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시대의 풍파에도 굳건한 경영철학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지금의 SK의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빚덩어리 선경직물을 위기에서 구하고 매출이 10배가 넘는 유공, 그리고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기까지의 과정은 우리 산업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 오는 26일 최종현 회장의 20주기를 맞아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개척해 나간 한국 산업화의 선구자인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가 가진 신념과 철학을 되새겨보자.<편집자주>

[미디어펜=최주영 기자]“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이고 우리는 기업이 아니라 통신사업 진출의 기회를 산 것이다. 기회를 돈만으로 따질 수 없다.” 1994 한국이동통신 인수비용이 치솟자 반대하는 임원들에게 최종현 SK선대회장이 던진 일성이다. 지금의 SK그룹이 있기까지 크고 작은 M&A때마다 그의 기업가 정신은 돋보였다. 

   
▲ 1992년 고 최종현 SK 회장이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 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SK 제공


최종현 회장은 형인 최종건 회장 타계 이후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 계열화를 천명했다. 이 수직 계열화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최종현 회장의 최대 성공작"으로 인정받는다. 그가 ‘10년을 내다본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직물회사인 선경이 원사공장을 세우고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을 성사시키는 등 위기때마다 ‘투자’에 인색하지 않았던 최종현 회장의 ‘공격경영’이 SK그룹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온 셈이다. 

최종현 회장은 수직 계열화의 본격적인 추진과 동시에 1975년 선경연수원을 세웠다. 국내 최초의 기업 연수 시설. 이는 "1960년대는 설비 경쟁의 시대이며 70년대는 경영 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던 최종현 회장의 뜻을 담아 경영 능력의 배양을 위해 임직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당시 국내 기업들이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는 데만 힘을 기울일 뿐 이미 확보한 인적 자원을 키우기 위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을 때였다.

“앞으로 회사를 어떻게 경영해야 할까?” 1976년 종합 무역상사인 선경을 발족시킨 그는 종합상사 성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 확장에 나섰다. 안정과 성장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 최종현 회장의 경영 방침이었던 터라 내부적으로도 '선경은 굼벵이니 거북이니' 하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 1991년 고 최종현 SK 회장이 울산콤플렉스 준공식에 방문해 설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SK 제공

이후 최종현 회장은 일류기업을 향한 끈질긴 집념으로 또 하나의 신화를 썼다. 한국 정밀과학 기술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 폴리에스테르 필름과 비디오 테이프 개발에 나선 것. 폴리에스테르 제조 기술은 당시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만의 독점물이었으며 어느 나라도 기술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연구 개발비 400억원을 투입해 3년여 각고 끝에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개발했고 마침내 1978년 비디오 테이프 개발에도 성공을 거뒀다.

최종현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또 한번 빛을 발한 계기는 ‘유공(현 SK에너지) 인수’다. 지금의 SK그룹을 있게 한 가장 확실한 전환점이다. 정부가 유공의 민영화 방침을 발표했을 때 재계에는 선경이 유공을 사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경쟁에 참여했던 자산순위 1,2위 대기업들은 자산 규모, 재계 영향력, 현금 동원력에 치중했지만 최종현 회장은 10여년 동안 공을 들여 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한 정면 돌파로 유공 인수에 성공했다. 

정부가 선경을 유공의 인수 기업으로 선정하기 전 최종현 회장은 “미국의 회사, 걸프가 1980년 유공에서 빠진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인수 계획을 세웠다. M&A 공고가 나왔을 땐 이미 최종현 회장이 알 사우디 은행과의 1억달러에 대한 장기 차관 교섭을 끝낸 상태였다. 당시에는 정부가 차관을 얻으려고 해도 정국 불안으로 인한 리스크 때문에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가 없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최종현 회장이 차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은행의 대부분의 주주가 오랜 신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전쟁이 터져 우리나라에 석유 공급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 관계자들이 소집한 회의에서 가장 먼저 최종현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왔을 정도다.

유공을 인수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최종현 회장은 종합 에너지ㆍ종합 화학기업으로의 과감한 기업 변신을 단행했다. 

   
▲ 1987년 고 최종현 SK 회장이 제시한 무자원산유국 프로젝트의 첫 성과로 북예멘 마리브 유전에서 원유가 생산되고 있다./사진=SK 제공


최종현 회장은 항상 10년 후를 내다본 기업인이다. 새로운 중점 사업분야로 정보통신 산업을 낙점한 것도 그때부터다. 당시 삼성과 현대차가 자동차와 전자 사업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최종현 회장은 “우리가 그것보다 더 잘 할수 있는 사업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이동통신 바람’이 불고있다는 보고를 접한 최종현 회장은 여러 학자들을 만나 “이동통신 사업의 전망”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정보통신산업이 아직 생소할 때였다. 장기 경영전략으로 종합정보통신산업 진출을 결정한 SK는 미국에 미주경영기획실을 설치하고 정보통신 사업진출을 위한 전문팀을 구성했다. 착실한 준비를 거쳐 1989년에는 미국현지법인 유크로닉스(YUKRONICS)사를 설립, 현지에서 이동전화사업을 실제로 운영해보는 한편 국내에는 YC&C, 선경정보시스템, 선경유통, 대한텔레콤 등을 설립 기반을 다져나갔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경영권을 획득함으로써 SK는 종합정보통신 사업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1996년 세계최초로 CDMA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 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SK는 세계정보통신산업의 새 장을 열게 됐다.

SK그룹의 성장은 ‘운’ 때문이었다는 세간의 혹평에 대해 최 선대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유공 인수, 정보통신 산업 진출 등 남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는데 절대 운만으로는 큰 사업을 할 수 없다”며 “SK는 이를 위해 10년 이상 준비해왔다”고 일침을 가한 일화도 유명하다. 

재계 관계자는 “요즘과 같은 ‘내우외환’에 재계가 휩싸인 상황에서 최종현의 경영철학은 후대에 계승 발전돼 SK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며 “내년 경제의 저성장과 주력산업의 부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에서 경제보국을 이룬 ‘최종현의 기업가 정신’이 조명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한편 SK그룹은 오는 26일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타계 20주기에 앞서 24일 오후 5시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가계 인사 500여명을 초청해 추모 행사를 열고 최종현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되새긴다. 
[미디어펜=최주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