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공지능(AI) 경쟁이 격화되면서 반도체 산업의 중심축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로 이동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인한 설계·제조 분업의 필연성 속에서, 파운드리는 이제 단순 하청을 넘어 글로벌 IT 빅테크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하는 관문이자 국가 안보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미디어펜은 2회에 걸쳐 파운드리 산업이 갖는 전략적 본질과 글로벌 생태계 변화를 짚어보고, 대한민국 반도체가 나아갈 길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미디어펜=조우현 기자] 인공지능(AI) 기술 확산과 함께 글로벌 IT 산업의 시선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로 집중되고 있다. 엔비디아, 애플, 퀄컴 등 주요 빅테크가 첨단 반도체를 설계하더라도, 이를 나노미터(㎚) 단위 공정으로 구현할 제조 인프라가 없으면 상용화가 불가능해서다. 파운드리는 단순 위탁 제조를 넘어 AI 산업의 확장 속도를 결정짓는 핵심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일 일본 요코하마에 위치한 삼성전자 첨단 반도체 패키징 연구거점(Advanced Package Lab·APL)에서 카와히라 히로이치 삼성전자 DS 리서치 재팬 연구소장(부사장, 이 회장 왼쪽), 카리야 다카시 APL 랩장(상무) 등과 함께 패키징 기술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 팹 1기에 30조원…한때 절대 공식이었던 ‘설계·제조 분업’
5일 업계에 따르면 과거 반도체 산업을 지배했던 절대 공식은 철저한 ‘역할 분담’이었다. 인텔처럼 설계부터 제조까지 혼자 도맡던 종합반도체기업(IDM)의 시대가 저물고, 빅테크는 칩 설계(팹리스)에 집중하고 생산은 전문 파운드리에 넘기는 구조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선단 공정 팹(공장) 한 기를 짓는 데만 20조~30조 원이 투입되는 데다, 대당 수천억 원을 웃도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도입 부담까지 겹치자 빅테크들이 막대한 감가상각과 공장 가동 리스크를 덜기 위해 제조를 외주화한 결과다.
여기에 가공된 웨이퍼를 잘라 조립·검사하는 패키징(OSAT)까지 각자의 전문 영역으로 잘게 쪼개지며, 고도로 세분화된 수평적 생태계는 오랫동안 반도체 시장의 정답처럼 통했다.
하지만 견고했던 이 연결고리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거센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각자 흩어져 있던 공정이 다시 하나의 울타리로 묶이는 ‘재통합’의 바람이 불면서다.
◆ ‘분업’ 벽 허문 AI…웨이퍼와 패키징 다시 묶는 ‘파운드리 2.0’
원인은 미세공정의 한계다. 웨이퍼에 회로를 더 얇게 그리는 전공정 기술이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단순히 웨이퍼만 잘 깎아서는 초고성능 AI 칩을 만들 수 없게 됐다.
결국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처럼 두뇌 역할을 하는 연산 칩과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초정밀로 묶어내는 ‘첨단 패키징’이 칩의 최종 성능을 결정짓는 핵심 열쇠가 됐다.
공정이 파편화된 과거의 분업 방식으로는 이 복잡한 결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발열과 수율 불량을 잡아내기 어렵다. 결국 웨이퍼 가공부터 첨단 패키징까지 한 공장 안에서 한 몸처럼 일괄 처리(턴키)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바뀐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가 최근 전통적인 파운드리(전공정)에 첨단 패키징과 테스트(후공정)를 합친 ‘파운드리 2.0’ 개념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올해 2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2.0 시장 매출은 전년 대비 25% 급성장한 966억 달러(약 130조 원)를 기록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첨단 패키징과 테스트 능력이 AI 인프라 구축의 핵심 병목”이라고 분석했다. 과거처럼 공정별로 쪼개 일하던 분업의 시대가 저물고, 전공정과 후공정을 하나로 꿰뚫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새로운 판이 열린 셈이다.
◆ 이재용 회장이 일본 ‘패키징 랩’으로 향한 까닭
이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는 최근 삼성전자 경영진의 현장 행보에서도 확인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 위치한 반도체 첨단 패키징 연구개발(R&D) 거점 ‘어드밴스드 패키징 랩(APL)’을 찾았다. 지난여름 공식 개소한 지 약 두 달 만에 이뤄진 조용한 현장 점검이었다.
이 회장이 요코하마 APL을 직접 챙긴 것은 차세대 패키징 경쟁력 없이는 파운드리 생태계의 패권을 쥘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패키징용 기판, 절연재, 언더필 등 후공정 핵심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회장의 이번 방문은 현지 글로벌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과의 유기적인 협력을 다져 전공정과 후공정을 잇는 통합 파운드리 역량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파운드리 2.0 시대의 최전선인 어드밴스드 패키징을 그룹 차원의 미래 승부처로 공식화한 셈이다.
◆ 40년 업력 TSMC의 벽…그럼에도 ‘반드시 가야 할 길’
물론 파운드리는 단기간의 자본 투입만으로 단숨에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1987년 설립 이후 40여 년간 오직 수탁생산 한우물만 파며 거대한 설계자산(IP)과 고객 신뢰를 축적한 TSMC가 버티고 있는 고난도 영역이다.
웨이퍼 한 장에서 양품을 건져내는 수율 노하우는 수십 년간 축적된 미세 제어 레시피가 좌우한다. 팹리스 고객사들 역시 설계 자산 이전 비용과 위험 부담 탓에 거래선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강력한 ‘락인(Lock-in)’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운드리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반드시 가져가야만 하는 시장’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글로벌 IT 패권이 AI로 완전히 재편되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최첨단 파운드리 인프라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국가 전략 산업의 명줄을 해외 공급망에 전적으로 내맡겨야 하는 경제 안보적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파운드리는 단순한 생산 라인을 넘어 한 국가의 AI 주도권과 미래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전략 자산”이라며 “글로벌 빅테크의 AI 혁신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제조 영토를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대한민국 반도체가 미래로 나아갈 길”이라고 강조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