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초기에 최고권력자…내치와 영토확장 주력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⑩] 나가면 장수요, 들어와선 재상

진흥왕 초기에 최고권력자…내치와 영토확장 주력

   
▲ 김인영 언론인
이사부(異斯夫)는 지증·법흥·진흥왕 3대에 걸쳐 신라의 영토를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확대하는 망라사방(網羅四方) 정책의 주인공으로 나선다.
 
동 – 우산국 복속 (지증왕)
서 – 도살성, 금현성 점투 (진흥왕)
남 – 금관 가야 공격 (법흥왕)
대가야 복속 (진흥왕)
북 - 실직 및 하슬라 군주 수행 (지증왕)
 
이사부의 활약으로 진흥왕 시대 신라는 북으로 함경남도, 서로는 서해안 당항성(경기도 화성), 동으로 울릉도, 남으로 경상남도 가야 관할영역을 모두 차지한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 사이에 존재하며 소국을 경영하던 예국, 맥국, 말갈, 우산국, 가야연맹 소국은 거의 모두가 신라에 흡수되며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본격적인 삼국 혈투의 시대가 개막된다. 아울러 한반도 고대사에 등장하는 말갈과 왜 등의 이질적 종족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잃고 소멸하거나 퇴장한다. 그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이사부였다.
 
   
▲ 신라시대 장군복.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을 토대로 추정한 복장. 경주국립박물관.
 
1) 出將入相 -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선 재상

이사부는 실직 군주에 임명되기 앞서 이찬이라는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다.

신라는 2대 유리왕 때 17등급을 두었는데, 최고 관직은 이벌찬(伊伐飡)이며, 두 번째 관직은 이찬(伊飡). 셋째는 잡찬(迊飡), 넷째는 파진찬(波珍飡),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이다. 이벌찬에서 대아찬까지는 왕족 가운데 진골만이 될 수 있었다.

법흥왕(法興王) 18년(531년)에 처음으로 최고관직으로 상대등을 두었다. 「삼국사기」

이사부는 진골이었기 때문에 최고관직 5등급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고, 20대에 두 번째 서열인 이찬에 올랐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조」에는 이사부가 마지막으로 대가야 전투에 참여하기 앞서 "진흥왕은 이찬 이사부에게 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직군주에서 대가야 전투시까지 57년동안 이사부의 공식 직함은 이찬이었다.

진흥왕때 세워진 단양 적성비에서도 이사부의 직책을 이찬(伊干支)으로 표기했다. 적성비에서 이사부는 경주 6부 가운데 임금이 속해 있는 훼부(喙部) 소속인 것으로 표현돼 있다. 이사부는 지증왕에서 법흥왕, 진흥왕을 잇는 김씨 왕가의 선봉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사부의 직위에 대해 「일본서기」에는 상신(上臣)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법흥왕 16년 (529년) "상신(上臣) 이질부례지(伊叱夫禮智, 이사부)가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금관가야의 4촌(村)을 약탈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상신(上臣)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찬(伊飡)보다 높은 지위임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잡지」에 따르면 상대등(上大等)을 상신(上臣)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사부가 법흥왕때 신라에서 최고관직인 상대등의 반열에 올랐다는 얘기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에 차이가 있지만, 이사부는 법흥왕조에 이르러 신라에서 임금 다음의 최고 관직에 올랐음은 분명하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선 이사부는 '상상(上相)' 또는 '각찬(角粲)'이라고 표현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이사부에 대한 언급은 진흥왕 때를 일컫는다. 법흥왕 이후 진흥왕에 이르러 이사부는 상신(上臣) 또는 상상(上相)으로 재상(宰相) 역할을 한 셈이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이사부의 관직은 2등급 관직인 이찬을 계속했지만, 이사부가 활동하는 기간에 별도의 인물이 상대등 또는 이벌찬을 맡았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사부가 사실상 재상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파악된다.
 
2) 병부령

이사부가 서라벌 정가의 정점에 서는 것은 진흥왕 초기다.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선 진흥왕이 15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임금이 어렸으므로, 누군가의 섭정이 필요했는데, 「삼국사기」에는 왕태후인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이 섭정을 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선 어머니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이 섭정을 했다고 한다.

