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13)-그리스의 자유를 위한 투쟁, 신화가 되다
헤로도토스(BC 484년~BC 425년) 『역사』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과거를 잊으면 미래를 열 수 없다. 문명 이래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반추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년~BC 425년)는 2400여 년 전에 『역사(Histories apodexis)』를 온전한 형태로 남겨 후세에게 과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거울을 만들어 주었다. 그가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

『역사』에는 3천여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켜켜이 쌓여온 인류의 삶의 단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헤로도토스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었다. 『역사』는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기록을 넘어 세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일화와 기담(奇談), 습속과 문화, 인종, 자연 풍토와 지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직접 체험하거나 보고 들은 것을 정선하여 기술했다. 

그는 정치사뿐만 아니라 지리학적, 인종학적, 민속학적 자료를 채집하고 조사하며 기록했다. '역사(Histories)'의 본래 의미가 '탐구'라는 점이 이 역사서의 성격을 보다 정확히 대변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으로 과거와 현재의 자취와 현상들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탐구'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지금의 터키 지방인 당시 소아시아 서남부에 위치한 카리아(Karia) 지방의 할리카르낫소스(Halikarnassos)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인이자 최초의 세계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를 제외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바바리안(barbarian, 야만인)으로 불리던 당시, 그리스와 지중해, 소아시아 영역은 물론,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족의 나라에서부터, 바빌론과 이집트, 남이탈리아, 시칠리아까지 자유롭게 여행했다. 물론 페르시아를 빼놓은 것을 예외로 한다면 당시 그리스인들의 인식 속의 전 세계를 여행한 셈이다.  

그만큼 『역사』에는 당대 모든 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이야기도 많다.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의 이야기, 페르시아를 크게 융성시킨 키로스의 행적,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의 치세와 스키티스 원정 이야기도 흥미롭다. 또 여러 나라의 진기한 풍속에 대한 기록은 민속학적, 지리학적으로 귀중한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 헤로도토스 대리석 흉상,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금의 베네치아 일대에 살던 민족인 일리리콘의 에네토이족은 경매를 통해 아내를 고르도록 했다. 젊고 예쁜 여인을 사려면 남들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해야 했다. 반면에 남자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못생기거나 불구자인 처녀의 경우에도 경매를 붙이되 이때는 반대로 여자를 선택하는 남자에게 경매자가 돈을 지급했다. 가장 적은 돈을 받고 장가들겠다는 남자에게 해당 처녀를 안겨주었다. 헤로도토스는 이 종족이 자신들의 풍습을 나름대로 아름다운 관습으로 여기고 있다고 소개했다.

바빌론 인들의 수치스런 관습도 소개된다. 이곳의 여자는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가서 그곳에 앉아 있다가 낯선 남자와 반드시 교합해야 한다.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관습은 당시 키프로스 섬 등 몇몇 지역에도 퍼져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다른 민족과 정반대의 관습과 풍속이 행해지는 기이한 현상도 관찰했다. "여자들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남자들이 집안에서 베를 짠다." "오줌은 여자들이 서서 누고, 남자들이 앉아서 눈다." "배변은 집 안에서 하고, 식사는 노상에서 한다." 이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사제직도 여자가 아닌 남자가 맡았다.  

흑해연안의 스키타이족의 야만적 전쟁관습도 이채롭다. 이들은 적을 죽여 가죽을 벗긴 후 이를 부드럽게 가공하여 손수건으로 쓰거나 오른손에서 손톱이 붙은 채로 가죽을 벗겨 화살통의 뚜껑으로 만들어 썼다. 이런 도구들을 많이 가진 자가 용감한 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끔찍한 일이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이라고 여긴 다른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우도 솔직하게 기술한다. 아테나 여신의 의상과 염소가죽의 아이기스(aegis)가 아프리카의 리비에 여인들의 의상을 모방한 것이란 유래가 그것이다. 리비에 여인들이 염소 가죽을 물들여 겉옷으로 입고 다닌 것을 그리스인들이 모방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차에 말 네 필을 매는 것도 리비에 인들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물론 다양한 나라의 진기한 풍습을 소개하는 게 헤로도토스의 주된 목적인 아니었다. 그가 『역사』를 기술한 궁극의 목적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과정을 추적하고 조명하는데 있었다. 그는 당시 동양과 서양을 대변하는 두 나라의 충돌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으로 보고 작은 도시국가의 그리스 연합군이 거대 제국인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 '자유'를 지켜낸 쾌거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그 영광을 후세에 남기고자 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역사 기술의 초점도 그리스와 페르시아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의 사건들과 양국의 상황, 주변국과의 관계들을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세 차례의 전쟁의 징조와 거시적 전쟁 원인과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전쟁의 발단과 경과를 개관해 보자. 기원전 6세기 말경 그리스인들이 진출하여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한 소아시아 지역이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그리스 계 도시 국가들과 페르시아 간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페르시아의 거대한 제국을 완성한 다리우스 1세는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대륙의 트라키아 지방까지 정복하고자 했다. 결국 다리우스 1세에 의해 1차와 2차, 그를 이어 대왕에 오른 크세르크세스에 의한 3차 전쟁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치열한 전쟁으로 격돌했다.​

양 진영의 군세만으로 보면, 페르시아가 압도적이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려 했던지 페르시아 군세를 과장한 듯하다. 예를 들어 3차 침공 시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규모를 육군이 170만 명에 이르고, 3단 노선이 1207척이었다고 한 것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떻든 그리스 연합군은 3차례 모두 페르시아의 대군을 물리쳤다.  

