은 사서로, 12세기에 사료를 모아 쓴 <삼국사기>보다 사실에 근접해 서술했을 것이다. 당대의 기록이 1천년 후의 기록보다 정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서 한(韓)의 남쪽에 왜와 접(接)해 있고, 진한과 왜가 가까이(近)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接界)고 하질 않는가. 그렇다면 3세기에 한반도에 왜가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는 "왜인들이 문신을 하는데, 나라마다 각기 다르다"는 기사가 있어 왜와 가까이 있는 진한의 남녀가 문신을 따라했다는 기사에 설득력이 있다.

상식적으로 왜는 일본 열도에 있어야 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서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해 국읍을 이루고 있다"고 해, 일본 열도가 왜인의 본거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동이전> 한조에서 말하는 왜는 일본 열도의 왜와 별도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를 가설로 삼아 한반도에 존재한 왜의 위치를 살펴보자.

마한은 서쪽에 있다(馬韓在西)고 했고,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辰韓在馬韓之東)고 했다. 마한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이고, 변한은 부산 경남 지역이며, 진한은 경상북도 지역과 대체로 겹친다. 그러면 한(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과 남쪽으로 접하고, 변한의 한 국가인 독로국과 접하며, 진한과 가까운 곳은 바로 전라도 지역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전라도 일대에 왜가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2) 나주가 한반도 왜의 중심인가?

<삼국지 동이전>과는 별도로 국내 사학계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일본식 무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파문을 일으켰다.

1972년 고려대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던 윤세영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구릉 네곳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도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전방후원분은 4~6세기 일본에서 성행했던 무덤양식으로, 평면도 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어로는 'keyhole-shaped tomb'이라고 번역하며, 국내에서는 장고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장고형 고분'이라고 한다.

윤세영의 주장으로 국내 고고학계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고, 정부는 전문가들을 불러 문화재위원화를 개최했다. 위원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또다시 일본식 무덤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은 1983년 강인구 영남대 교수였다. 강인구 교수는 경남 고성과 함안, 경북 고령, 전남의 나주, 영암, 무안, 함평의 고분들이 장고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외형만 전방후원분일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본 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논쟁의 대상이 됐던 고분 중에서 부여와 고성의 고분은 나중에 장고형 고분이 아니라는 학계의 결론이 났다.

1980년대 후반엔 전남 함평 일대, 영암 일대, 광주 일대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연이어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도 더 이상 장고형고분, 즉 일본식 정방후원분이 한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10여기 이상의 장고형 고분이 발견됐다. 이제 더 이상 일본식 무덤이니, 단순한 자연구릉이니 하는 논쟁도 사라지고,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넘어갔다.
 
   
▲ 일본식 장고형 고분 발굴지역.
 
전라도 일대 전방후원분에 대한 조사는 일제때부터 시작됐다.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30여기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반남고분군이다.

그곳의 고분이 겉모양에서 일본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반남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1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겉모양은 원형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중략)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 조사단은 1차 조사후 오랜 기간 동인 정밀 조사를 미루었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발생해 나중에 2차 조사를 할 때 부장품을 거의 찾지 못했다고 한다. 국사학자 이덕일은 이희근과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일본이 ‘아마 왜인일 가능성’만 제기하고 정밀 조사를 미루어 도굴을 조장했는데, 그 이유는 임나본부설을 뒤집는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덕일은 앞의 책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당서>등의 지리지를 종합해 왜와 나주고분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등 5도호보와 대방주(對方州)를 설치했는데, 대방주가 과거 왜의 세력이 설치한 주(州)였다. 대방주의 중심현은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지금의 반남현이다.

따라서 반남고분군의 주인공이 바로 한반도 왜의 지배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3) 소멸하는 왜

한반도 왜는 고구려와 신라의 힘이 강해지면서 서서히 한반도에서 빠져나가 일본으로 물러났다.

한반도 왜를 첫 번째로 타격한 사람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10년(400년) 보병과 기병으로 무려 5만 병력을 보내 신라를 구원케 했다. 고구려군이 서라발에 이르러, 그곳에 가득한 왜군을 쳐 퇴각시키고, 왜의 동맹세력인 임나(任那)가야의 종발성(從拔城)까지 진군해 성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반도 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 같다.

두 번째 타격은 신라 이사부였다. 이사부는 지증왕 13년(512년) 우산국을 정벌하고, 동해 제해권을 쥐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왜의 노략질을 차단했다. 아울러 이사부가 왜의 동맹세력인 금관국을 정벌해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남해안 일대에 대한 해상 지배력도 확보하게 됐다.

신라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자, 열도와 반도 왜 사이에 수송로가 끊기고, 이에 따라 한반도 왜는 퇴로 차단에 앞서 열도로 넘어갔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 왜와 관련한 기사는 신라 소지왕 19년(497년), 백제 비유왕 2년(428년) 이후 사라진다. 5세기말쯤 한반도 왜가 거의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고, 잔류한 왜인들은 백제, 나중엔 신라에 동화돼 간 것으로 보인다.
 
160년간 우리 사서에서 사라졌던 왜가 662년 다시 나타난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열도의 왜는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5만 수군을 동원해 상륙하려다 백마강(금강) 어귀에서 전멸했다. /김인영 언론인

   
▲ 산단베키 동굴에 전시된 왜구의 갑옷과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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