두 사서에 차이가 있지만, 혈연 관계상 전왕 부인이 섭정하기 보다는 모친이 섭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보도부인은 세력이 약한 박씨이고, 지소부인은 김씨여서 친정의 힘이 섭정 체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소부인은 법흥왕의 딸이며,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즉 삼촌과 결혼해 진흥왕을 낳았다.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갈문왕은 진흥왕이 즉위하기 전인 서기 537년에 죽었다.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에 사부지(입종) 갈문왕이 정사년(537년)에 죽었다(過去)고 기록했다.]

아버지가 일직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은 즉위한 7세부터 18살이 될 때까지 11년간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이사부는 진흥왕 2년 3월(541년)에 병부령을 맡았다. 신라는 지증왕 때 선포한 망라사방(網羅四方) 정책을 중시하고 영토 확장에 주력하고 있었으므로, 중앙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병부령은 최고의 실력자였다. 임금이 8살 되던 해 이사부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진흥왕의 섭정인 지소태후가 남편 입종갈문왕이 죽은후 영실과 재혼했다가 다시 이사부와 결혼을 했다고 전한다. 공주가 작은아버지와 결혼하고, 임금의 어머니가 권력자와 결혼하는 대목은 유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흉노족의 피가 흐르는 신라 왕실은 친족 간에 결혼이 빈번하고, 어머니의 입장에서 권력자와 결혼함으로써 어린 아들의 왕권을 보호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토대로 보면 이사부는 섭정인 지소태후와 결혼해 진흥왕의 보호자 역할을 떠맡았고, 당대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다. 진흥왕으로선 이사부가 계부(繼父)가 된다.

태후가 섭정을 맡았으니, 수렴청정(垂簾聽政)이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되기까지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통치행위를 말한다. 한국사에서 역대 왕조의 수렴청정은 고구려에서 1회, 신라에서 2회, 고려시대는 4회, 조선시대는 8회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잦은 수렴 청정으로 외척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초래했고, 조세제도의 문란, 부정부패, 매관매직의 성행 등을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섭정의 지원세력이 강건할 때 임금이 성년이 되어 안정된 통치를 할 여건을 마련해 주게 된다.

이사부는 지소부인을 적극 후원해 진흥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소부인의 섭정은 진흥왕 12년 (551년)에 종료하는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임금이 18살이 되던 해다. 진흥왕은 그해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나라를 연다’는 뜻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친정체제를 수립했음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대개 임금이 20세가 되면 섭정체제를 끝내고 친정체제를 수립하는데, 진흥왕은 조금더 어린 나이에 진정체제를 수립한 것이다.

지소태후의 섭정기간 임금의 계부인 이사부는 병부령으로 내외병마의 일을 관장함은 물론 내치에 주력한다.

섭정기간 이사부는 병부령으로서 백관회의(화백회의)를 주재하며 국사를 총괄한 것으로 보여진다. 진흥왕 섭정기간 신라에서 일어났던 일을 연대별로 열거해보면, 이사부가 화백회의 수장(宰相)으로서 한 일들을 엿볼수 있다. 이사부가 병부령을 맡은 후 삼국사기 진흥왕조의 기록을 보자.
 
1) 541년, 이사부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게 했다.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기에 허락했다.

2) 544년, 흥륜사(興輪寺)가 완성됐다. 사람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했다.

3) 545년, 이찬 이사부가 아뢰었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해 역사를 편찬하게 했다.

4) 548년,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했다. 장군 주령(朱玲)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해,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5 )549년, 양(梁)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을 보내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내왔다.

6 )550년,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해 공격하게 했다.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흥왕 섭정기간에 이사부의 이름이 세 번이나 나온다. 안으로는 흥륜사를 지어 불교를 융성케 하고, 국사 편찬을 아뢰어 거칠부에게 역사를 편찬케 했다.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투에 병부령으로 병사를 출전시키거나, 직접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이사부는 밖에 나가서는 장수요, 안에 들어오면 재상, 즉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면모를 보였다. /김인영 언론인
[김인영]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