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와 자연자본, 공급망 인권 등 ESG가 다루는 리스크의 범위는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동시에 자율공시에서 의무공시로, 기업의 자발적 선언에서 법적 책임이 따르는 규제로 그 성격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기업에 필요한 것은 막연한 방향성이 아니다. ESG 공시 실무부터 조직 거버넌스, 자금 조달 전략까지 아우르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해법이다. 이에 미디어펜은 매달 두 차례, ESG 전 영역에 걸쳐 탁월한 식견을 갖춘 대신경제연구소의 전문가들로부터 경영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통찰과 해법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편집자주]
확정된 법정공시 로드맵과 새로운 실무적 괴리의 시작
박정은 대신경제연구소 ESG공시컨설팅센터 센터장
정부가 지속가능성(ESG) 공시 제도화 최종안을 확정하며 2028년 연결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시작으로 법정공시를 공식화했다. 이번 발표의 핵심은 당초 거래소 공시를 거쳐 단계적으로 법정공시화하겠다던 로드맵을 수정하여 중간 단계 없이 2028년부터 곧바로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에 직접 편입된다는 점, 국제적으로 기준이 확립된 기후공시부터 먼저 의무화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제도를 둘러싼 오랜 불확실성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으나, 기업 현장에서는 공시 본질을 비켜간 또 다른 실무적 괴리와 부담이 생겨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공시가 법적 의무로 전환되자, 시장의 시선은 정형화된 글로벌 공시 표준의 지표를 기술적으로 충족하고, 회계감사 수준에 준하는 정밀한 데이터 관리에 급격히 쏠리고 있다. 물론 투자자 관점에서 기후변화가 기업의 재무상태와 현금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엄격한 기준에 맞춰 빈칸을 메우는 기술적 규제 준수가 마치 공시 대응의 전부인 양 인식되는 현상은, 공시의 ‘수단’이 ‘본질’을 가려버리는 왜곡을 낳을 수 있다.
재무적 수치를 넘어 가치 창출을 증명하는 비즈니스 언어로
정형화된 기준 맞추기에만 급급한 대응은 기업을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공시에 안주하게 만들기 쉽다. 법적 책임이나 오류를 피하기 위해 검증이 용이한 최소한의 보수적 수치만 나열하다 보면, 정작 공시에 담겨야 할 기업의 지속가능성 비전과 비즈니스 전환 전략, 중장기적 가치 창출 스토리와 같은 정성적인 핵심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된다. 또한 기후를 비롯한 지속가능성의 모든 가치를 당장의 재무적 영향과 계량화된 숫자로만 치환할 수는 없다.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조직문화의 혁신, 공급망과의 상생 생태계 구축, 사회적 신뢰와 같은 무형의 비재무적 가치는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과 회복탄력성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토대다. 이를 배제한 채 재무 추정치에만 매몰되는 공시는 기업의 본질적 가치를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 따라서 지속가능성 공시는 기업이 비재무적 가치를 어떻게 내재화하여 장기적인 성과를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는 비즈니스 언어 역할을 해야 한다.
법정공시 대응의 본질, 이사회가 주도하는 전사적 체질 개선
2028년 법정공시를 앞둔 기업의 과제는 외형적인 지표 충족이 아닌, ‘ESG 경영 체질로의 전사적 전환’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시 대응을 특정 실무 부서의 역할로 보던 관행에서 벗어나, 책임과 관리의 수준을 이사회와 최고경영진의 영역으로 격상하고 이사회 중심의 실질적인 거버넌스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기존처럼 ESG 부서가 유관 부서의 자료를 취합해 보고서를 발간하던 구조는 사업보고서 체제에서는 지속되기 어렵다. 기후 리스크와 기회는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자본적 지출(CAPEX)의 우선순위, 중장기 연구개발 투자 방향 등 기업의 투자와 사업 구조를 좌우하는 본질적인 경영 문제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의 실질적인 심의와 책임이 결여된 공시 내용은 사업보고서 내 형식적인 기재에 불과하며, 시장에서 어떠한 신뢰도 얻을 수 없다.
정부가 지속가능성(ESG) 공시를 법적 의무로 전환하면서 기업들의 실질적 대응이 필요해졌다./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데이터 관리 목적의 재정의와 유연한 규제로 실질적 전환 유도해야
데이터 관리의 목적도 재정의되어야 한다. 단순한 ‘공시용 숫자 맞추기’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리스크 관리’가 진정한 목적이어야 한다. 공급망 전반을 아우르는 스코프 3 배출량이나 물리적·전환 리스크는 획일적인 산식만으로 기업 고유의 경영 환경과 비즈니스 맥락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업종별 생산 구조와 공급망의 특수성, 기업이 축적해 온 유무형의 관리 역량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데이터 관리가 뒷받침될 때 공시는 수치 제출을 넘어 취약한 사업 영역을 스스로 진단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지속가능한 투자를 집행하는 경영 나침반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규제 당국의 유연한 제도 운용 역시 필수다. 미래 예측과 복잡한 추정이 불가피한 영역인 만큼, 초기부터 숫자의 절대적 정밀성만을 요구하기보다는 기업이 산정 근거와 한계, 정성적 맥락을 얼마나 투명하고 진정성 있게 설명했는가를 먼저 평가해야 한다. 또한, 성실하게 작성된 미래 추정 정보에 대해 합리적인 면책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야만, 기업들이 처벌을 피하려는 요식 행위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전환 계획을 공개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시장의 실질적 의사결정으로 완성되는 ‘공시’의 가치
공시의 진정한 가치는 작성된 정보가 시장의 실제 의사결정 기준으로 활용될 때 비로소 증명된다. 기업이 체질 개선을 통해 증명해 낸 전환 계획과 비재무적 가치는 자본시장의 투자 판단과 자원 배분 과정에 실질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며,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로의 전환을 입증한 기업이 자본시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성장의 기회를 얻는 선순환이 정착되어야 한다. 그래야 공시가 기업에 지워진 규제 부담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선도하는 가장 강력한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2028년까지 남은 시간은 규제 요구사항의 문구를 맞추는 준비 기간이 아니다. 기업의 지배구조와 전략, 사업 포트폴리오 전반을 지속가능한 구조로 탈바꿈시키는 ‘체질 혁신의 골든타임’이다. 공시는 경영의 실체를 드러내는 결과물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형식적인 외형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 시장이 신뢰할 비즈니스의 실체를 바꾸는 일에 집중해야 할 때다.
필자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20여 년간 기업 대상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공시 전략 수립, ESG 진단 및 평가 등을 총괄해 왔다. 현재 글로벌 기준과 국내 공시 의무화에 대응하는 맞춤형 자문을 이끌며, 철저한 기업 분석과 근거에 기반한 고품질 공시 체계를 현장에서 구축·제공하고 있다. /박정은 대신경제연구소 ESG공시컨설팅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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