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적 미래·사회적 협력 자유…임금·고용 유연할수록 다양하고 많은 일자리 생겨
   
▲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노동

우리는 흔히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무인도에나 가서 살면 좋겠다”고 한다. 바쁜 일상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리라. 여기서 떠올리는 무인도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완비한 자연 속의 휴양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가 표착한 무인도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자연 그 자체다. 헐벗고 궁핍하다는 뜻이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의식주를 혼자 다 마련해야 했고 그 과정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야 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어1)

비바람과 동물의 습격에서 자신을 보호할 오두막집을 짓고, 수렵과 채집을 통해 먹을거리를 구하며, 염소를 기르고 농사를 짓는 등 자급자족적 경제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야말로 과거로 돌아간 원시적인 생활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혼자 힘으로 하려니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빠듯했다.

요즘 우리의 삶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달프고 궁핍한 생활이었다. 오로지 생존에만 집중할 뿐 문명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무인도의 삶이 동물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외롭고도 궁색한 생활은 자급자족의 1인 경제의 한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가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이루는 교환의 경제가 있었던 덕분이다. 각자가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를 다른 사람과 교환하면서 풍요와 번영을 이끌어냈고,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을 토대로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문명이 발달하고 개개인의 생산 능력이 향상되면서 경제 규모는 더욱더 확대되고 개인의 삶 역시 윤택해질 수 있었다. 이처럼 경제와 문명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발전을 이끌어 왔고, 그 밑바탕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하는 사회가 있었다.

단적으로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탈출하기 위해 뗏목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자.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못질하며 무려 42일이라는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뗏목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만약 힘이 세고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더 있었더라면? 로빈슨 크루소와 함께 뗏목을 만들었다면 훨씬 수월하고 빠르게 뗏목을 완성할 수 있었을 터. 혼자 끙끙거리며 간신히 뗏목을 만들고, 다시 인간 사회를 향해 무인도를 탈출하는 로빈슨 크루소는 ‘인간은 결코 혼자서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절박한 메시지의 표상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이런 발전을 물질문명이라고 부르면서 산업혁명 이전의 원시적 삶을 정신적인 것으로 동경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사실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차원에서 제기되지만 이런 주장의 실제적 내용은 결국 노동 분업을 철폐하라고 요구하는 셈이 된다. 노동 분업의 철폐 주장은 단순히 지금보다 약간 낮은 수준의 생활을 누리면서 노동 분업에서 야기되는 부정적 측면을 제거하자는 정도의 주장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인구의 절반 이상을 없애자는 것과 같은 과격한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루소식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은 실은 비인간적인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지금의 문명과 인구를 가능하게 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지 않은 채 이런 ‘낭만적인’ 철없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2)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이유는 소비를 하기 위함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자급자족 할 때 이 사실이 가장 분명해진다. 그가 식량을 만들건 집을 짓건 배를 만들 건 궁극적 목적은 소비에 있다. 물론 쓸모도 없는 데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땅도 파고 나무도 벨 수 있을 테지만, 대부분의 경우 생산은 소비를 위한 것이고, 그것이 당연하다. 쓰지도 않을 것을 만들어낸다면 시간과 노력과 자원의 낭비일 뿐이다. 그만큼 몸은 힘들고 다른 유용한 것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 일을 되풀이하다 보면 생활은 점점 더 피폐해진다.”3)

   
▲ 일하고 싶은 사람과 사람을 쓰고 싶어 하는 사회적 협력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임금과 고용이 유연해 질수록 더 다양하고 많은 일자리가 가능해 질 것이다./사진=연합뉴스


잘하는 일을 할 것인가, 좋아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즐겁다. 보통 좋아 하는 일은 취미가 되기도 하고 직업이 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사회에서 잘 한다고 평가 받을 수 있는 일이 지속 가능하다. 그 대가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 잘 하는 분야에 집중하고, 시장을 통해 거래하다보면 자연히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 자본주의가 발달한다는 것은 이러한 거래가 활성화되고 더 많은 분업이 일어나면서 생산성이 올라간 결과인 셈이다.

이러한 분업은 누가 어떤 분야에서 더 잘 할 수 있느냐를 알려주는 경쟁을 불가피하게 불러온다. 추신수, 이대호, 오승환 등은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다. 치열한 주전경쟁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만약 이들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공을 던지고 치는 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노력은 개인의 성공뿐만 아니라 사회의 이익까지 가져다준다.

생산한 것 보다 더 많이 소비할 수는 없다. 자동차를 생산한 범위 내에서 소비자가 살 수 있다. 쌀을 생산했으면, 그 만큼을 소비할 수 있다. 그래서 똑 같은 상황이라면, 이왕이면 더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더 많이 쓸 수 있기 때문에 생산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 혼자서 연필을 만들려고 한다면 너무도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나무도 심어서 길러야 하고, 흑연을 캐러 광산도 개발해야 한다. 연필 끝에 붙일 지우개를 만들어야 하고, 지우개를 감쌀 철을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분업을 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잘 자라는 곳에서 나무를 잘 길러 공급하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광산에서 양질의 흑연을 캘 것인가를 고민하면 된다. 지우개와 철도 그 분야에서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경쟁하면서 더 좋은 품질의 연필을 만드는 것에 기여하게 된다.

