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초창기는 해외 선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추격의 역사였다. 1980~1990년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격차를 좁히기 위해 해외 선진 기술진을 영입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특히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반도체와 전자 사업의 기반을 닦을 당시, 일본의 핵심 기술자들을 초빙해 기술 자문을 받고 상품 기획 역량을 흡수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주말과 휴일을 활용해 일본 엔지니어들을 국내로 초청해 밤낮없이 기술을 전수받으며 초석을 다졌다. 외국의 기술과 인재를 모셔오며 성장했던 것이 불과 수십 년 전 한국 반도체의 현실이었다.
◆ 일본 기술 초빙하던 추격자, 이젠 글로벌 빅테크 ‘사령탑’ 공급국으로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반도체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에 최고 경영진과 핵심 인력을 공급하는 주류 반도체 선도국 반열에 올랐다. 최근 SK하이닉스 CEO와 SK온 사장을 지낸 인사인 이석희 전 사장이 미국 인텔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부문 수석부사장(EVP)으로 선임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 수석부사장은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뿐만 아니라 차세대 기술 고지로 꼽히는 첨단 패키징 조직까지 총괄할 예정이다. 대한민국 반도체 대기업의 전직 수장이 글로벌 빅테크의 최고위 경영진으로 직행한 것은 업계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인텔이 “2030년까지 세계 파운드리 2위를 달성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 만큼, 업계에서는 한국 반도체 생태계와 기술 흐름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는 베테랑 인사를 전면에 내세워 추격에 속도를 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하고 있다.
◆ 실무진 넘어 전직 CEO까지… 엔비디아·메타 이어 전방위 영입 경쟁
물론 과거에도 한국 반도체 출신 핵심 인재들이 글로벌 무대로 이동해 활약한 사례는 있었다.
현재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의 고대역폭메모리(HBM) 및 차세대 패키징 부서, 그리고 자체 AI 칩(MTIA)을 개발 중인 메타의 핵심 설계 및 데이터센터 인프라 부서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의 한국인 인력들이 대거 포진해 기술 개발의 중책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무진이나 일반 임원급을 넘어 전직 CEO까지 글로벌 빅테크가 영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 인재의 역량과 가치가 독보적인 최고위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가 됐다.
재계에서는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투어 한국 인재를 찾는 것은 세계 1위 반도체 국가가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위상의 방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의 SNS에 태극기 이모티콘을 내걸고 국내 반도체 설계 및 공정 인력을 공개 모집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이와 함께 미국 마이크론은 국내 구직자들의 선호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한국 내 브랜드 채용 마케팅을 대폭 강화하며 우수 메모리 인력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인 램리서치 역시 한국 내 생산 역량 강화를 위해 100명 규모의 대규모 엔지니어 공채를 단행하는 등 외국계 기업들의 한국 내 인재 확보 총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 1등의 숙명과 자산 유출 리스크… 제도적 방어선 구축 시급
그러나 위상 상승의 이면에는 '핵심 기술 및 인력 유출'이라는 현실적인 리스크가 공존하고 있다. 선두 주자가 되면서 전 세계의 집중 타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 전직 대기업 임직원들이 삼성전자의 공장 설계 자료나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10나노급 D램 핵심 공정 기술을 중국 창신메모리(CXMT) 등 해외 경쟁사로 무단 유출해 구속기소 되는 등 사법 처리를 받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며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압도적인 자본력과 유연한 연구 환경을 무기로 국내 인력 생태계를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의 핵심인 인재와 국가전략자산인 기술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순식간에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경직된 노동 규제와 노조와의 갈등 등 구조적인 한계 속에서 개별 기업의 역량으로 인재를 지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반도체 기업이 선두 주자에 오르며 전 세계의 타깃이 된 만큼 인재 유출 고민은 자연스러운 결과”라면서도 “다만 핵심 인재 유출을 막고 이들이 국내에 머물 수 있도록 주 52시간제 완화 등 경직된 경영·노동 환경을 과감히 개혁하고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정부와 정치권의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인재 유출은 기업 개별의 문제를 넘어선 국가적 안보 이슈”라면서 “국가 전략 자산인 핵심 인력과 초격차 기술이 해외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내 연구 환경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유연화하고 기업들이 인재를 수성할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초당적인 법적·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