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홍샛별 기자] 원·달러 환율이 장 시작과 동시에 1530원을 돌파하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약 17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중동 지역의 군사적 충돌 격화와 미국의 대 한국 추가 관세 리스크, 외국인 투자자들의 역대급 주식 매도세가 겹치며 국내 금융시장이 거대한 약세 압력에 직면했다. 당국이 구두 개입과 실개입을 망라한 총력 방어에 나섰으나 쏟아지는 달러 환전 수요를 막기엔 역부족인 모양새다.
원·달러 환율이 장 시작과 동시에 1530원을 돌파하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약 17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3.6원 급등한 1530.0원에 개장했다. 환율이 개장 직후 1530원 선을 넘어선 것은 2009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지방선거로 국내 시장이 휴장했던 지난 3일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서 장중 1536원까지 치솟았던 충격이 정규 개장과 동시에 그대로 반영됐다. 지난달 15일부터 12거래일 연속 1500원대를 기록하며 가뜩이나 취약해진 원화 가치에 초대형 대외 악재들이 기름을 부었다.
이번 환율 폭등의 방화쇠는 중동발 군사 충돌과 미국의 관세 폭탄이다. 미군이 이란 유조선을 무력화하자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가 보복으로 쿠웨이트 공항 및 미군 기지를 공습하면서 안전자산인 달러화 수요가 폭발했다. 여기에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강제 노동 생산품 수입 금지 조치 미비를 이유로 한국산 수입품에 1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원화 약세 심리를 극대화했다.
설상가상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셀 코리아' 행진이 환율을 끌어올리는 가장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외국인은 지난 1일 2조9140억원, 2일 6조5940억원을 순매도한 데 이어 이날 오전에도 유가증권시장에서 3조원 이상을 가파르게 팔아치우고 있다.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처분한 대금을 달러로 바꾸는 역송금 수요가 시장에 끊임없이 유입되면서 환율 상단을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형국이다.
시장의 변동성이 통제 불능 수준으로 커지자 외환당국도 급박하게 움직였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오전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대외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불안 심리가 확산되지 않도록 높은 경계감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과도한 쏠림에 대해서는 필요한 조치를 즉시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당국의 구두 개입 조치와 함께 개장 직후부터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으로 추정되는 달러 매도 실개입 물량이 강하게 흘러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당국의 개입 직후 환율은 장중 1520원까지 일시 하락하기도 했으나, 이내 외인의 매물 압박에 밀려 다시 1530원 선으로 복귀했다.
문제는 환율 방어를 위한 실물 보루인 외환보유액마저 깎여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269억9000만달러로 전월 대비 8억8000만달러 감소했다. 당국이 시장 안정화 조치와 국민연금 외환 스와프 등으로 달러를 공급하면서 한 달 만에 다시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외환시장의 충격은 채권시장으로도 고스란히 전이됐다. 이날 서울 채권시장에서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일 대비 6.7bp 오른 3.837%에 거래되며 2023년 1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고, 10년물 금리 역시 6.9bp 상승한 4.205%를 기록했다. 환율 급등에 지친 외국인들이 국채선물 시장에서도 3년물과 10년물을 통틀어 수천 계약 이상 순매도하며 채권 가격 하락을 부추겼다.
증권가에서는 당분간 환율의 추가 상승 가능성을 열어두고 보수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다음 주 예정된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와 뒤이어 열릴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등 매파적 성향을 띨 수 있는 대형 이벤트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5월 초부터 전쟁 장기화에 따른 강달러와 글로벌 금리 상승, 외국인의 국내 증시 매도로 환율 상방 압력이 높은 국면에서 관세 리스크까지 더해지는 등 굵직한 원화 약세 재료가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다"면서 "과잉생산과 관련한 관세 조사와 다음 주 발표되는 5월 CPI, 18일 매파적 FOMC까지 모두 환율 상방 압력을 자극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인 1530원을 넘어선 만큼 네고(수출기업의 달러 매도) 물량 유입과 고점 인식에 따른 제동 장치가 작동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역외 참가자들도 고점 매도 대응으로 전환할 공산이 크다"고 관측했다.
[미디어펜=홍샛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