서로 돕고 사는 세상

사람은 서로 돕는 과정을 통해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일을 하면서 서로 돕고 자신의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성과물을 교환하는 행위를 통해 서로 돕고 하는 것이 경제성장의 과정이었다. 자급자족처럼 단순히 나만을 위한 일을 하는 것보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한다는 믿음이 바탕을 이루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협업의 공동체이며 협력체라고 불렸다.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일을 하고 또한 남을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노동 방식을 개선해 나갔고 그 가치를 높였다. 노예노동이나 권력에 종속된 노동의 방식에서 벗어나 계약노동, 자유노동으로 변화하였다. 즉, 노동은 점차 자발적이고 자기 주도적 형태로 발전하였다. 단순한 노동 투입방식에서 자존감과 인센티브를 중심으로 노동의 질적 내용이 개선된 것이다.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은 세분화되었고 본격적인 분업의 시대가 열렸다. 실제로 대규모 공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면서 분업화된 노동을 통해 생산성은 크게 증가했다. 미국으로 옮겨간 산업혁명의 물결은 대량생산에 의한 대량소비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에 노동의 생산성은 급격히 높아졌고 대규모 공장과 대도시의 출현, 다양한 직업, 풍요로운 소비 등이 현실화 되었다.

포드는 그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동화를 실시하려면 공정에서 조립하는데 문제가 없어야 하고, 그러려면 부품의 표준화가 요구된다. 서로 다른 부품을 나누어 생산하는 분업화도 필요하다. 그는 표준화, 분업화 및 자동화 적용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하였다.

포디즘과 노동 소외 4) 

사회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는 ‘노동 소외’라는 개념을 즐겨 썼다. 이 개념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과정을 통제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자신이 받는 경제적 보상으로는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을 소유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이 투여된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벌이로 자신이 만든 물건을 갖지 못한다고 할 때 느껴지는 박탈감은 매우 클 것이다. 사회주의가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서 공감을 얻어낸 이유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마르크스의 노동 소외 개념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그는 자기 회사의 자동차를 자기 회사의 노동자들이 갖게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는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따 ‘포디즘’이라고 불리게 될, 매우 혁신적인 생산 체계를 고안했다. 포디즘은 간단히 말하면 컨베이어 벨트로 길게 이어진 대규모의 자동차 조립, 생산 라인이다. 

효율적인 생산 체계를 구현하기 위해 고심하던 포드는 당시 미국 최대의 우편 회사에서 물류 체계를, 시카고의 거대한 도축장에서 라인 생산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포디즘은 포드 공장의 노동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완성된 자동차가 공장 안에서 밖으로 그야말로 물 흐르듯 튀어나왔다. 포드의 대표작인 ‘T형 자동차’는 한 대를 만드는 데 원래 750분이 걸렸으나 컨베이어 벨트에 올린 뒤부턴 93분으로 제작 기간이 크게 단축됐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컨베이어 벨트는 지금은 전 세계 어느 공장을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장치였다.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자 차의 가격도 그만큼 낮아졌다. 포드가 1908년 최초의 T형 자동차를 세상에 내놓을 무렵, 다른 회사의 자동차 값은 평균 2,000달러였다. 포드는 이때 T형 자동차를 불과 825달러에 내놨다. 그 뒤에도 T형 모델은 생산성이 올라가 가격이 계속 떨어 졌고, 1913년에는 550달러, 1920년에는 255달러에 판매됐다. 값싸고 질 좋은 자동차가 시장에서 무섭게 팔려 나갔음은 물론이다. 포드의 혁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포드는 차의 값은 낮추면서 이에 반비례해 임금은 올렸다.

1910년대 미국의 철강 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1달러를 받았는데, 포드는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하루 8시간 일을 시키고 5달러를 줬다. 1910년대 하루 8시간 노동은 마르크스 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높은 임금을 받게 된 포드 공장의 노동자들은 돈을 모아 자신이 생산한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의 어느 노동 운동가는 “노동자들에게 왜 직장을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생활비 마련이라는 답변이 25%이고 주택 구입을 위해서라는 답변은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65%는 자동차를 사기 위해 일한다고 답한다”라고 말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 소외는 적어도 포드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된 것이다.

