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소희 기자] “전기요금 현실화가 돼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력 판매 수입을 통해 적어도 누적 적자는 해소돼야 합니다.”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이 ‘빅스포 2026’ 현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자료사진=한전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이 전기요금 현실화 필요성을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강조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 확대, 재생에너지 확산 등으로 전력망 투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에 의존하는 재원 조달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구체적인 전기요금 인상 시기와 폭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정부와 물가당국의 공식 논의도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전기요금 현실화가 실제 인상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김 사장은 4일 광주에서 개막한 ‘빅스포(BIXPO) 2026’ 현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3대 메가 프로젝트 추진에 따라 전력망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라며 “최소한의 전기요금 현실화는 정부와 논의해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전이 전기요금 현실화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누적 적자와 앞으로 늘어날 전력망 투자 부담이 자리하고 있다. 한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국제 연료 가격이 급등했지만 연료비 상승분이 전기요금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면서 재무 부담이 누적됐다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현행 연료비 연동제의 한계도 지적했다. 연료비 연동제가 도입돼 있지만 요금 조정 폭이 kWh당 ±5원으로 제한돼 있어 국제 연료 가격 변동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연료비 연동제를 현실화하면 국제 연료 가격에 따라 전기요금도 오르내릴 수 있다는 점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다”며 “국제 가격이 내려갔을 때는 과거보다 전기를 더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구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전은 전력망 투자 수요가 기존 예상보다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연간 투자 수요는 약 12조 원 수준이지만 3대 메가 프로젝트와 추가 전력 수요를 반영하면 약 14조 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다.
김 사장은 전력망 확충을 부채나 회사채 발행으로 감당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력망 건설은 한전의 핵심 업무인 만큼 안정적인 전력 판매 수입을 통해 투자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전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자구 노력도 이어가고 있다.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누적 자구 노력 규모는 약 15조 원이며, 올해 자구 노력 목표액도 당초 2조2000억 원에서 약 2조5000억 원 수준으로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부 역시 출자와 송전망 투자 지원 등 재정 지원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김 사장은 산업용 전기요금 추가 인상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산업용 요금의 누적 적자는 거의 해소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산업용 요금을 인상한다면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답했다.
전기요금 인상 규모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시기나 수치를 제시하지 못했다. 한전 측은 장기적인 투자 수요와 유가·환율 등 여러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재무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언급했다. 전력·물가당국 간 실무자들이 의견을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논의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2028년 말까지 문제없다”
전력 수요가 집중되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 문제와 관련해서는 2028년 말 공급 목표를 제시했다. 한전은 기후에너지환경부와 광주·전남 등 관계 지자체가 참여하는 협의체와 실무협의체를 운영하며 송전망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남은 핵심 과제는 황룡강 장록습지 구간의 구체적인 송전선로 경과지를 확정하는 일이다. 한전은 해당 구간의 경과지를 올해 안에 확정하고 내년 초 공사에 착수하면 2028년 말 전력 공급에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사장은 “전력망 건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경과지 선정”이라며 “장록습지 문제만 해결되면 전력 공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사 기간을 줄이기 위한 기술적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지중송전선로 약 23~24㎞ 구간에 개착식 공법을 적용하고, 기존 현장 타설 방식 대신 공장에서 제작한 프리캐스트 콘크리트(PC) 구조물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공기를 단축한다는 계획이다.
기자재 조달과 관련해서는 변압기 수급이 변수로 꼽힌다. 세계적인 수요 증가로 변압기 조달에 통상 3년가량 걸리는 상황에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 일정에 맞춰 기자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전은 전국 전력망 사업의 공사 일정과 산단 준공 시점 등을 고려해 변압기를 유연하게 배분한다는 방침이다. 일정이 지연된 다른 지역 사업의 변압기를 우선 활용하고, 해당 사업이 본격화되면 다시 배치하는 방식이다.
