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11)-책, 인간들이 짐승이 되지 않도록 막는 영약
에밀 파게(1847~1916) 『독서술)』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에밀 파게(Emile Faguet, 1847~1916)는 19세기 후반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활약한 프랑스가 낳은 석학이다. 그는 탁월한 문학평론가이자 문학사가(文學史家)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1923년에 발간된 <독서의 기술(L' Art de Lire)>은 독서의 방법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통찰이 담긴 독서 관련 최초의 고전이다. 

그가 강조하는 첫 번째 독서법은 ‘천천히 읽기’다. 책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천천히 읽으며 음미하라는 것이다. 물론 ‘읽어야 할 책’과 ‘조금도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을 준별해 내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읽어야 할 책’이라면 저자의 사상과 주장을 얼마나 잘 이해하였는지 자문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책의 유형에 따라 독서의 초점이 달라질 수 있다. 사상을 다루는 책들은 ‘천천히 읽기’에 꼭 들어맞는 유형이다. 철학자를 읽기 위해서는 독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철학자의 그것과 끊임없이 대조하고 비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 사상서를 읽을 때는 저자와 토론하듯 주의 깊게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감정을 다루는 책들, 특히 문학작품은 조금 빨리 읽어도 된다. 저자가 그려내는 소설 속의 허구적 인생은 독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저자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감동에 자신을 그대로 맡겨볼 필요가 있다. 이런 ‘자기몰각(自己沒覺)’을 통해 소설 속의 인생에서 새로운 삶의 진실을 맛볼 수 있다. 자기 마음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독서를 하다보면 ‘난삽한 작가’를 만날 수도 있다. 에밀 파게는 “현묘하고도 진귀한 영광을 획득하기 위하여 일부러 난삽한” 작가들이 더러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난해한 작품은 그 내용을 단순하게 만들어 보라고 주문한다. 내용을 거꾸로 만들어 보거나, 부적합한 어구를 적당한 어구로 고쳐 보면 대개 작가가 은닉한 자질구레한 수법을 간파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복잡한 내용을 단순화 시켜 이해하라는 역발상이다. 

에밀 파게는 때때로 ‘좋지 않은 작가’를 읽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통속적이고 졸렬한 책을 읽으며 좋을 책 읽기의 즐거움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졸렬한 책에 대한 증오심을 기르도록”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에밀 파게가 ‘독서의 적’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탁월한 평론가로서의 통찰이 그대로 느껴진다. 책을 제대로 읽고, 유용하게, 보람 있게, 유쾌하게 읽는 것을 방해하는 적은 무엇일까? 독서하는 방해가 되는 적은 외부에 있지 않다. 독자 자신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잘못된 기질이 장애요소다. 자존심, 겁, 열정, 그리고 비평기질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작가에 대한 독자의 질투심도 적이 된다. 모든 저작들은 은연중 저자의 우월감이 배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항상 약간은 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할 때 그의 독자가 되기는 어렵다. 현실의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열정도 독서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독서 취미가 현실의 다양한 유혹과 열정을 제약하는 고리타분한 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그렇다. 

이런 인식은 독서에 대한 용기를 위축시킨다. 바로 ‘겁’이 독서의 적인 것이다. 고전은 어렵다는 잘못된 고정관념도 바로 독서에 ‘겁’먹게 하는 장애요소가 아닐까. 독서에 대해 ‘겁’을 갖게 되면 점점 더 ‘뒤떨어진 독자’가 된다. 

또 하나의 독서의 적은 지나친 비평심이다. 책을 읽으며 비평적 시각을 갖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책이 주는 감동과 설득의 정서에 어느 정도 자신을 내맡길 수 있어야 독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에밀 파게는 “작가에 대한 본능적이고 의식적인 공감에 몸을 맡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자가 시기심이나 조롱적 본능, 적의(敵意)에 빠져 “비평하는 기쁨”에 탐닉할 경우 독서의 기쁨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감동한 후 비평해도 늦지 않다는 의미다. 까다로운 독자가 “자기는 속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신에게 증명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 작품의 진미를 맛볼 기회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에밀 파게는 인간의 비평적 심리의 부작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작가를 읽을 것인가 비평가를 읽을 것인가도 독서가의 또 하나의 고민이 된다. 에밀 파게는 작자 자신을 읽기 전에 절대로 비평가를 먼저 읽지 말라고 주문한다. 나아가 작가에 대한 몇몇 비평을 읽기 전에는 그 작가를 거듭 읽지도 말라고 말한다. 비평가의 비평을 먼저 읽고 얻은 선입견을 가진 상태에서 독서할 경우 독자 고유의 감흥과 판단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거듭 읽기가 중요하지만 비평가들의 다양한 관점의 비평을 확인한 후 그런 관점을 갖고 다시 독서할 경우 그 저작의 내용을 다채롭게 조명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 자신의 협소한 시각으로만 거듭 읽는 것은 똑같은 인상을 거듭 발견하는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독서는 정신적 행복감을 충족시키는 최고의 수단이다. 적절하고 효과적인 독서법은 이런 행복을 더욱 배가시킨다. 천천히 읽고, 거듭 읽을 때 저작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훌륭한 독서가는 저작의 감흥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여유로움과 함께 현실의 삶 못지않게 다양한 인생의 지혜를 보여주는 책을 잡는 용기를 갖춘 사람이다.  

에밀 파게의 말, 음미할수록 그 뜻이 깊게 느껴진다. “책은 인간들이 짐승이 되지 않도록 막는 영약이다.” 하물며 수천 년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고전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 몇 년 간 베스트셀러가 아닌 수천 년 동안 널리 읽힌 스테디셀러인 고전을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독서는 행복으로 가는 또 하나의 지름길이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독서술』, 에밀 파게 지음, 이휘영 옮김, 서문당(1997).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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