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최초 파면 후 징역24년 선고…"불행한 일 반복 않게 엄중한 책임 물어"
[미디어펜=김규태 기자]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모든 국민이 아꼈던 영애에서 자연인을 거쳐 정부 최고위직인 대통령까지 올랐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40년간 가졌던 영욕의 세월을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파면되고 징역 24년을 선고받은 불명예로 마쳤다.

지난해 4월17일 구속기소된 박 전 대통령 사건을 맡아 심리해온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6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 대행에 있어서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했다.

전국에 TV를 통해 생중계된 이날 선고공판에서 김세윤 부장판사는 "피고인(박 전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취득한 이익은 확인되지 않고 범죄 전력도 없으나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다"면서 공소사실 18개 중 16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난 박 전 대통령은 11세 때인 1963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발을 내딛었다.

박 전 대통령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서거한 후 22살에 영부인 직무를 대행했다.

당시 국민들은 일찌감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면서 어머니 육 여사를 닮았던 그녀를 아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영부인 역할을 하던 중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와 파면의 계기가 되었던 '비선실세' 최순실씨를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 목사가 만든 구국봉사단에서 만나게 된다.

최씨는 1979년 6월 열렸던 새마음제전 행사에서 당시 구국봉사단 총재로 참석했던 박 전 대통령을 보좌하기도 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운명의 날, 아버지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사건 후 한달 가량이 지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가 18년간 긴 칩거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칩거생활을 하면서 육영재단 이사장·정수장학회 이사장·영남대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지만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씨와 당시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가 1986년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장을 맡기면서 공식적인 인연을 이어갔다.

이들은 이후 가족이나 다름 없는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자연인 생활을 이어갔던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한 뒤 선거운동에 가담하면서 정치인으로 대중 앞에 서게 됐고, 이듬해인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정식재판 시작 후 매주 4차례씩 집중심리를 해왔다. 재판부는 6일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했다./사진=연합뉴스

19대까지 내리 5선을 기록한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역풍 속에서 당이 사상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2004년 구원투수로 등장해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역임하면서 '천막 당사'를 설치해 이끌며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2006년에는 서울시장 선거지원 유세에서 '면도칼 피습 테러'를 당한 와중에 병원에서 "대전은요?"라고 처음으로 말을 꺼내 선거 판세를 뒤집고, 당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 대 0으로 완승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해 비주류로 밀려 친박계를 이끌었던 박 전 대통령은 차떼기 사건 후 2011년 한나라당이 디도스 공격 파문과 서울시장 패배로 재차 위기에 처하자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하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뒤 2012년 4월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 내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1위를 거의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구심점을 키워왔고, 이후 압도적인 지지율로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12월 당시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51.6%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2013년 2월 당시 취임식에서 박 전 대통령은 "깨끗하고 투명하고 유능한 정부를 반드시 만들어 신뢰를 얻겠다"고 국민들에게 밝혔다.

1979년 청와대를 떠난지 34년 만에 대통령으로 재입성하게 된 박 전 대통령은 이후 본격적으로 국정운영에 있어서 '비선실세' 최씨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임기 4년 차인 2016년 최씨의 정치개입 등 국정농단 사건이 폭로되면서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파면하게 됐다.

탄핵심판과 더불어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를 받던 박 전 대통령은 18개 혐의를 받으며 지난해 3월31일 구속되는 신세가 됐고, 이후 1년 가까이 재판을 받아왔다.

1979년 청와대를 떠나 자연인 신세로 돌아갔다가 현직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선고로 지난 40년 영욕의 종지부를 찍게 됐다.

수인(수용자) 번호 '503'번을 달고 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은 6일 선고 공판에 출석하지 않아 앞서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417호 형사대법정에 나란히 섰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3번째로 '피고인석에서 선고를 받은' 대통령으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이날 징역 24년이라는 중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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