1차 전쟁에서는 아토스 곶의 격한 풍랑이 전선을 난파시켜 이들을 물러가게 했다. 2차 전쟁에서는 아테네의 밀티아데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20만 대군을 패주시켰다. 3차 전쟁 역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을 포함한 300명 결사대의 옥쇄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그리스 연합함대와 페르시아 함대간의 살라미스 해전의 대승, 그리고 육지의 플라타이아이에서의 연이은 승리로 전쟁의 막이 내렸다. ​

   
▲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키아데스의 동상, 아테네병사들의 무덤 인근에 있다. ⓒ박경귀

   
▲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청동상이다.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 항구를 바라보고 있다. 항구 북서쪽으로 살라미스 해협이 이어져 있다. ⓒ박경귀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전역을 멸망시킬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외형적 전력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선은 그리스 세계의 공멸을 막기 위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결집에 있었다. 특히 그리스인은 전제 군주정 체제의 페르시아의 침공이 민주정 위주의 그리스인에게 생존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길만한 자유의 박탈을 강요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런 가치의 공유가 단결의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인들에게 흙과 물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국가가 페르시아에 굴복하는 것은 자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스의 장군들은 시민과 병사들에게 "자유민으로 남거나 아니면 노예, 그것도 탈주한 노예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을 늘 상기시키며 맞서 싸울 것을 독려했다. 

페르시아인 사령관인 휘다르네스가 스파르타 인들에게 항복하라고 회유할 때 이들이 한 결연한 답변이 당시 그리스인들의 보편적 정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승리의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휘다르네스여, 그대는 상황을 잘 몰라서 우리에게 그런 조언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그런 조언을 하시니 말이오. 그대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도, 자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아 그것이 달콤한지 아닌지 모르신단 말이오. 그대가 자유를 경험했더라면 우리에게 창뿐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했을 것이오."(Ⅶ 135)

물론 페르시아의 위력에 눌려 이들에 부역한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적지 않았다. 조국을 적에 판 배신자와 부역자도 많았다.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는 아테네로 쳐들어가는 페르시아군의 향도가 되어 마라톤으로 안내했다. 그는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정복하면 자신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권력에 대한 탐욕이 조국을 배신하게 했다.

하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은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네 측은 192명만이 전사했다."
완패한 다레이오스 대왕은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의 엄청난 대군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자진하여 페르시아에 부역한 도시국가가 많았지만, 아테네인들은 단호하게 적들에 맞섰다. 결국 아테네인들은 "헬라스 전체의 자유를 지키는 길을 택해 페르시아에 부역하지 않은 나머지 헬라스 전체를 분기시킴으로써 신들의 도움으로 페르시아 왕을 물리쳤던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아테네인들이야말로 헬라스의 구원자들"이라고 평가한 이유다. 

또한 그리스 연합군의 전술이나 중무장보병의 전투역량도 페르시아 군을 압도했다. 이 역시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동인이다. 반면에 페르시아군대는 여러 피지배 국가에서 징발된 군사들이 많았고, 승리에 대한 열망이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그리스 연합군의 절박함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그리스 연합군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맞선 것이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에서 전멸한 스파르타의 297명의 용사들은 비문처럼 그들은 조국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죽음으로 이행했다. 이들의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용맹은 3차 페르시아 전쟁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라케다이몬 인들에게 전해주시오.
우리가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고 이곳에 누워 있다고."

헤로도토스의 3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상술(詳述)은 그리스인의 영광의 자취이자 최고의 역사적 사료다. 그는 전쟁 기에 벌어진 각 도시국가간의 갈등과 대립,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과 성취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술과 지휘체계, 지도자와 장군들의 전략과 영웅적 활약상 등을 잘 채록하고 있다. 특히 지도자들의 선택과 판단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과 거시적인 식견을 바탕으로 한 협상과 설득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데이비드 자크 루이스 작, 루브르 박물관

『역사』는 고대 그리스와 주변 세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보고다. 포괄하고 있는 영역이 워낙 넓어 여러 영역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분석이 가능한 자료가 산재해 있다. 군사학도는 각 군의 군사력과 전략과 전술, 무기체계 등을 살필 수 있다, 풍속학자는 각국의 성 풍속과 결혼제도를 추출해 볼 수 있다. 지리학자는 당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영토의 한계와 지리적 특성을 살필 수 있다. 외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전쟁기간 동안 벌어진 회유와 교란, 동맹을 이끌어내려는 다양한 외교전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승리의 기록 뿐 아니라 처참한 패배의 기록 또한 풍부하게 담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가의 철두철미한 소명감으로 후세가 반추해야 할 중요한 기록을 최대한 남겼다.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오로지 후세와 독자에게 달렸다. 그리스 역시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초강대국 페르시아를 세 차례나 물리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이후 자만에 빠져 제국주의로 흘렀고 다른 도시국가의 자유를 압박하는 똑같은 과오를 저질렀다. 또 급기야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임으로써 그리스 세계의 몰락을 재촉하지 않았던가.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역사』,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2, 5쇄), 9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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