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5)-생명과 정신의 시원, 일자(一者)
플로티노스(205년~270년) 『엔네아데스 선집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인간의 육체와 정신세계의 근원은 무엇일까?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 또 다른 세계는 없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특히 그 가운데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줄기차게 붙잡고 고민했던 화두였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0~500년)는 만물의 시원을 1(monas)로 보았다. 1에서 부정(不定)의 2가 생기고, 여기서 점과, 선, 그리고 평면과 입체가 생겨나고, 입체로부터 감각이 되는 만물이 생성된다고 여겼다.  

또 피타고라스는 태양이나 달, 그 밖의 별들이 우주의 생명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열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15?~445?) 역시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탄생이 태양을 원인으로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지구가 구형(球形)이고 우주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앞선 철학자들에 비해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했다. 그는 우주의 세계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물질적 세계와 생각이나 지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비물질적 세계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물질적 세계뿐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정체성을 지닌 ‘형상’, 즉 ‘이데아(Ideas)’로 가득 찬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시적인 것들은 영원한 원형들, 즉 형상의 모상(模像)이다. 그러니 물리적 우주 위에 혹은 그 너머에 비물질적인 실재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곳은 우리의 영혼들이 도피처로 삼을 만한 궁극의 선(善)의 세계이자, 만물의 원천인 ‘하나’, 즉 ‘일자(一者, hen)’가 주관하는 세계일 것이다. 

플라톤 철학을 계승하여 신플라톤주의자로 이름난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는 플라톤과 그 이전 철학자들이 언급한 만물의 원천을 일자의 개념으로 더욱 체계화시켰다. 그의 주저(主著) 『엔네아데스』는 일자 철학을 잘 드러낸다. 그는 우주 만물은 바로 일자로부터 유출한다고 주장했다. 일자란 무엇인가? “일자는 존재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니며, 질적인 것도 아니며, 양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정적인 것도 아니요, 어떤 장소에도 시간 안에도 없으나, 자신에 의해 자신으로 항상 머물러 있으니, 차라리 형상이 따로 없어 모든 형상들에 앞서 존재한다고 하겠으며, 운동 이전에 있고, 정지 이전에 있다 하겠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일자의 관념은 피타고라스가 언급한 하나의 점이나 숫자 1이 지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전한 방식을 의미한다. 일자는 자족적 존재이고, 다른 모든 선(善)들을 능가하는 의미의 선이다. 일자는 만물의 주인인 세계영혼을 가지며, 물질적 변화 곁에서 욕망하는 존재인 개별영혼을 자신의 정신세계로 귀의하도록 견인한다.

이런 맥락에서 플로티노스는 인간 영혼을 이렇게 인도한다. “저편의 세계영혼은 시간을 쫓아 벌어지는 온갖 쾌락에 대해 갖는 유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정작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은 그와 같다.” 이는 가시적 세계의 개별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완전한 불멸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저 너머 정신세계에 있는 영원한 세계영혼과 합일을 이룰 수 있도록 정신을 고양시켜 나가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완전한 삶이란 참된 생명과 실재적인 생명을 저편의 정신적인 본성을 통해서 실현하는 반면에 그 밖의 다른 불완전하고 기껏 생명의 모상에 불과한 것들은 완전하게도 순수하게도 살수 없으며, 나아가 그 반대의 경우를 능가하는 삶도 도저히 영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일자가 주관하는 저편 세계의 선(善)과의 합일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싶다. 

