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민중가요의 매력에 빠져 진실이 보이면 이불킥할 좌파 학생들
   
▲ 윤서인 만화가
황성준님의 '너무 멀리 돌아온 길' 발제문을 들으면서 마치 내 얘기를 하는 듯 콧등이 시큰해진다. 내 20대 시절은 황성준님처럼 그렇게 치열하지는 않은 하나의 생활 밀착형(?) 좌파였다. 발표문을 듣는 동안 귀에 맴돌던 노래 한 곡을 소개하면서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갈꺼야 나도 갈꺼야 꿈속에서가 아냐 이제는 진짜 갈꺼야 분단의 벽을 넘어 
통일의 열차타고 가는 길에 남북 합의서를 손에 손에 들고 
지긋 지긋 지긋 분단독재 국가보안법 끝장내고 
감옥 문을 활짝 열고 우리 동지 찾아서 두손 맞잡고 가는 길에 칠천만 만나보자”

1993년 2월 강원도 코레스코 콘도 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신입생 OT현장.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2학년 최모 선배형에게 노래와 율동을 배우고 있었다. 편안한 가정에서 자라 남중, 남고를 나와 바로 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바리 백짓장과도 같은 신입생 그 자체였다. 그런 나에게 신입생 OT는 한꺼번에 쏟아진 문화충격이자 어마어마한 별천지 세상이었다.

내 옆의 예쁜 동기 백모양. 와 여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네 두근두근. 심지어 율동을 하기 위해 손을 잡으라는 것 아닌가. 으앗 내 손에 땀이라도 나면 어쩌지;; 미칠 듯한 두근거림으로 그 보들보들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데 여학생 손을 잡아서 어지러운 건지, 빙빙 돌아서 어지러운 건지 아무튼 묘한 자극과 행복감에 헬레레 완전히 정신을 못차렸다. 

그러면서 무한반복 따라 불렀던 노래가 바로 저 <갈꺼야>라는 노래였다. 너무나 친절한 선배들, 예쁜 동기들, 다정한 사람들 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생전 처음으로 술까지 마시는 환상적인 상황에서 지금 보면 기겁할 가사로 이루어진 저 노래가 그때는 어찌나 아름답게 들리던지. 난 마치 모차르트의 자장가를 듣는 아가처럼 민중가요에 천천히 젖어 들어갔다. 생전 처음 보는 따뜻한 환대와 신나는 노래, 그리고 이어지는 가슴을 울리는 처절한 노래들과 사상 교육들. 난 그것들을 단계적으로 차곡차곡 겪으면서 소위말하는 '좌파'가 됐다.

   
▲ 좌파에서 벗어난 후 내 인생은 전혀 달라졌다. 우파 성향을 드러내면서 친구도 떠나고, 왕따도 당하고, 사는 건 많이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된 즐거움이 워낙 크기에 이 정도 슬픔은 견디고도 남는다./사진=연합뉴스


민중가요의 매력

이제 23년이 흐른 2016년 겨울,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인터넷에서 내 별명이 <윤적윤>이다. ‘윤서인의 적은 윤서인’이라는 말로서 그때그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다. 그래 맞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그때의 나를 만나면 아마 대판 싸울 것 같다. 이 글을 적으면서 오랜만에 찾아본 <갈꺼야> 2절 가사... 와 이 노래가 이런 노래였구나. 나는 또 한 번 그때와는 다른 큰 충격을 받는다. 

“갈꺼야 나도 갈꺼야 꿈속에서가 아냐 이제는 진짜 갈꺼야 분단의 벽을 넘어 
통일열차 타고 가는 길에 양코뱅이들을 한줄로 엮어서 
지긋 지긋 지긋 제국주의 내정 간섭을 끝장내고 삼팔선을 활짝 열고 우리형제들 찾아서 
두 손 맞잡고 가는 길에 칠천만 만나보자” 

<갈꺼야>는 '조국과 청춘' 이라는 서총련 노래패가 부른 노래다. 이들은 여럿이 노래하는 집단을 '노래패' 라고 부른다. 박노해라는 민중가요 전문 시인이 만든 노래로서 조국과 청춘 & 박노해 콤비는 아래의 '사랑' 같은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도 만들었다. 당시 난 이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르며 울컥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업무 중에 즐겨 듣는 멋진 노래다.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 몸부림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투쟁 쉼없이 가야할 새날을 향한 눈부신 길이네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 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여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 

좌파의 노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들어라 양키야>나 <갈꺼야> 같은 노골적으로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노래부터 <민들레처럼> <전화카드 한 장>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같은 보들보들한 일상적인 감성 노래까지. 소프트하게 다가가 점점 하드하게 좌파 전사로 만들 수 있는 코스요리와도 같다. 평소엔 감성적인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같은 소프트한 노래를 듣다가 뭔가 피가 끓는 집회나 단체행동 시에는 <전대협 진군가> <임을 향한 행진곡>같은 씩씩하고 흥분되는 노래를 부른다. 당시 순진한 신입생들은 이들의 멋스러움과 정의로움, 따뜻한 감성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모두가 힘들잖아요
해방의 그 날 위해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잖아요.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나의 동지랍니다.

