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소희 기자] 중동 지역의 군사적 충돌이 장기화하면서 국제 에너지 공급망 불안이 구조적 위험으로 굳어지고 있다.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역시 단기적인 수급 안정에 머무르지 말고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화 등 에너지 전환을 국가 에너지안보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국책연구기관의 제언이 나왔다.
한국환경연구원(KEI)은 최근 발간한 ‘중동 위기 이후의 에너지 전환과 한국의 대응 과제’ 보고서에서 “에너지 안보와 기후 안보를 별개의 정책이 아닌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통합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국제유가가 오름세를 보이면서 국내 주유소 기름값도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호르무즈 리스크 현실화…세계 에너지 시장 흔들
보고서는 올해 중동 지역의 군사적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 통제와 원유·LNG 생산시설, 저장시설, 수출항만 등 핵심 에너지 인프라 피해로 이어지면서 국제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을 크게 키웠다고 진단했다. 생산시설 복구뿐 아니라 해상 운송과 보험체계 정상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만큼 공급망 불안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실제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액체석유 소비량의 약 20%, 해상 석유 교역량의 약 25%가 통과하는 세계 최대 에너지 수송 병목지점이다. 특히 카타르 LNG 수출의 93%, UAE LNG 수출의 96%가 이 해협에 의존하고 있어 통항 차질은 곧바로 글로벌 LNG 공급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2024년 기준 국내 원유 수입의 71.5%가 중동산이며 LNG 역시 카타르와 오만 물량 비중이 29%에 달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 대체 공급처 확보와 가격 부담이 동시에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에너지 위기, 전환 촉진할 수도 늦출 수도”
KEI는 에너지 위기가 반드시 탄소중립을 앞당기는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국제 유가 상승은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을 높이고 전기차, 히트펌프, 에너지 효율 설비 등 전기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세계 주요국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청정에너지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OECD 역시 공급망 다변화와 함께 에너지 효율 및 청정에너지 확대를 중기 대응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공급 부족과 가격 급등은 석탄발전 재가동, 화석연료 가격 보조, LNG 대신 석탄 사용 확대 등 단기 대응을 유도하면서 에너지 전환을 지연시킬 위험도 있다. 보고서는 이러한 결과가 국가의 산업 구조와 에너지 믹스, 정책 의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KEI는 공급국 다변화와 전략 비축 확대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중동 의존도를 근본적으로 낮추려면 재생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효율 향상, 산업·수송 부문의 전기화를 통해 화석연료 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급선 다변화만으론 한계…탄소 고착 막고 수입 자체 줄여야”
보고서는 “에너지 전환은 더 이상 기후변화 대응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위한 핵심 전략”이라며 정치·경제 상황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KEI는 특히 화석연료 기반 설비와 인프라 투자가 계속되는 ‘탄소 고착(Carbon Lock-in)’을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단기적인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화석연료 발전과 관련 설비 투자가 확대되면 장기간 저탄소 체계로의 전환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청정에너지와 전력망, 에너지저장장치(ESS), 에너지 효율, 전기화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함께 재생에너지 규제 개선, 주민 수용성 제고 등 제도적 기반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국제 에너지 시장의 지정학적 위험을 상시 분석하는 범정부·민간 통합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취약계층 지원은 확대하되 시장 가격 신호를 과도하게 왜곡하지 않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성진 한국환경연구원 연구위원은 “에너지 안보는 더 이상 공급선 확보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국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국가 회복력을 높이는 동시에 에너지 안보와 기후 안보를 연계한 에너지 전환 전략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보고서는 중동발 에너지 위기를 일시적인 국제 분쟁이 아니라 우리나라 에너지 수입 구조와 산업 경쟁력을 재점검해야 할 계기로 해석했다. 반복되는 지정학적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원유 확보 경쟁을 넘어 화석연료 의존도를 구조적으로 낮추는 에너지 전환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 KEI의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