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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잘나가는 한국경제, 진짜 강해졌나④]-'싼 원화' 시대 끝…'비싸도 팔리는 한국'으로

입력 2026-09-04 11:50:19 | 수정 2026-09-04 11:50:19
김태균 편집국장 | ksgit@mediapen.com
2026년 하반기 세계 경제는 겉으로 보면 예상보다 강하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아마존·메타 등 빅테크의 막대한 AI 투자가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 건설투자를 동시에 끌어올리며 경제 성장을 떠받치고 있다. 한국 역시 AI 메모리 호황을 등에 업은 반도체 수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뿐 아니라 전체 수출과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숫자 아래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사상 처음 40조달러를 넘어섰고 장기 국채금리는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쏟아내는 동시에 빅테크들도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자금을 조달하면서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자금 수요가 동시에 커지고 있다. 소비 증가세가 둔화하는 가운데 물가와 금리는 쉽게 내려가지 않고 고유가와 지정학적 위험도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착시’가 나타난다. 반도체 수출과 대기업 실적은 강하지만 중소기업과 내수업종, 비IT 산업에서는 경기 회복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크다. 반도체라는 특정 산업이 한국 경제 전체의 숫자를 끌어올리면서 업종과 기업 규모에 따른 격차가 확대되는 ‘K자형 성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원화 약세 역시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원화 약세=수출기업 호재’라는 공식이 통했지만 해외 생산 확대와 중국 기업의 경쟁력 향상, 원자재 수입가격 상승 등으로 고환율의 수출 증대 효과는 과거보다 약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AI와 반도체가 만들어낸 호황의 숫자 뒤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부채·장기금리·소비·환율·산업 양극화라는 경제의 균열을 들여다본다. 글 싣는 순서는 ①반도체가 끌어올린 한국경제…수출 호황에도 왜 ‘온도차’ 날까 ②AI가 가린 미국경제의 균열…40조달러 빚과 빅테크가 벌이는 ‘돈 쟁탈전’ ③원·달러 1400원이 뉴노멀?…원화 약세인데 수출기업은 왜 못 웃나 ④‘싼 원화’ 시대는 끝났다…‘비싸도 팔리는 한국’ 어떻게 만들까 순으로 게재한다. [편집자주]

[기획-잘나가는 한국경제, 진짜 강해졌나]
④‘싼 원화’ 시대는 끝났다…‘비싸도 팔리는 한국’ 어떻게 만들까

[미디어펜=김태균 편집국장]어느 쪽이 더 경쟁력이 강할까. 답은 분명하다. 한국은 오랫동안 수출로 성장했다. 뛰어난 제조능력에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앞세워 미국과 일본, 유럽 기업의 시장을 파고들었다. 원화가 약해지면 가격경쟁력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이제 이 성공방정식만으로 한국 수출의 미래를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다. 중국 기업은 더 이상 ‘싸지만 기술은 떨어지는 제품’을 만드는 경쟁자가 아니다. 전기차와 배터리, 디스플레이, 태양광, 철강, 조선, 로봇 등 한국 주력산업 곳곳에서 기술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일부 산업에서는 이미 한국을 앞섰다. 가격도 싸고 기술력까지 높아진 경쟁자를 상대로 환율 몇 %로 얻는 가격경쟁력만으로 승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으로 경쟁해야 할까. 흥미롭게도 답은 이미 한국 산업 안에 있다. 경쟁 제품보다 비싸도 세계 고객이 사는 제품이다.

경제의 진짜 체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답은 환율도, 특정 호황산업 하나도 아니다. 다른 나라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기술과 제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중국은 싸고 기술까지 좋아졌다…환율 경쟁의 한계

과거 중국산 제품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가격이었다. 한국 기업은 기술과 품질에서 앞서면서 중국 제품과 차별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구도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중국 전기차 업체는 세계 최대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생산규모를 키웠고 배터리와 핵심소재 공급망까지 장악했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추격은 거세다. 특히 한국이 절대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던 LNG운반선 시장까지 중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올해 LNG운반선 신규 수주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약 60%, 중국은 약 40% 수준까지 좁혀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 92%, 중국 8%였던 것과 비교하면 변화의 속도가 상당하다.