우리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때로는 모진 시련에 좌절도 하겠지만
우리의 동지들과 함께 라면 두렵지 않아
노동 해방 세상 그날까지 원! 투! 원투!쓰리포!”

이런 곡은 '동지'를 '친구' 로 개사해 널리 대중적으로 불려졌다. 이런 게 이들의 무서운 점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짜 의미를 잘 모른 채 남녀노소 너무나 편하게 부르며 사회 곳곳에 은근한 좌파심리를 심는다. 

필자가 꼽는 모든 민중가요 중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노래는 노래마을이 부른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따뜻한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이라는 긴 제목의 노래다. 가사를 잘 보자.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따뜻한 햇볕 한줌 될 수 있다면
어둠산천 타오르는 작은 횃불 하나될 수 있다면
우리의 노래가 이 잠든 땅에 북소리처럼 울려날 수 있다면
침묵산천 솟구쳐 오를 큰 함성 하나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 

하늘 첫 마을부터 땅 끝 마을까지 무너진 집터에서 저 공장 뜰까지
아아 사람의 노래 평화의 노래 큰 강물로 흐를 그날 그날엔
이름 없는 꽃들 다 이름을 얻고 움츠린 어깨들 다 펴겠네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아침을 맞겠네

그 날이오면 그 날이오면 모두 하나될 그 날이오면
얼싸안고 춤을 추겠네 한판 대동의 춤을 추겠네”

여기서 말하는 '그날'이 장군님 오시는 적화 통일의 그날이라는 것은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되고 배신감(?)에 얼마나 놀랐는지.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부르다가 후렴구에 딱 여성 파트가 높은 음으로 치고 나오는 부분은 진짜 가슴이 두근거린다. 정말 한 판 대동의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는 노래다. 노래와 좌파는 뗼레야 뗄 수가 없다. 세력에 가입시키고, 물들이고, 결집시키고, 추억을 회상케 하는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이들의 민중가요인 것 같다.

나는 좌파였다

열 아홉 대학 입학과 함께 시작된 좌파인생은 내 삶의 곳곳에 파고들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게 괴롭거나 힘든 게 아니라 너무나 행복하고 뜨겁게 피 끓는 즐거움이라는 점이다. 20대에는 청춘과 함께하는 너무나 아름답고 정의롭게 소비되는 컨텐츠로, 마흔이 된 지금은 가슴 따뜻해지는 추억으로 내 인생 곳곳에 남아 흐르고 있다. 지금은 비록 머리는 좌파에서 빠져나왔지만 추억이 주는 아련함과 강력한 최면으로 가슴만큼은 아직도 민중가요를 듣게 만든다. 

건국대는 한총련에서도 '동총련'에 소속된 학교였다. 동총련의 상징은 폭주 기관차. 난 그림을 잘 그렸기에 대자보도 쓰고, 벳지도 만들고, 폭주 기관차가 들어간 티셔츠 디자인도 했다. 내가 만든 대자보나 플랭카드가 걸리는 날은 그 두근거림이 말도 못한다. 형과 누나들이 인정해주고, 내가 만든 벳지를 다들 달고 시위에 나가는 기쁨은 지금 어떤 온라인 게임에서 끝판 왕을 깨도 못느낄 정도의 희열이었다.

   
▲ 내 즐거움을 지금의 청춘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멍하니 휨쓸려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일찍부터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명감이랄까, 아니면 더 좋은 걸로 안내하고 싶은 욕망이랄까. 난 좌파 매트릭스에서 나온 후 피곤해지긴 해도 나온 걸 후회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못 봤다./사진=자유경제원 자료집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


그때 학생회엔 예쁜 여자아이도 있었다. 시위에 함께 나가서 구호도 외치고, 같이 밥도 먹고, 늦게까지 노천극장에 앉아 노래도 부르는 두근거림. 수업 비는 시간과 방과 후 돈도 없고 딱히 갈 데도 없는 학생들은 그냥 노래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학생회실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학생회실엔 그야말로 생활 속의 각종 즐거움이 있었다. 

그렇게 청춘들이 노래하며 어울리다보니 당연히 각종 염문도 속출했다. 서로 사귀고 헤어지고 그랬대 저랬대 썸타는(?) 이야기들이 항상 흥미롭게 오갔다. 뭔가 주체적인 인생? 나만의 성적 자기 결정권? 같은 인식도 은근히 있어 일반 대학생들 보다 더 당당하고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 좌파 생활은 남녀 교류의 장으로서의 역할도 했던 것 같다.

