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역사 무장투쟁에만 초점…균형 잃고 기울어진 역사관 아쉬워
   
▲ 여명 자유경제원 연구원
독립운동의 재인식

영화 <암살> 그리고 지워진 한사람

이른바 ‘광복 70주년’ 의 바람을 타고 영화 <암살>이 작년 한 해 큰 흥행 성적을 거뒀다. 영화는 1933년 상하이와 서울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과 임시정부 대원, 그리고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필자 역시 재밌게 관람한 영화다. 영화판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임을 잘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서운하고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광복 70주년 바람을 타고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에, 이승만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혹자는 ‘영화의 배경이 상해랑 서울이여서 그렇지!’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암살> 속 히로인들은 당시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의 영향력하에 있었고 김구 선생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상해 임시정부 역시 단 한차례 등장하지만 극의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줄기다. 

거사를 치를 열사들이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하자 김구 주석은 몸소 허름한 임시정부를 구경시켜준다. 빛바랜 태극기를 중심으로 왼쪽에 행정부가 있고 오른쪽에는 사법부가 있다. 타이핑 치는 직원을 가리키며 김구 선생이 호탕하게 말한다. “아, 저건 입법부야!”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은 왠지모를 감동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한국인이라면. 나는 서러웠다.

자유의사로 만든 영화를, 팝콘과 콜라를 빨며 볼 수 있게 한 사람, 먼 타지에서 자유와 민주 그리고 공화의 이념으로 새 나라의 틀을 설계한 사람, 조선인이 교육만 받으면 근대민족국가의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그러니까 독립할 능력이 된다고 치열하게 외국에 호소한 사람, 이승만은 없었던 것이다.

영화 <암살>은 우리 잘못된 근현대사 교과서가 그러하듯 독립 운동은 무장투쟁만이 옳았고 효력이 있었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할 수 있었다는 상식을 답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외교 독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은 보편적 역사인식에 바탕한 방식이다.

   
▲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모두 독립국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조금 더 민족주의자였던 김구 선생과 공산주의의 해악을 먼저 깨달은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통일에 대한 이견이 커지긴 했으나 두사람의 지향점은 같았다./사진=연합뉴스


이승만과 하와이

작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매해 열리는 이승만 대통령 서거 추모 행사에 대학생 대표로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서거일 전에 하와이 오하우 섬 일대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 독립운동 유적지들을 한인들이 팔아치운 이야기는 이 토론문에서는 차치하겠다.

청년 이승만이 하와이에 발을 디딘 후 처음 거주하던 터전 일대. 뒤로는 첩첩산중이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있다. 관광지로는 그만인 곳이지만 거주지로는 막막한 공간이다. 독립운동기지로서는 더더욱 허망한 곳이다. 이 너무나도 이국적인 이곳에서 이국의 꽃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내 마음을 자주 미어지게 했었다.

하와이 한인동포사회의 지도자가된 이승만은 이후 학교를 설립하고, <한국교회 핍박>을 집필하여 일본의 기만성을 폭로했으며. 한인들에게 독립정신과 계몽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다. 독립운동 기금을 모아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특히 미국의 협력자들과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하와이 동지회관을 매각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들이 모금한 기금을 기부 받아 인천에 인하공대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가 합쳐져 지금의 인하대학교가 만들어졌다. 

이승만 박사가 독립운동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교육’이다. 청년 이승만은 한인의 교육에 독립의 길이 있다고 봤다. 평범한 리더는 국민성을 나무란다. 탁월한 리더는 국민의 부족함을 아파하고,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주며, 사랑한다는 것을 하와이에서 깨달았다. 

이승만과 김구, 방법은 달랐으나 목적지는 같아  

대개 많은 한국인들이 오해하는 것은 해방=독립=건국이다. 그러나 세 개념은 다르다. 해방은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수동적 개념이다. 독립은 한 민족이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 보인다는 개념이다. 건국은 영토·주권·국민의 세 조건을 갖추고 이데올로그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를 가진 한 국가의 탄생을 뜻한다. 해방 이후 100년도 훨씬 안됐건만 격동의 현대사와 이념논쟁을 겪으며 명확했던 사실들마저 혼탁해져있다.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두 사람은 어느 한쪽이 더했다 덜했다 할 것 없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자 김구는 무장투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장투쟁의 방식은 국제사회에 호소력이 적었다. 일본군을 몰아낼 가능성은 더더욱 적었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은 해군의 경우 ‘그 미국’이 두려워할 정도였으니까. 더군다나 한인들의 무장투쟁은 1930년대 이후로는 소멸에 가까웠다.

   
▲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기린다고 해서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역사가 평가절하 되지 않는다. 후세대인 우리가 역사를 바로보고, 현명해져야 한다./사진=연합뉴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근대의 독립은 ‘근대시민국가를 건설할 능력을 입증’ 해보여야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내린 답은 실력양성과 외교투쟁이었다. 그래서 한인 계몽에 힘썼고 스스로도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해 박사를 했다. 민족자결주의1)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승만의 지도교수였다. 일본이 서양에 그저 ‘친절한 동양인 친구’가 아닌, ‘민주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민족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싸웠다.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모두 독립국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조금 더 민족주의자였던 김구 선생과 공산주의의 해악을 먼저 깨달은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통일에 대한 이견이 커지긴 했으나 두사람의 지향점은 같았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공화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숨 쉬듯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의 틀을 설계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명확하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기린다고 해서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역사가 평가절하 되지 않는다. 후세대인 우리가 역사를 바로보고, 현명해져야 한다. /여명 자유경제원 연구원

1)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


(이 글은 24일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쳥년 이승만과 김구를 말하다' 토론회에서 패널로 나선 여명 자유경제원 연구원이 발표한 토론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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