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들, ‘유착 스캔들’ 극복…투명한 ‘파트너십’ 전환
공산권마저 기업 육성에 올인…한국만 ‘정치 우선’ 관행
정치(政治)와 경제(經濟)가 손을 잡고 국부를 창출하는 ‘정경협력(政經協力)’은 글로벌 공급망 경쟁 시대에 부국강병을 위한 반드시 필요한 생존 전략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정경유착’ 프레임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역대 정권마다 이 같은 모순이 반복돼 온 가운데, 현 정권 역시 대기업 총수들과 화기애애한 회동을 연출하면서도 뒤로는 상법 개정안, 노란봉투법 등 기업의 목줄을 죄는 규제 법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 미디어펜은 국내 정·경 관계의 실태를 살펴보고, 해외 선진국 사례를 짚어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정치와 경제의 올바른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미디어펜=조우현 기자]글로벌 공급망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주요국 정부와 기업의 관계가 국가 생존을 위한 ‘정경협력’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의 폐해를 제도적 투명화로 극복하고, 기업의 경쟁력을 국가 경쟁력과 동일시하는 체제다.

반면 한국은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 구축보다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재계를 동원하고 규제를 가중시키는 구시대적 관행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글로벌 공급망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주요국 정부와 기업의 관계가 국가 생존을 위한 ‘정경협력’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의 폐해를 제도적 투명화로 극복하고, 기업의 경쟁력을 국가 경쟁력과 동일시하는 체제다. 사진은 서울시 빌딩 숲.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선진국의 패러다임 전환… 규제 대신 ‘투명한 파트너십’

미국과 일본 등 글로벌 경제 강국들 역시 과거 ‘정경유착’ 스캔들을 겪으며 혹독한 사회적 비용을 치렀다. 

대표적으로 1976년 미국 항공사 록히드가 자사 여객기 수출을 위해 일본의 전·현직 총리와 고위 관료들에게 천문학적인 뇌물을 건넨 ‘록히드 사건’은 전 세계 정경 관계의 근간을 흔든 초대형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선진국은 스캔들 이후 기업의 경영 활동 자체를 옥죄는 반시장적 규제를 양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미국은 록히드 사건 직후 기업의 불법 자금 흐름을 차단하고 회계 투명성을 극대화하는 ‘해외부패방지법(FCPA, 1977년)’을 제정했고, 일본 역시 정치자금법을 개정해 음습한 거래의 통로를 원천 봉쇄하는 ‘시스템 개혁’을 택했다.

관계의 투명성을 높여 유착의 고리는 끊되, 기업의 경쟁력은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정경 관계는 ‘역할 분담’과 ‘파트너십’으로 재정립됐다. 정부는 인허가 패스트트랙과 인프라 조성 등 행정적 서포트에 집중하고, 기업은 기술 개발과 고용으로 화답하는 구조다.

실제로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을 통해 자국 내 설비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총 527억 달러(약 73조 원)의 직관적인 보조금과 25%의 파격적인 투자 세액공제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텔, TSMC,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법 제정 이후 총 3000억 달러(약 415조 원)가 넘는 민간 투자를 이끌어내며 2030년까지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20%를 자국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현실화하고 있다.

일본 역시 파격적인 속도전으로 정경협력의 성과를 증명하는 중이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회생을 위해 약 4조 엔(약 35조 원) 규모의 재원을 확보하고, 대만 TSMC의 구마모토 1공장에만 총투자비의 절반에 달하는 4760억 엔(약 4조 1000억 원)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특히 구마모토 공장은 통상 5년 이상 걸리는 과정을 전폭적인 ‘인허가 패스트트랙’ 지원을 통해 28개월 만에 마쳤다. 일본 정부는 이 지원을 발판 삼아 2030년 자국 내 반도체 매출을 현재의 3배 수준인 15조 엔(약 130조 원) 이상으로 끌어올려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구상이다.

◆ 공산권의 ‘초법적 특혜’… 체제 불문한 자국 기업 올인

주목할 점은 자유시장경제 체제와 궤를 달리하는 공산권 국가들이 한 발 더 나아가 자국 핵심 기업 육성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전폭적인 지원을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경우 정부가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대기금) 등을 통해 자국 반도체·배터리 기업에 수십조 원의 보조금을 투입하는 것은 물론, 전기차를 비롯한 미래 자동차 산업 전반에 세제 혜택과 대규모 구매 보조금 제도를 전폭 가동하며 글로벌 시장의 생태계를 흔들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정책은 제조업 위주의 우리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정부 지원으로 큰 중국 기업들은 석유화학 부문은 물론, 자동차, 태양광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국내 기업과 경쟁을 펼치고 있다. 최근 삼성이 중국 시장에서 가전을 철수한 사례를 보더라도 중국의 경쟁력이 크게 올라왔음을 보여 준다. 

LCD 등 디스플레이 산업도 중국에게 먹혔고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중후장대 산업 역시 중국의 저가 공세에 시달리며 전 세계에서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반도체 등 일부 최첨단 분야 역시 정부의 천문학적 지원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베트남 역시 사회주의 당 주도 하에 글로벌 IT 및 제조 기업들의 생산 기지를 유치하기 위해 토지 무상 임대, 파격적인 법인세 면제, 맞춤형 인프라 독점 제공 등 법적 테두리를 넘어선 전방위적 국가 자원 동원 체제를 가동 중이다.

이러한 공산권 특유의 특혜는 시장 왜곡과 보조금 남발에 따른 내부 부실 등 구조적 폐해를 동반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당장 이들과 생존을 건 패권 경쟁을 벌여야 하는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국가적 총력전 체제를 갖춘 해외 경쟁사들과의 체급 차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역차별적 구조에 직면해 있다. 

체제와 진영을 불문하고 정부가 전폭적인 ‘정경협력식 지원’으로 기업의 전면에서 뛰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 호남 반도체 공장 조율 등… 여전한 ‘정치 우선’ 관행

해외 주요국들이 투명한 정경협력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안, 국내는 여전히 시스템보다 정치가 우선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 간의 독대 과정에서 결정된 ‘호남 반도체 공장 투자 조율’은 이러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재계 일각에서는 기업의 독자적인 경영 판단과 시장 논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대규모 투자 계획이, 여전히 정권의 지역 균형 발전 치적 쌓기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율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정부가 기업과 협력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자 한다면, 일방적인 투자 보따리를 요구하는 동원의 대상이 아닌 대등한 파트너로 대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각종 입법 리스크와 세계 최고 수준의 세제 부담 등은 방치하면서 경제 논리보단 정치 논리가 앞선 투자 요구를 감행하는 모순적 행태가 지속되는 한 진정한 협력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정치가 경제를 리드하는 낡은 유산에서 벗어나, 선진국형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글로벌 표준의 정경협력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재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