헨리 포드의 인기는 바다 건너 유럽에서도 대단했다. 마르크스의 고향인 독일에서는 『포드냐 마르크스냐』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초기 자본주의체제가 안고 있던 문제를 노동 소외라는 개념을 사용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적인 공산주의의 혁명이 아닌 마르크스가 그토록 비판했던 이기적인 자본가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혁신을 향한 기업가의 끊임없는 노력이 기업과 사회, 노동자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 사람들은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간다. 지금처럼 일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 좋다. 어떻게 하면 될까? 답은 분명하다. 더 자유롭게 해줘라./사진=미디어펜

자본과 기업은 노동자의 친구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체제 국가들은 흔히 자신들을 가리켜 ‘노동자 천국’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상에 진정한 의미의 노동자 천국이 있다면 그건 자본주의 국가들일 것이다. 어떤 국가나 사회가 노동자 천국을 주장한다면 당연 히 그곳에서는 노동자들의 자유와 권리가 지켜져야 한다. 노동의 자유나 직업 선택의 자유와 같은 개념들 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것들은 노동자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다. 하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예컨대 대한민국에서 직업 선택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는 노동자의 자연권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라. 대통령에서부터 과학자, 군인, 운동선수,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어린 학생들조차 미래에 자신이 할 일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학자가 되고 싶은 아이에게 연예인이 되라거나, 경찰이 되고 싶은 아이에게 과학자를 강요하는 건 곤란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강제는 개인의 선택권을 빼앗는 것은 물론이고 숱한 인적 지원을 사장시켜 사회 전체적으로도 비효율을 낳는다.

노동은 가치를 만드는데 시간을 쓰고 공을 들이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들을 찾아냈다. 도구를 활용하고 일을 나누어 하고 일하는 공정을 과학화했다. 과학이 발전하고 기계화, 자동화 등 혁신이 일어나면서 직업은 더욱 다양화되고 분업화되었다.

무엇이 노동자를 이롭게 할까?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들이다. 바로 자본과 기업이다. 자본과 기업을 통해 노동은 더 나은 대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자본과 기업은 노동자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의미있게 만든다. 나이든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고령층의 일자리도 늘어가고 있다. 이민자에게도 일자리를 제공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노동력 부족을 겪는 나라들은 해외 이주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개방성을 유지하는 사회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활동성을 유지한다.

기업의 일자리는 소비자가 결정 5)

사람들은 평생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살아간다. 기업도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라 평생직장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업이 기울면 그 일자리는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불황이 찾아들 때 기업은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라는 어려운 선택을 한다. 정리해고가 있을 때마다 자본가들은 무자비하다는 비판을 듣는다. 일자리 하나에 한 가구의 생계가 달렸는데 어떻게 그리도 냉정하게 사람을 자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해고하기를 좋아하는 자본가는 없다. 무엇보다 해고는 자본가가 하지 않는다. 고용과 해고는 형식적으로 자본가의 손을 거칠 뿐,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이는 소비자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고용은 생산에 따른 파생 수요’인 셈이다. 빵이 잘 팔리면 가게 주인은 종업원을 늘릴 테고 가게에 파리나 날리면 종업원 숫자를 줄일 텐데, 이때 빵을 사는 주체는 누구인가? 빵 가게 주인이 종업원을 뽑느냐 마느냐의 의사 결정은 전적으로 소비자가 빵을 사느냐 마느냐의 의사 결정에 종속돼 있다.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형태로든 항상 고용과 해고를 한다. 단골이던 동네 미용실이나 음식점에 더는 가지 않게 됐는가? 그러면 당신이 평소 해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실제로는 해고를 한 것이다. 경제학이 때로 차갑게 느껴지는 건 경영자나 경제학자들이 이해타산적이고 계산적이어서가 아니라 소비자가 냉정하기 때문이다. 빵 가게를 가지 않는다는 말은 경제학적으로 소비자가 그 가게를 해고했다는 의미다. 실력 없는 빵 가게가 망하는 건 개인의 불행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소비자와 대중은 언제나 그 길을 선택한다. 

흔히 노사 관계를 갑을 관계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에 비해 강자이고,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약자이니 노사 관계도 갑을 관계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개 자본가가 갑의 위치에서 을인 노동자를 너무 함부로 다룬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하지만 자본가 역시 냉정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 생존한다는 점에서 노동자와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 시장 경제에서 사회관계를 굳이 갑을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눠야겠다면, 여기서 갑은 소비자이고 노사는 둘 다 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기업이라는 작은 배를 탄 자본가와 노동자는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다. 그런 노사는 당연히 친구여야 하고 친구일 수밖에 없다. 고용은 소비자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노동시장 안에서의 각 개인의 가치는 서로 다르게 결정된다.

