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중동 리스크 장기화와 미국의 대중국·대러시아 제재 강화 등 흔들리는 글로벌 지정학적 정세 속에서 국내 정유업계가 원유 수입선 다변화를 통해 체질 개선과 경쟁력 제고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원유 의존도를 낮추고 조달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함으로써 공급망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정유사들의 자체적인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는 모양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업계는 공급망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비(非)중동 지역으로 원유 수입선을 확장하고 있다. 중동발 정세 불안이 상시화된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원유 조달 루트를 넓혀둔 정유사들의 전략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최근 미국 상원이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하는 국가에 대해 100% 관세를 매길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지정학적 기류가 급변함에 따라 다변화된 수입 체계와 높은 설비 경쟁력을 갖춘 국내 정유사들이 아시아 석유제품 수출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 리스크 장기화와 미국의 대중국·대러시아 제재 강화 등 흔들리는 글로벌 지정학적 정세 속에서 국내 정유업계가 원유 수입선 다변화를 통해 체질 개선과 경쟁력 제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사진은 여수산업단지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미 '관세 폭탄'에 중국 저가 물량 제동…아시아 시장 반사이익 기회
미국 연방 상원은 최근 찬성 86표, 반대 11표로 러시아와 이란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는 이란 제재법 효력을 오는 2031년까지 5년 연장하는 내용과 함께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하는 상위 5개국에 무려 10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조항이 담겼다.
이번 제재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눈을 피해 값싼 러시아산 우랄유를 대거 사들여 온 중국 정유업계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그동안 중국 정유사들은 저렴한 러시아 원유를 기반으로 생산 단가를 크게 낮춘 뒤 자국 내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수출 쿼터를 늘려 아시아 시장에 막대한 잉여 물량을 밀어내 왔다.
이는 원가 경쟁력을 무기로 이윤을 극대화한 행위지만 결과적으로 아시아 역내 공급 과잉을 유발해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을 손익분기점 하단으로 억눌러 왔다. 그러나 미국의 관세 폭탄 권한 신설로 중국 정유사의 '원가 우위'가 상실될 위기에 처하면서 중국발 잉여 물량 수출에도 강한 제동이 걸리며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마진 반등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 중동 비중 40%대 진입…정유업계 원유 지도 다시 그린다
글로벌 정세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국내 정유업계가 펼친 수입선 다변화 전략이 빛을 발하고 있다. 지난해 연간 69.1%에 달했던 국내 정유업계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최근(지난 5~7월) 48.5%까지 급감하며 40%대에 진입했다.
중동의 빈자리는 미주산과 아프리카산 원유가 채워 넣었다. 미주산 원유 비중은 지난해 23.1%에서 최근 35.6%로 뛰어올랐고 아프리카산 비중도 2.2%에서 8.3%로 확대됐다. 원유 수입 대상국 역시 지난해 사우디, 미국 등 12개국에서 브라질, 호주, 캐나다, 가봉 등 17~19개국으로 넓어졌다.
기업별 대응도 구체화됐다. GS칼텍스는 미국의 제재 완화 기회를 포착해 최근 베네수엘라산 원유 약 11만 배럴을 20년 만에 시험 도입하며 경제성 분석에 나섰다. HD현대오일뱅크는 북미산 원유를 신규 도입해 북미 공급망을 단단히 조였으며 SK에너지 역시 중동산 비중을 장기적으로 50% 이하 수준까지 낮추는 전략을 경영상의 상수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 설비 불균형·물류비 등 투자 부담…정부 지원 시 '기회 창출'
다만 정유업계가 원유 다변화 성과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도 존재한다. 국내 정유사의 고도화 설비가 중동의 '중질유'에 맞춤형으로 구축돼 있어 다양한 유종을 처리하려면 탈황·탈염 등 수천억 원 규모의 정제 설비 개선 투자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긴 운송 거리에 따른 해상 물류비 부담도 기업에 큰 적자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원유 공급망 개선책을 주문함에 따라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책 검토에 나선 점은 긍정적인 신호로 평가된다. 정부는 비중동 원유 수입 시 추가되는 물류비를 보전해 주는 '석유수입부과금 환급 제도'의 상시화를 추진하는 한편 정제 설비 개선 배정을 위한 '산업자원안보기금' 신설 방안을 논의 중이다.
업계에서는 정부의 선제적인 인센티브 확대와 세제 혜택, 설비 투자 지원 등이 조속히 가시화된다면 정유사들의 비용 부담이 크게 경감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자발적인 다변화 노력에 정부의 정책적 사격이 더해질 경우 정유사들이 글로벌 시장 재편 기회를 수월하게 포착해 아시아 시장에서의 수출 격차를 벌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들은 중동 리스크에 대응해 중동 비중을 40%대로 낮추며 원유 수입 다변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정부가 운송비 보전이나 설비 투자 지원 같은 정책을 신속히 뒷받침해 준다면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한층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