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24)-비극, 디오니소스의 열정과 카타르시스의 힘
니체(1844~1900) 『비극의 탄생』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인류가 낳은 세계 4대 비극 작가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셰익스피어(1564~1616)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활약했던 영국의 셰익스피어를 빼면, 모두 2300년 이전에 활동하던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다.  

왜 이들이 인류가 낳은 최고의 비극작가의 반열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것일까. 왜 이들을 뛰어넘는 탁월한 비극작가가 더 이상 탄생하지 못하는 것일까.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연극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이들 세 명의 그리스 작가들에게서 나왔다. 그만큼 이들의 작품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보편적 감동요소를 갖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 비극은 어떻게 탄생했고 그 근원적 힘은 어떤 것일까.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그리스 비극이 담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염세주의적 경향과 이를 극복해내는 원초적 힘을 조명했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그리스 정신의 총화로 보았다.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두 신의 갈등과 조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 비극은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혼합과 변용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아폴론 신은 이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모든 균형 잡힌 아름다운 형상들에 대응한다. 따라서 미학적 형상을 추구하는 조형예술은 대표적으로 '아폴론적인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인간으로써 올림포스 12신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신이다. 그는 주신(酒神)으로서 인간들에게 도취와 광란을 통해 삶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신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별화된 인간의 근저에 있는 본능을 일깨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별을 없애주는 합일과 도취의 힘이다. 디오니소스적 힘의 근저에는 음악이 있다. 디오니소스 찬가를 통해 숭배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듯, 음악은 개별화된 인간들을 보편적 쾌감과 도취로 묶어주는 필수적 수단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디오니소스 찬가로부터 탄생하게 되었다고 본다. 아폴론적 예술 충동이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를 탄생시켰다면, 디오니소스 축제 때 불렀던 찬가 디튀람보스(Dithyrambus)의 음악과 춤에 희극적 대사가 어울려 비극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후 그리스 비극은 체계적 형식을 갖춘 극으로 발달한다. 비극은 배우들의 대사와 합창단의 노래로 구성되었다. 다만 현존하는 비극 작품만으로는 당시의 비극 공연에 음악이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연주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니체는 "비극은 비극 합창단으로부터 발생했으며,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이고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합창단의 성악이 기악의 음악적 기능 이상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니체는 합창단을 단순한 성악적 기능자 이상으로 관중들의 정화이자 진수, 즉 '이상적 관객'으로 본다. 민중 가운데 뽑힌 합창단은 신들의 이야기를 연기하는 무대 위의 공연자들을 신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느끼는 합일을 경험한다. 한편으론 무대 위의 인물들과 관객을 관조하는 또 다른 관객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합창은 '이상적 관객'으로서의 도덕적 지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합창단에 의해 비극적 서사가 더 큰 고통으로 확대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관객들은 합창의 장엄한 노래에 의해 강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위로를 받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합창은 무대 위와 무대 아래를 하나의 정서로 소통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음악이 참여자들을 합일과 도취로 이끄는 방식과 비슷하게 말이다. 니체가 합창단을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자기반영'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싶다.  