   
▲ 우리나라도 이제 지식창조형 경제로 급속히 옮겨 가고 있다. 지식창조 사회는 농·광업이나 공업과 같은 1·2차 산업이 아니라, 3차 산업인 지식창조업이 부가가치 창출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사회다./사진=미디어펜

임금은 노동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결정되는 시장가격

노동을 필요로 하는 수요와 노동을 제공하는 공급이 만나 균형을 이루면서 임금이라는 시장가격을 결정한다. 노동과 임금에 대한 설명도 경제학 원리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고 합리적이다. 현실에서 임금 결정이 시장의 원리에서 벗어나면 그만큼 시장기능의 작동이 다른 요인에 의해 방해를 받아 노동시장의 효율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가격변동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노동에 대해서도 임금의 변동에 대한 거부감이 크며, 그러다보니 임금 결정과정에서 하방 경직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임금에 대해 최저임금이나 최고임금이라는 형태로 제한을 두어 가격결정 원리를 제한하기도 한다. 이처럼 노동시장에서 임금이라는 가격의 유연성이 제약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임금은 본질적으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현실적 제약이 있더라도 서서히 시간을 두고 반영된다. 노동에 대한 수요는 한계효용의 법칙이 작동하는 효용의 가치를 반영한다. 공급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공급된다. 다만 노동의 공급은 사람의 노동시간이라는 제약을 갖는다. 또한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기위해서는 경험, 교육 등 장기적 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초년기에 교육비용을 감수하고 경험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한다.

노동은 다른 생산요소와 대체 관계에 있다. 대체 가능성이 높은 분야의 임금은 다른 요소의 비용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쉽게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일자리의 임금은 오르기 어렵다는 말이다. 대체 가능성이 낮은 분야에서는 매우 높은 임금이 가능해 지기도 한다. 꼭 필요한 분야의 유일한 1인자 또는 인기 스포츠 선수와 연예인의 수입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잘못 6)

같은 노동을 했으니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건 언뜻 생각하면 맞는 말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임금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경직성을 갖기는 하지만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의 한 가지이다. 보상은 투입량이 아니라 산출량과 성과에 따라 변화한다. 우등상이 공부량이 아닌 성적에 따라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면 인지상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보상을 제공한다면 우리 사회의 성과 평가 체계가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계에서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논리가 금과옥조인 양 얘기된다. 공부량이 같다고 해서 똑같이 보상하지 않는 교육 현장보다 노동계의 사고방식이 더 퇴행적이란 게 놀랍다. 학교 교육이야 교육의 목적상 결과만큼 과정도 중시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지만,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대체 왜 그런 안이한 이야기가 오간단 말인가? 

프로야구에서는 3할 타자와 2할 5푼 타자의 연봉이 같지 않다. 두 선수가 똑같이 동계 훈련을 소화하고 출장한 경기 수도 같고 심지어 타석에 들어선 횟수까지 모두 똑같다고 해도 그렇다. 두 선수가 동일한 노동을 했는지는 몰라도 팀과 팬들에게 동일한 가치와 효용을 가져다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 공부하고 오래 운동했다고 더 큰 보상을 준다면 학생은 시험을 잘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운동선수는 경기에서 이기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오래 머물러 있기만 할 것이다. 거기서 그냥 버티고만 있어도 보상이 저절로 올라갈 테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평등주의적 관념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는 것 같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고약한 속담도 그런 인식에서 나온 건지 모른다. 사촌이 열심히 노력해 재산을 늘렸다면 친척으로서 축하할 일이지 배가 아프다니, 심보 사나운 일 아닌가? 반만년 동안 좁은 땅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다 보니 나와 뭔가 다른 걸 인정하지 못하게 된 듯하다. 그런 사고방식이 비판 없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다 보니 이젠 사촌이 명문대에 들어가도 배가 아프고 사촌의 월급이 올라도 배 아픈 이들이 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스스로에게 반문할 일이다. 똑같이 초·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고 다 같은 대학에 가는 게 맞는가? 근속 연수나 노동 시간이 같다고 모두 똑같은 임금을 받고 다 같이 승진하는 게 맞는가? 보상의 공평성을 논하기 위해서라면 동일 노동, 동일 임금보다 ‘동일 성과, 동일 임금’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 평생직장, 평생고용은 구시대의 유물이다. 앞으로 다가올 고용의 노마드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사진=연합뉴스

왜 급여 차이가 발생할까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어느 기업, 어느 나라에서 직업을 구하느냐에 따라 급여에 격차가 발생한다. 기업마다 나라마다 급여수준이 다른 것은 그 사회에 쌓인 자본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본에 따른 생산성의 격차는 소득으로 연결된다. 그렇다 보니 빈곤국의 근로자는 잘사는 나라에 가서 직장을 구하려 애쓴다. 취업이민을 가기도 하고 심지어 불법체류를 감내하면서 높은 급여를 받으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급여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산업 간에도 자본축적의 정도가 다양해 생산성 격차와 급여 격차가 발생한다. 제조업에는 생산노하우와 자본축적이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돼 온 반면, 농업이나 서비스업은 자본축적 과정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농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선진국에 비해 워낙 뒤처진 상태이다 보니, 이 분야의 급여 수준도 높지 않다. 이들 분야가 계속 노동집약적인 상태에 머문다면,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농업과 서비스 분야에 자본을 축적하고 부가가치 높은 산업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급여 수준도 함께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산업 간 급여 차이가 있듯이, 기업 간 급여 차이도 크다. 오랜 기간 자본이 축적된 기업, 기술력과 지적 노하우가 쌓인 기업은 생산성이 높고 급여도 높게 마련이다. 반면 신생기업이나 기업 내에 축적된 자본이 없는 기업은 생산성이 낮고 급여도 낮을 수밖에 없다. 근로자에게 급여를 많이 주는 기업이 되려면 보다 적극적으로 사내에 자본과 지식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수익을 내서 그 이익을 회사 내에 축적해야 생산성을 높일 수 있고 직원들에게 나눠줄 몫이 커지기 때문이다.
 