플로티노스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도 플라톤의 영혼불멸을 수용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영혼이 육체에 의존한다는 관념은 거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하여』에서 영혼은 생명의 중요한 원리로써 영양섭취능력, 감각능력, 숙고능력, 그리고 장소운동능력을 갖고 있지만, 영혼이 신체를 떠나면 신체는 사라지고 소멸하고 만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혼이 머무는 실체인 육체의 소멸에 따라 영혼 또한 흩어진다는 것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영혼불멸의 주장과 거리가 있다.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다시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는 오히려 선에서 정신이 생겨났고, 정신으로부터 영혼이 생겨났다고 본 플라톤의 가르침을 계승했다. 그는 영혼이 육체를 이끄는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영혼은 육체 속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육체 그 어느 일부에 속하거나 나아가 육체 아래에 놓이지도 않고, 오히려 육체가 영혼 아래에 놓여 있기에, 이 육체 곁에서는 영혼이 마치 무엇이 되어야만 하거나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 근거를 하나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 고상한 영혼을 육체가 뒤따르도록 가다듬는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영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감각적으로 이미 지각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감각활동을 개진할 경우 비로소 우리 안에 내면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성을 활용하는 영혼의 활동이 사유이다. 사유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정신의 시원이자 원인으로서 신적인 것을 닮아갈 수 있게 된다. 또 자신을 진정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알아보는 사유 행위를 통해 정신이 신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이 일자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존재 원천에 대한 관조와 열망에 힘쓸 때 세계영혼에 다가갈 수 있다. 인간 자신은 ‘저편 세계’의 정신 원천을 품고 있는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일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즉 성부(聖父)를 의미하는 것일까? 플로티노스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그가 활동하던 3세기는 그리스도교가 점차 세력을 넓히고 있을 때였던 만큼 웬만한 철학자라면 그리스도교의 교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고 또 검토했을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단 한 번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침묵은 그가 상정한 일자가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성부를 전제한 것이라기보다는, 플라톤이 설정한 ‘이데아’를 지극히 구체화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플로티노스의 견해들이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 한 것처럼 “그들-신플라톤주의자들-의 가르침에서 몇 마디 말이나 몇 문장만 바꾸면 그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됨을 알게 될” 소지가 충분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플로티노스가 전개한 일자론에서 일자를 성부로 대체해도 그 함의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인이 아닌 상태에서 일자론을 전개한 것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로티노스의 철학의 주요한 논의들에서 큰 영감을 받아 신학적 논리로 편입시키는 데 크게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지점에서 만물의 궁극적 원천으로서의 일자를 뚜렷하게 인식해 낸 플로티노스 철학의 위대한 힘을 만날 수 있다.  

플로티노스가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세계영혼이나 일자에 대해 개진한 것들이 매우 추상적이고 신비주의적 요소를 띠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구나 인간이 이성과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념이기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을 초월하는 영역에 위치한 선(善)이나 일자와의 합일을 지향하도록 인간 영혼의 고양(高揚)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플로티노스의 관념론의 가치는 매우 크다. 인간의 육체적 탐욕을 억제하고 영혼을 가꾸는 덕스러운 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나아가 더 높은 곳의 정신세계에로 몰입하거나 소통하도록 노력하게 함으로써 초월적인 아름다움, 즉 최고선을 향유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는 모두 54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 책은 일부 권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싣고 있어 플로티노스 철학의 전모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하루빨리 완역판이 번역되길 기대한다. 물론 이는 플라톤 전집 43권의 완역에 버금가는 방대한 작업일 것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플로티노스를 읽기 위해서는 우선 몇 안 되는 관련 책들을 보완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을 듯싶다. 우선 화이트비가 지은 『플로티노스의 철학』(누멘 刊))을 함께 읽으면 『엔네아데스』를 개관할 수 있다. 또 54권 중 ‘선 혹은 <하나>에 관하여’, ‘행복에 관하여’ 두 권의 전문을 실고 긴 해설을 붙인 『플로티노스의 <하나>와 행복』(누멘 刊), 그리고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심층적으로 해설한 종합 입문서인 『플로티노스 엔네아데스 입문』(탐구사 刊)을 더불어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이 세 책 가운데 한두 권을 꼭 함께 일독하기를 권한다./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엔네아데스 선집』, 플로티노스 지음, 조규홍 옮김, 누멘(2009),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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