디오니소스적 양태와 감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비극의 합창보다 사티로스 합창단이다. 인간의 형상과 동물적 본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티로스의 거칠 것 없는 행태는 인간의 억눌린 본능일 수도 있다.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대중이 떠올리는 환영이며, 무대 위의 세계는 사티로스 합창단이 떠올리는 환영이다." 사티로스로 분장한 합창단은 점잖은 관객을 무시하며, 디오니소스 신자들이 광란의 몸짓으로 들과 산골짜기를 쏘다니듯 열광적 대사와 노래를 합창한다. 관객은 사티로스를 통해 잠재된 자신을 보게 되고, 합일의 도취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비극의 합창단이 만들어 내는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흥분이 그리스 비극의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비극의 합창은 디오니소스적 열광 속에서 합일되는 배우와 합창단, 관객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환영이다. 이때 합창단은 디오니소스적으로 흥분된 대중 전체의 상징이 된다. 비극의 카타르시스 효과도 여기서 발생한다. 이런 차원에서 니체는 아폴론적 가수 개인의 거대한 고양에 지나지 않는 합창 서정시와 비극의 합창이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적 형상 세계 속에 항상 새롭게 거듭해서 자신을 방출하는 디오니소스적 합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비극의 합창단의 기능과 상징에 대한 니체의 통찰을 절실하게 느끼려면 우리는 고대의 비극 합창이 울려 퍼지던 원형극장의 한 관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근대인이나 현대인이 그리스 비극 합창의 재현을 체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대 그리스인들이 느꼈을 디오니소스적 감흥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음악적 기능을 크게 중시했다. 그는 남성적인 절제미를 상징하는 아폴론적 특징과 여성적인 감성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적 특질이 서로 대립과 조화를 통해 그리스 비극의 예술성을 고양시켰다고 보았다. 이런 조화와 균형이 깨지는 순간 비극의 근원적 힘은 파괴되고 만다. 니체가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로 대변되는 지성주의, 주지적 경향이 비극에 혼입됨으로써 비극이 소멸되고 말았다고 질타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술세계에서 지성적인 말과 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능적 충동과 도취에 의해 환영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이다. 이를 고양시키는 것은 단연코 디오니소스적인 것들이다. 특히 신화와 음악적 요소다. 이런 것들을 경시하거나 배제하는 비극은 관객들에게 형이상학적 위로나 카타르시스를 주기 어렵다. 니체가 "음악의 영혼이 비극에서 사라져 버리자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은 죽어 버렸다"고 지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통찰에서 이 책이 단순히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술 철학적 담론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이론적 낙천주의자의 원형으로 보았다. 세계와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인식의 욕구는 예술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비극의 말기 작가 에우리피데스에게 이런 부정적 영향을 끼쳐 비극의 쇠퇴를 촉진시켰다는 혐의를 두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그리스 비극에 예술에 적대적인 지성주의를 혼입시켰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에 비해 전통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이를 비극의 서사에 반영했던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코칭이나 영향을 받았을 것을 암시하는 부분적 전거들을 거론하고 있다.

아무튼 니체는 그리스 비극은 종합예술로서의 음악극의 원형이자 예술적 미학의 총화로 예찬한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 비극의 근저에 디오니소스적 힘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확신했다. 그리스 신화의 힘을 비극에 가장 잘 녹아들게 만들 수 있는 요소 또한 디오니소스적 힘이었을 것이다.  

니체의 인식은 분명했다. "음악과 신화는 똑같이 어떤 민족의 디오니소스적 능력의 표현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양자는 아폴론적인 것의 피안에 놓여 있는 예술영역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차원에서 "디오뉘소스적 요소를 비극으로부터 제거하고 비극을 순수하면서도 새롭게 비디오뉘소스적 예술"을 지향했던 에우리피데스를 비극의 쇠락을 부른 주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니체는 연극에서 디오뉘소스적인 신비를 제거하면 오로지 '극화된 서사시'만 남게 되고, 이럴 경우 비극적 효과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는 프롤로그(prolog)를 통해 한 사람이 무대에 나와 자신이 누구인지, 작품이 어떻게 전개될지 를 미리 이야기함으로써 극적인 긴장 효과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의 경우 작품 이해에 필요한 실마리를 최초의 여러 장면을 통해 암시하기 위해 재치 있는 기교를 사용하는 것과 대비된다. 니체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서사시적 조망 사이에 극적-서정적 현재, 본래의 '연극'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프롤로그에서 서사를 통해 비극의 진행 방향을 미리 관객에게 보장하고 나아가 신화의 실재성에 대한 모든 의혹을 제거하는 역할까지 수행케 함으로써 극적 효과와 신화적 요소를 축소시켰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뉘소스적 음악정신에서 탄생했고, 신화적 정신이 투영되었을 때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 니체는 음악을 서사가 대체하고 신화가 제거될 때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반감될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신화를 형성하는 음악정신이 충일했던 그리스 비극의 시대를 동경했다. 니체는 이러한 그리스 비극의 위대성을 현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음악성을 바그너의 음악이 부활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 비극의 재탄생을 희구했다. 아폴론적이면서 동시에 디오니소스적인 그리스 비극의 신비스런 힘을 부활시킬 수 있다면, 독일 민족에 잠재되어 있는 고귀한 핵심을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그리스 비극의 근원적 힘이 부활될 가능성을 보았다. 니체가 28세의 젊은 열정으로 쓴 이 책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헌정한 것도 그리스 비극의 부활을 보여주는 바그너 음악에 대한 예찬의 일환이다. 니체는 황폐하고 지쳐 버린 당대의 독일 문화에 그리스 비극의 원초적 힘과 같은 활력을 불어넣어줄 예술적 창조를 희구했다. 그는 "민족생활 전체를 자극하고 정신과 내면을 발산시키는 비극의 거대한 힘을" 그리스 비극에서 얻으려 했다. 그 비극을 횡단했던 음악의 본질적 기능이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부활되길 소망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 비극 정신의 회복을 주창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비극의 탄생』,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아카넷(2012, 5쇄),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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