기업 내에도 근로자 간에 급여 격차가 존재한다.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숙련된 근로자와 경험이 없는 비숙련 근로자 간 급여 차이가 크다. 숙련도가 높아져 다른 사람으로 대체 가능하지 않다면, 그 사람의 급여는 매우 높아질 것이다. 극단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고 경영자, 가수, 운동선수처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 분야의 1인자가 됐을 때, 그 사람의 소득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높아진다.
 
어떻게 하면 급여를 높일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져야 한다. 물적 자본과 지적 자본을 축적하고 일할 의욕과 창의력을 높이는 일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적자원의 중요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국이 자원 빈국이라고? 7)

자원의 저주는 나라에 자원이 풍부할수록 경제성장은 둔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풍부한 자연 자원에 비해 국민 소득이 낮은 브라질, 러시아,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등이 좋은 예다. 자원의 저주는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발생한다. 1950년대 말 네덜란드는 북해에서 천연가스 유전이 발견돼 막대한 수입을 올렸는데 그 바람에 통화 가치가 상승해 자국의 제조업이 붕괴해 버렸다. 이를 회복하는 데는 30년 가까이 걸렸다. 이른바 ‘네덜란드 병’이다.

베네수엘라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오일머니로 너무 쉽게 돈을 버는 탓에 석유를 파는 것 말고는 특별히 내놓을 만한 산업이 없다. 기업들은 기술 개발이나 혁신의 의지가 없고 국민들은 노동 의욕이 없어 국가는 돈을 벌지만 정작 국민들은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자원이 부족한 나라라고 한다. 석유와 같은 자연 자원이 풍부한 국가들과 비교할 때 더욱 자주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중동의 몇몇 나라들은 지금도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높다. 하지만 그 어떤 중동 국가도 지금의 우리처럼 최첨단의 다양한 산업군을 보유하지 못했다. 

불과 반세기를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석유와 같은 자연 자원의 도움없이 선진국이 되었다. 이는 수백 년간 식민지를 경영하며 부를 축적한 유럽이나, 애초 광활한 영토에 인구와 자원이 많았던 미국조차 이루지 못한 일이다. 과연 우리에겐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비록 눈에 보이는 자원이나 산업 시설은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성실하고 근면한 인적 자원이 있었고,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교육열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있었다. 공부를 유난히 강조하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먹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집에서도 자기 자식은 잘 가르치려고 했던 게 우리 민족이다. 과거의 우리 국민은 교육을 통해 지금의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다 함께 공유했다. 비록 자기 세대에서는 어려워도 자녀 세대에서는 교육을 통해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저개발국에서는 세대가 바뀌어도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교육을 통해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문화 자산이 없다. 석유가 많이 나는 중동의 부국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돈이 많은 만큼 이들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대학원까지 이른바 무상 교육이다. 하지만 학업 성취도는 형편없다. 공부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사는 이들에게 힘들여 공부하고 자기계발 할 인센티브가 부족한 것이다.

높은 교육열과 계층 상승이라는 무형의 욕망은 인적 자원이라는 유형의 자산을 낳았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세계 최저 수준의 문맹률,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입증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업 성취도,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 등은 모두 남다른 교육열의 산물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개인 수준은 물론 국가 수준에서도 계층 상승을 이뤄냈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세계 유일의 나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당당한 회원국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는 “풍부한 석유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낙후와 독재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베네수엘라와 교육에 대한 투자와 근면함으로 서유럽 수준으로 뛰어오른 한국이 잘 대비된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더 열심히 교육하고, 더 열심히 연구 개발하여, 더 많은 사업거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로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지식창조 경제가 확산되면서 게임, 공연, 관광, 영상, 의료, 출판, 테마파크, 학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프로젝트별 노동 계약이 고용의 표준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식 산업으로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전에 정규직과 정년 보장을 고집하는 고용 문화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사진=미디어펜

자신의 이름을 사랑받는 브랜드로 만들어라 8)

한국의 이런 우수한 인적자원은 결국 경제에서 사람 자체의 경쟁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좋은 본보기다. 또한 인적자원의 경쟁력은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의 가치를 증명할 수도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격언을 다시 곱씹어 보면, 결국 직업의 귀천은 일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느냐에 따라 세상의 평가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사명감과 진정성이 없다면 귀한 직업도 천한 것이 된다.