이 상황이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중국보다 싸게 만들자’는 전략으로는 중국을 이기기 어렵다.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공급망, 규모의 경제를 갖고 있다. 원화 가치가 몇 % 떨어져 한국 제품 가격이 낮아지는 것만으로 구조적인 원가경쟁력을 뒤집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이 가야 할 방향은 반대다. 중국보다 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쉽게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HBM·LNG선은 이미 답을 보여줬다…‘싸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산다

한국 산업에는 이미 그런 제품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HBM이다.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은 단순히 가장 싼 메모리를 선택하는 시장이 아니다. 처리속도와 전력효율, 발열관리, 수율, 고객 인증, 안정적인 공급능력이 모두 중요하다. AI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메모리 가격 몇 %보다 AI 가속기의 전체 성능과 안정성이 훨씬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기술력이 가격 결정력을 만든다.

조선도 비슷하다. LNG운반선은 일반 상선보다 건조 난도가 높다. 영하 160도 안팎의 LNG를 안전하게 운반해야 하고 화물창과 추진시스템, 연료효율 등 높은 기술력이 요구된다. 중국 조선업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지만 고부가 LNG선에서는 여전히 한국 조선소에 대한 글로벌 선주들의 선호가 강하다.
업계에서는 한국 조선소의 초기 선가가 중국보다 10% 이상 높더라도 연료효율과 운항 안정성, 납기 신뢰도 등을 포함한 선박의 생애주기 비용에서 경쟁력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HBM과 LNG선은 전혀 다른 제품이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싸서 사는 제품이 아니라 필요해서 사는 제품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이 앞으로 만들어야 할 수출경쟁력이다.

제2의 HBM 몇 개 만들 수 있나…‘비싸도 팔리는 한국’으로

문제는 HBM과 LNG선 몇 개만으로 한국경제 전체를 떠받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가 압도적으로 성장할수록 한국경제에는 또 다른 숙제가 생긴다. 반도체 밖의 성장엔진을 만드는 일이다. 후보는 있다. AI 반도체와 첨단 패키징, 차세대 배터리, 친환경·자율운항 선박, 방산, 바이오, 로봇·피지컬 AI, 전력기기와 원전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유망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한국의 새로운 성장엔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판단 기준을 바꿔야 한다. 세계 1위인가가 아니라 세계 고객이 한국 제품을 다른 제품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가. 대체하기 어렵다면 가격 결정력이 생긴다. 가격 결정력이 생기면 환율이 불리해져도 수익성을 방어할 수 있다. 높은 임금과 에너지 비용도 기술과 생산성으로 극복할 여지가 생긴다.

정부의 산업정책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특정 환율 수준을 유지해 가격경쟁력을 지원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이 기술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연구개발과 인재, 전력·에너지 인프라, 공급망, 규제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중소·중견기업이 대기업의 공급망을 넘어 세계시장에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기업 역시 환율 상승으로 생기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기술과 생산성에 투자해야 한다. 결국 한국 수출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질문은 의외로 간단하다.

“제2의 HBM을 몇 개 만들 수 있는가.” 반도체가 잘된다고 한국경제 전체가 강한 것은 아니다. AI 투자가 폭발한다고 미국경제의 40조달러 부채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원화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살펴본 세 가지 ‘좋은 숫자’ 뒤에는 모두 같은 질문이 숨어 있었다. 경제의 진짜 체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답은 환율도, 특정 호황산업 하나도 아니다. 다른 나라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기술과 제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환율이 1400원이어야 팔리는 제품보다 1200원이어도 팔리는 제품 △경쟁국 제품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고객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품 △한국의 목표는 단순히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세계가 반드시 사야 하는 것을 만드는 나라가 돼야 한다. ‘싼 원화로 싸게 파는 한국’에서 ‘비싸도 살 수밖에 없는 한국’으로. 그것이 반도체와 AI, 환율이라는 세 가지 숫자를 지나 이번 시리즈가 도달한 결론이다.

[미디어펜=김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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