김 사장은 “다른 지역의 공사 일정이 지연되는 곳의 변압기를 당겨서 쓰고, 해당 사업이 빨라지면 다시 공급하는 방식”이라며 “호남권 반도체 사업을 위해 다른 지역 사업을 지연시키는 것은 아니다”고 부연했다.
'AI 버추얼 파워 그리드' 상용화는 2031~2032년 전망
한전은 전력망 건설을 보완할 기술로 AI 기반의 '버추얼 파워그리드'도 개발하고 있다. 실제 전력계통을 디지털 공간에 구현한 뒤 AI로 학습시켜 계통계획과 고장 분석, 재생에너지 확대 등에 활용하는 기술이다.
전력망을 새로 건설하지 않고도 데이터 분석을 통해 기존 설비의 송전 가능 용량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력계통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다.
한전은 이 기술의 상용화 시점을 2031~2032년께로 예상하고 있다. 전력망 투자 수요를 직접적으로 줄이는 효과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전력망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호남권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더 많이 보내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 연계 기술도 추진 중이다. 송전선로 양단에 ESS를 설치해 전력계통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방식이다.
한전은 현재 약 4.9GW 수준인 호남권에서 수도권으로의 송전 용량을 평상시 5GW 이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호남권 재생에너지 출력제어를 줄이고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력량을 늘린다는 구상이다. 다만 이 기술은 AI 버추얼 파워그리드와는 별개의 기술이다.
LMP 도입 필요성 강조…“비수도권에 수도권 가격 적용은 합리적이지 않아”
지역별 도매가격제(LMP) 도입과 관련해서는 제도 시행에 따른 비수도권 발전사의 수익 감소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전력도매가격(SMP)은 수도권의 가장 비싼 LNG 발전기 등이 가격을 결정하면 송전 제약 여부와 관계없이 전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조다. 김 사장은 송전 제약이 발생해 수도권의 비싼 발전기가 가동되는 경우 그 가격을 비수도권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송전 제약이 걸릴 때 수도권의 가장 비싼 발전기를 돌리면 그 가격은 수도권에 해당해야지, 비수도권에도 적용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나 실제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LMP 도입으로 비수도권 발전사의 수익이 감소할 가능성은 인정했다. 특히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들의 반발이 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 가운데 장기 고정가격 계약을 맺은 사업자는 SMP 변동의 직접적인 영향이 크지 않지만, 현물시장에 참여하는 사업자는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구분했다. 비수도권 재생에너지 사업자의 경우 지역별 SMP가 낮아질 수 있지만 REC 가격이 높은 점 등을 고려하면 실제 손실이 크지는 않은 것으로 보고받았다고 했다.
그는 “정부 차원에서 들여다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할 문제”라면서도 “그런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지역별 도매가격제는 반드시 하는 것이 이론상 맞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한전은 지역별 산업용 요금제 도입과 관련해서도 정부와 종합적인 협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역별 요금제 운영에 약 2조8000억 원의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거론되는 가운데, LMP 도입을 통해 일부 재원을 마련하고 정부 재정 지원을 더하는 방안 등이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규 원전은 “공론화 시작하는 상황…아직 의견 말하기 어려워”
신규 원전 건설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공론화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김 사장은 “정부가 공론화를 시작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의견을 말하기 어렵다”며 구체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했다.
한편 김 사장은 빅스포와 관련해 한전의 전력 품질과 기술 경쟁력도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에너지의 94% 이상을 수입하는 상황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품질을 유지하고 있으며, 2025년 가구당 정전 시간은 9.3분 수준(미국 130일, 중국 6~7시간)이라고 전했다.
직류 기반 전력망 확대에도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등 직류 전원을 사용하는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교류와 직류 간 변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력 손실을 줄이고, 송전 용량을 높일 수 있는 직류 전력망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3대 메가 프로젝트에 필요한 국가 전력망을 더욱 신속히 확충하고 대한민국의 에너지 대전환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