지금은 1인기업시대라고 할 만큼 지식이 중요한 시대다. 1인 기업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 자신을 브랜드로 가꾸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좋은 브랜드는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다. 스타벅스의 커피는 동네 커피 가게의 커피보다 훨씬 비싸지만 사람들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아이폰은 비슷한 성능의 다른 스마트폰에 비해 비싸지만 사람들은 아이폰을 즐겨 사용한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스타벅스와 아이폰이라고 불리는 무형의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이름에 투자하는 일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임을 일찍부터 알았다. 오프라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시작한 건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일 때다. 자신의 이름이 걸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녀의 지명도는 점점 올라갔고,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이 됐다. 그녀가 진행한 토크쇼의 이름이 여전히 〈에이엠 시카고〉였다면 그녀의 성공은 불가능했거나 한참 지체됐을 것이다.

노동을 필요로 하는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도 스토리가 있는 사람, 브랜드가 있는 사람을 쓰고 싶어 한다. 그게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느껴지는 뉴요커의 세련된 분위기, 아이폰에 스민 스티브 잡스의 혁신정신, 오프라 윈프리의 인생담과 극적인 성공 스토리는 대중에게 매력적이다. 

1988년의 어느 날,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토크쇼에서 다이어트에 도전할 것이라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4개월 만에 무려 30킬로그램이나 감량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돌아왔다. 그녀가 4개월간 다이어트에 쏟아 부은 돈은 10억 원에 가깝다고 한다. 오프라는 다이어트를 위해 전담 트레이너, 전담 요리사와 영양사 등 오직 그녀만을 위한 다이어트 프로젝트 팀을 구성했다. 산책을 할 때는 캘리포니아의 최고급 온천을 장소로 섭외했고, 조깅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까지 날아가기도 했다. 미국 대중지 《인콰이어러》가 그녀의 다이어트 비용을 추정했는데 1킬로그램에 적어도 1만 달러 이상은 쓴 것 같다고 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실로 물 쓰듯 돈을 쓴 셈인데, 그녀가 여기에서 멈췄다면 오프라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다이어트 성공담을 책으로 만들어 베스트셀러에 올려놔 다시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그녀의 다이어트 프로젝트 역시 오프라 윈프리라는 브랜드를 위해 사전에 면밀히 설계된 투자였던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명품 브랜드로 만들었다. 그 결과 그녀는 가난한 흑인 미혼모의 딸에서 현재 보유 자산이 3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적인 부호가 됐다. 그녀의 삶은 ‘인생의 성공 여부는 온전히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이른바 ‘오프라이즘’을 낳았다. 

자선보다 자립 9)

복지도 일방적인 시혜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노동을 통해 삶을 실현하도록 하는 복지가 더 나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번화가의 지하철역 입구에서 빨간 조끼와 모자를 착용하고 ‘빅이슈’라는 잡지를 판매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이들은 모두 빅이슈 판매원이자 노숙자다. 빅이슈는 잡지인 동시에 노숙자의 자활을 돕는 일종의 자립 도우미로, 수익 전액을 빅이슈 판매원으로 일하는 노숙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실제로 ‘빅이슈’ 판매원의 기본 조건은 노숙자다.

1991년 영국에서 처음 창간된 ‘빅이슈’는 10여 개국에서 14종에 이른다. 여기에 빅이슈를 본떠 창간하거나 기사제휴를 맺은 세계 길거리 매체만도 40개국 120여 종에 달한다. 영국에서만 빅이슈는 매주 13∼15만 부가 팔린다.

이를 통해 2010년 기준으로 5,000명 이상의 영국 노숙자들이 자립에 성공했다. 세계적 명사들이 무료로 빅이슈의 표지 모델이 되는 이유도 빅이슈의 공익적 성격 때문이다. 현재 빅이슈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적 기업으로 손꼽힌다. 이 빅이슈를 창간한 존 버드는 본래 노숙자 출신이었다.

런던 노팅힐의 슬럼가에서 태어나 자란 존 버드는 이미 5세 때부터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집세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불안정한 생활 여건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자연스레 범죄에도 손을 댔다. 13세에는 좀도둑질을 하다 잡혀 감옥 생활을 해야 했을 정도다. 하지만 존 버드는 20대에 이르러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안정적으로 자립에 성공했고 40대에 세계적인 화장품 브랜드 ‘더바디숍’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로딕의 제안으로 사회적 이슈와 비즈니스를 결합한 빅이슈를 창간하게 됐다.

존 버드는 빅이슈를 창간할 때부터 ‘공짜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선 위주의 노숙자 관리 방식에 불만이 많던 존 버드는 노숙자가 자립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기회를 통해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일을 돕고 싶어 했다.