학생 좌파들에게서 발견하는 재미난 점은 그들만의 엄청난 계급의식이다. 계급을 타파해야 한다고 그렇게 입만 열면 부르짖는 단체의 계급 체계는 무슨 군대 특수부대 뺨치게 체계적이고 치밀했다. 무슨 부장, 선전 국장, 지부장 등등 감투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권력 서열에 따른 위계질서와 조직이 아주 철저하게 돌아갔고 그 와중에 조직 간의 갈등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큰 학생회비와 협찬비 등을 주무르는 권력의 가장 중심인 총학생회장은 약간 사람이 아니라 전설의 신처럼 회자되었다. 경찰에 수배가 되었다더라, 어디다 폭탄을 던졌다더라, 몇 천 명을 지휘했다더라, 신출귀몰 하다더라 등등 이런 도시 전설스러운 무용담이 덧씌워지며 오오오~ 다들 존경의 눈이 되었다. 여학우들은 총학생회장을 한번 보려고 발을 동동 굴렀다. 특히 그때 총학생회장이 꽤 잘생겨서 그야말로 꽃보다 남자처럼 여후배들을 거느리고 다녔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상교육은 그렇게 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선배들이 가끔씩 우리를 앉혀 놓고 5.18이나 독재정권의 부당함, 북한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설명해주는 정도였다. 무슨 책자에서 임수경 사진을 보는데 그때는 그녀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냥 생활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화와 노래, 술과 함께 사상이 스며들었다.

   
▲ 그들에게 욕을 먹어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게 된다. 나에게 돌을 던지는 친구들 중에는 젊은 시절의 내가 있다. 난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천천히 진실을 말해주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내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 이게 내 인생이다./사진=자유경제원 자료집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

내 좌파생활의 하이라이트는 농활이었다. 여름방학 후 전라북도 김제로 열흘간 농활을 떠났다. 동총련 깃발을 들고 일단 김제시청(?) 앞에서 집회를 한 후 각자 마을로 이동해 농활을 하는 식이었다. 그때 열흘 동안 느낀 우리쌀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 시골 아이들과의 교류, 정, 밤에는 사상교육, 마지막 농활이 끝나는 날 울고불고 그 강렬한 경험. 마무리 집회를 하고 집에 돌아온 이후 더 강해진 내 사상을 바탕으로 김영삼 정권 퇴진 운동과 쌀수입 반대 시위 등등 거리 시위에 더 자연스럽게 더 열심히 참여했다.

자꾸 하다 보니까 점점 자연스러워 진다. 내가 특별히 뭔가 비장하게 시위를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생활 속의 시위가 됐다. 구호를 외치며 뻗는 손동작도 점점 자연스러워 지고, 노래도 이제 다 알아서 척척 부르게 된다. 그냥 시위장에 앉아서 옆 친구와 사는 얘기도 하고, 연애 상담도 하고, 학업 걱정도 하는 그냥 당연한 생활이 되었다. 나중엔 내가 운동권에 관심이 없는 친구를 한번 나와 보라고 설득도 하게 되더라.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된 30대 

이불을 뻥뻥 찰 정도로 부끄러운 대학생활이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 때 경험한 것들이 지금 그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난 지금 20대 철부지 좌파 학생을 봐도 절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는다.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좌파는 절대 다수, 특히 젊을수록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그냥 따뜻한 가슴으로, 친구간의 정으로, 근본 없는 정의감으로, 막연한 판타지로 좌파소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과 윽박지르거나 논리로 밟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유주의는 너그러움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들을 너그럽게 대했으면 좋겠다. 실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진실을 이야기해줄수록 거기서 더 빠져나오기 쉬워진다. 

사실 개인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저들이 그러든가 말든가 나몰라라 살아도 상관은 없지만 젊은 청춘들이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너무 슬픈 일 아닌가. 그래도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좀 꺼내줘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종의 도구의 삶에서 구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묘한 의무감이나 사명감이 생기는 걸 어떡해. 난 진실이 보이는데 어떻게 외면해.

좌파에서 벗어난 후 내 인생은 전혀 달라졌다. 우파 성향을 드러내면서 친구도 떠나고, 왕따도 당하고, 사는 건 많이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된 즐거움이 워낙 크기에 이 정도 슬픔은 견디고도 남는다. 떠나간 인연만큼 새로운 인연도 생겼고, 매사에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머리로 판단하게 됐으며,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됐고, 부정 보다는 긍정의 사고를 하게 됐으며, 남 탓 보다는 내가 노력하고 내가 성취하게 되었다. 아 좀 더 일찍 벗어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게 너무나 감사하다. 1분 1초도 남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된 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 즐거움을 지금의 청춘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멍하니 휨쓸려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일찍부터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명감이랄까, 아니면 더 좋은 걸로 안내하고 싶은 욕망이랄까. 난 좌파 매트릭스에서 나온 후 피곤해지긴 해도 나온 걸 후회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못 봤다. 그래서 그들에게 욕을 먹어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게 된다. 나에게 돌을 던지는 친구들 중에는 젊은 시절의 내가 있다. 난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천천히 진실을 말해주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내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 이게 내 인생이다. /윤서인 만화가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리버티홀에서 24일 주최한 '나는 좌파였다' 제2차 연속세미나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2 : 이 시대 청년에게 주는 고언>에서 윤서인 만화가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윤서인]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