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대체 불가능한 대배우 김혜자가 다시 한번 관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적시며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에서 김혜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친구를 60년 만에 재회하며 복잡다단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맞닥뜨리는 주인공을 맡아, 압도적인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김혜자는 1991년과 2006년이라는 두 가지 시간대를 오가며 깊이 있는 열연을 펼친다. 특히 2006년 시간대에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기억의 조각을 잃어가며 치매를 앓고 있는 정옥이다. 극 중 김혜자는 치매라는 질환이 주는 서글픔과 혼란, 찰나의 맑은 정신 속에서 밀려오는 아픔을 현실감 넘치는 눈빛과 섬세한 손짓 하나로 완성해 내며 역시 김혜자라는 언론과 관객들의 극찬을 이끌어내고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노년의 얼굴 위에 새겨진 섬세한 표정 변화는 관객들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와 '눈이 부시게'에 이어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에서 치매 연기를 한 김혜자의 연기력에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사실 김혜자의 치매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TV 화면을 통해 완벽한 치매 연기로 안방극장을 웃기고 울린 바 있다. 지난 2016년 방송된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그가 선보인 정희자 역은 치매 초기 증상을 겪는 인물의 외로움과 두려움, 엉뚱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면모를 디테일하게 묘사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어진 2019년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의 연기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시간을 이탈해 갑자기 늙어버린 인물인 줄 알았던 주인공이 사실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던 할머니였다는 반전이 밝혀지는 순간, 김혜자가 안긴 소름 돋는 열연과 울림은 수많은 시청자를 울렸다.
김혜자는 이 작품으로 그해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품에 안았으며, 당시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로 시작하는 감동적인 수상 소감은 지금까지도 대중의 가슴속에 울림을 주는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1941년생으로 올해 86세를 맞이한 김혜자에게 치매라는 질병을 연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고령의 배우 입장에서 치매는 단순히 대본 속 설정이나 연기적 도전이 아닌, 현실의 삶에서도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실제적 두려움이자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또래들의 실제 삶과 직결된 주제인 만큼 캐릭터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오는 감정적 소모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여전히 찬란하게'에서 보여준 김혜자의 연기에 영화를 본 관객들의 눈물 체험이 이어진다./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자는 신작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의 대본을 마주하고 기꺼이, 그리고 완벽하게 치매 연기를 선택했다. 시대의 비극과 역사적 상처, 그리고 세월의 흐름 속에 스러져가는 기억을 온몸으로 품어내야 하는 인물의 사명을 외면하지 않고 짊어진 것이다. 현실적인 심리적 장벽마저 뜨거운 연기 열정으로 뛰어넘은 그의 도전은 작품에 깊은 진정성을 더하고 있다.
단순한 비극으로 치닫지 않고, 희로애락의 감정선을 절제되면서도 진솔하게 표현하는 김혜자 특유의 내공은 '여전히 찬란하게'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치매 연기의 극치에서 보여주는 그의 관록과 진심 어린 연기는 잊혀가는 역사의 아픔과 인간 존엄의 가치를 동시에 환기하며,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긴 여운과 잊지 못할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