실제 영국의 유명 언론인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존 버드는 ‘정부나 각종 단체의 자선은 찔끔찔끔 먹이를 줌으로써 그 덫에 영원히 걸리게 하는 것’이라며 자선 위주의 노숙자정책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미 자선의 덫에 빠져든 노숙자들은 존 버드의 생각에 강하게 반발했다. 노숙자들은 존 버드가 자신들을 착취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존 버드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빅이슈의 판매원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행동 수칙을 정했다. 판매 중 금주는 물론이고 구매자에게 당당하고 친절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지켜야 할 수칙의 주요 골자였다. 존 버드는 판매원의 행동 수칙을 통해 노숙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과 자긍심을 되찾길 바랐다. 또한 빅이슈의 판매 수익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처음 10권의 잡지를 무료로 제공하고 이를 팔아 생긴 수익으로 다시금 10권의 잡지를 정가의 절반 값에 살 수 있도록 했다. 간단히 얘기하면, 판매 수익의 절반을 판매원인 노숙자가 가져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존 버드와 빅이슈의 행보에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시장’과 ‘자립’을 강조해 정부의 복지 책임을 희석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존 버드는 무조건적이고 획일적인 복지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선보다는 자립이 가능한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 결과 스스로 힘으로 자립에 성공한 노숙자들의 만족도는 자선으로 겨우 생활하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높다.

   
▲ 인력 수요가 변화무쌍한 분야에서 정규직 고용은 기업에게나 노동자에게 맞지 않는 옷일 수밖에 없다. 기업은 매출이 없는 시기에도 인건비가 꾸준히 발생하니 부담이 크고, 노동자 입장에서도 할 일 없이 일터를 오가는 건 고약한 노릇일 테니 말이다./사진=연합뉴스

자수성가가 가능한 사회

세상은 여전히 자수성가가 가능하다. 정부가 복지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주요 언론들은 이제 더는 젊은 세대들이 계층이동을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기사를 쏟아낸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부정적인 내용도 문제지만 하나같이 남 탓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탓, 재벌 탓, 부자 탓… 자신이 잘되고 못 되는 일을 스스로 책임지기보다는 애꿎은 남 탓으로 돌리며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고 지레 판단하고 체념해버린다.

젊은 세대들이 스스로 더는 자수성가할 수 없는 시대로 규정해 버리기 시작하는 순간, 불행과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생각은 정말 위험하다. 스스로 가능성을 제한하고 그 틀 안에 갇힌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들이 성공할 기회는 전혀 없을까.

단언컨대, 기회는 여전히 존재한다. 예전 세대나 지금 세대나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불안감과 불확실성은 똑같이 따라다닌다. 매월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야 하는 직장인들은 여전히 ‘쥐꼬리만 한 월급’과 씨름하고 있다. 불안감과 불확실성은 결코 지금의 젊은 세대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풍족했던 만큼 가난함에 고통받는 시간을 보낸 경험은 없다. 밥을 쫄쫄 굶거나 교육을 전혀받지 못하는 젊은 세대는 손에 꼽을 만큼 적지 않은가. 이처럼 과거 한국의 젊은이들보다 훨씬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아온 젊은 세대의 경우, 자기 생각이 뚜렷하게 정립되지 않아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는 현재 사회 시스템이 잘못되었기에 자수성가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을까? 섣불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까닭은 실제 우리 주변에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꽤 많이 있고 방송과 언론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국내 굴지의 패션 기업으로 연 1조 원의 매출을 돌파해 언론의 조명을 받은 패션그룹 형지의 최병오 회장도 자수성가의 대표 인물이다. 최병오 회장은 29세의 나이에 동대문 시장에서 1평짜리 의류 매장으로 패션업을 시작했다.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이를 악물고 일했다고 한다. 최 회장이 밝히는 성공비결은 ‘성실’과 ‘친절’이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남들보다 1%만 친절해도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고 전한다. 또 그는 세상에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지만, 운은 1%일 뿐, 나머지는 모두 노력이 좌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 사회는 급격히 선진화되면서 과거만큼 이례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회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회의 문은 변함없이 열려 있다.

자수성가는 결국 개개인의 문제다. 자수성가의 가능성을 탓할 이유가 없다. 이미 과거보다 훨씬 높은 질의 삶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리고 있다. 지금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고 있으며, 과거에 비해 촘촘해지고 있다. 그 촘촘한 틈 사이로 새로운 기회는 계속해 생겨나고 있다. 누군가 이미 찾아낸 틈은 모두가 알고 있는 기회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지금 시대에 맞는 자신만의 새로운 틈을 찾아야 한다.

자유로운 노동의 시대

안타깝게도 노동에 관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의식은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의 산업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규직 고용이 갖는 가장 큰 시대착오적 특징은 따로 정해진 계약 기간 없이 누구에게나 정년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 먹거리 산업인 지식창조 분야에서는 종신 고용은커녕 장기근속 노동자도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영화사를 예로 들어 보자. 영화가 촬영 중일 땐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 명까지도 인력이 필요하다. 영화사가 직접 고용하는 스태프나 보조 출연자는 물론이고, 연기자들과 함께하는 매니저나 코디네이터 등 많은 인원이 요구된다. 영화 촬영 현장이 대개 얼마나 북적이는지 떠올려 보라.

하지만 촬영이 아닌 시나리오 작업 중이거나 촬영 후 편집 작업 중일 때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 직원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영화 산업만 그런 게 아니다. 방송국 주변의 숱한 외주 프로그램 제작업체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게임 업계도 타이틀을 한창 만들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필요한 인력 차이가 크다. 관광 업계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관광 성수기와 비수기에 필요한 인력 차이가 크다.

영화, 게임, 관광업과 같은 업종의 프로젝트형 조직에서 정년을 보장받는 노동자나 노조는 존재하기 어렵다. 매출과 수익 구조의 변동 폭은 큰데 비용 구조만 경직 돼서는 산업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력 수요가 변화무쌍한 분야에서 정규직 고용은 기업에게나 노동자에게 맞지 않는 옷일 수밖에 없다. 기업은 매출이 없는 시기에도 인건비가 꾸준히 발생하니 부담이 크고, 노동자 입장에서도 할 일 없이 일터를 오가는 건 고약한 노릇일 테니 말이다.

지식창조 경제에서 기업과 노동자가 모두 사는 길은 프로젝트별로 계약 기간을 다양화하는 것이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기간에 따라 1년 계약, 또는 다년 계약을 맺을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일, 주, 월 단위의 계약도 가능하다. 기업은 필요할 때 인력을 쓸 수 있고, 노동자는 특정 기업에 종속돼 일하는 게 아닌 담당하는 프로젝트에 맞춰 여러 기업과 협업하는 경제 주체가 된다. 21세기에 주류가 될 고용의 형태는 평생 고용이 아닌 이런 프로젝트형 고용이라 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지식창조형 경제로 급속히 옮겨 가고 있다. 지식창조 사회는 농·광업이나 공업과 같은 1·2차 산업이 아니라, 3차 산업인 지식창조업이 부가가치 창출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사회다. 지식창조 경제가 확산되면서 게임, 공연, 관광, 영상, 의료, 출판, 테마파크, 학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프로젝트별 노동 계약이 고용의 표준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식 산업으로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전에 정규직과 정년 보장을 고집하는 고용 문화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평생직장, 평생고용은 구시대의 유물이다. 앞으로 다가올 고용의 노마드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드러커는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어렴풋이 ‘지식근로자'라는 개념을 제시하기 시작했는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노동력의 중심이 될 것이고 그런 사회는 ’지식사회‘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드러커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인간의 모델과 그들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사회의 모델로서, 과거의 ’경제인‘ 대신 ’지식근로자‘를, ’경제인사회‘ 대신 ’지식사회‘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10)

사람들은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간다. 지금처럼 일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 좋다. 어떻게 하면 될까? 답은 분명하다. 더 자유롭게 해줘라. 일하고 싶은 사람과 사람을 쓰고 싶어 하는 사회적 협력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임금과 고용이 유연해 질수록 더 다양하고 많은 일자리가 가능해 질 것이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 안타깝게도 노동에 관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의식은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의 산업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규직 고용이 갖는 가장 큰 시대착오적 특징은 따로 정해진 계약 기간 없이 누구에게나 정년을 보장한다는 것이다./사진=미디어펜


1)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최승노 저, 프리이코노미스쿨, 2014, 18~20p

2) 『격차, 그 지극한 자연스러움』, 안재욱 편저, 백년동안, 2015, 76p

3) 『누가 소비자를 가두는가』, 김정호 저, 교보문고, 2007, 30p

4) 『노동의 가치』, 최승노 저, 프리이코노미스쿨, 2015, 22~25p

5) 『노동의 가치』, 최승노 저, 프리이코노미스쿨, 2015, 79~81p

6) 『노동의 가치』, 최승노 저, 프리이코노미스쿨, 2015, 35~38p

7) 『노동의 가치』, 최승노 저, 프리이코노미스쿨, 2015, 89~94p

8) 『노동의 가치』, 최승노 저, 프리이코노미스쿨, 2015, 164~167p

9) 『복지의 재발견』, 최승노 저, 프리이코노미스쿨, 2014, 138~146p

10) 『무엇이 당신을 만드는가』, 이재규 편저, 위즈덤하우스, 2010, 179p


참고문헌

김이석, 『번영은 자유주의로부터』, 나남, 2013
김정호, 『누가 소비자를 가두는가』, 교보문고, 2007
남성일, 『한국의 노동 어떻게 할 것인가』, 서강대학교출판부, 2007
복거일, 『자유주의 틀 깨기』, 백년동안, 2016
최승노, 『노동의 가치』, 프리이코노미스쿨, 2015
테렌스 킬리 저, 조영일 역, 『과학연구의 경제법칙』, 자유기업원, 2003


(이 글은 23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열린 ‘자유주의 관점에서 본 노동’ 제2차 자유노동연구회 워크샵에서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최승노]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