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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독도는 우리땅' 이사부(11)]진흙서 발견된 신라장수
단양 적성비에 이사부의 이름 새겨져…소백산 넘어 한강 공략의 근거지
승인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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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 2017-08-06 08: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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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⑪] 진흙에서 발견된 신라장수

단양 적성비에 이사부의 이름이 새겨져…소백산 넘어 한강 공략의 근거지

   
▲ 김인영 언론인
55번 중앙고속도로 상행선을 따라가다 단양휴게소를 들르면 휴게소 뒤편에 비각을 만날 수 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적성비(赤城碑)다.

비석 앞에서 눈을 들어보면 야트마한 산(성재산)이 보이고, 정상에서 비탈을 내려오면서 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적성(赤城)이다. 오늘날 적성비와 적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비문에 이 곳을 의미하는 '적성'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오므로, 비명과 성의 이름을 지을 때 신라시대의 지명을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비석을 뒤로 하고 산을 타고 적성에 올라보면 그 아래 남한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훌륭한 경관이 나타난다. 이사부 장군이 고구려 땅이었던 이 적성을 빼앗고, 강(남한강)을 해자로 삼아 북쪽의 고구려 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 성을 쌓았을 것이다.
 
   
▲ 첫머리에 이사부의 이름이 새겨진 단양 적성비.

적성비가 위치한 곳은 경북 풍기에서 죽령을 넘어 충북 단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남으로는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펼쳐 있고, 남한강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다. 천혜의 요새다.

적성을 중심으로 남한강을 거슬러 북동쪽으로 온달산성이 있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 북서쪽엔 중원 고구려비가 자리잡고 있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고구려 성이고,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알리는 비석이다.

적성 지방은 고구려측에서 보거나 신라측에서 보더라도 전략적 요충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소백산맥의 관문인 죽령을 넘어 신라를 공격하는 루트이며, 신라 입장에서는 한강을 진출하는 전초기지로 역할을 했다.

필자는 적성산성에 올랐을 때 철원평야 한가운데 있는 백마고지나 다름없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6.25때 남과 북이 엄청난 피를 흘리며 이 고지를 뺏으려 한 것은 광대한 철원평야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신라군은 이 적성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양쪽 군사거점을 갈라놓고, 한강을 넘어가는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1) 돌에 새겨진 이사부

이 자그마한 비석이 발견된 것은 우연의 일이었다.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해서였다. 조사단은 단양 읍내 성재산(해발 323m 적성산성)을 올랐다. 진흙밭을 지나 산성터로 이르렀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에 오르는 길은 진흙탕이었다. 옛날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신라토기였다.

조사단이 신발에 뭍은 흙을 털려고 두리번 거리다 흙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된 것을 발견했다. 그 돌부리에 신발 흙을 털어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무슨 글자가 보였다. '대(大)'자였고, 흙을 닦아내니 '아(阿)'자, '간(干)'자도 보였다. 그들은 허겁지겁 야전삽으로 흙을 걷어내고 보니, 30cm정도 비스듬히 누워있는 신라시대 비석을 발견했다.

그 첫줄에 이사부의 이름이 나왔다. 1천5백년 전에 죽은 이사부의 이름이 돌에 새겨져 나타난 것이다.
 
   
▲ 적성비.

한국사 연구자들이 고대사를 해석하면서 부딪치는 문제는 사료가 빈약하고, 신빙성에 의문이 생긴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사료도 한계가 있고,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면 두 사료에 차이점도 발견된다. <일본서기>에는 완전한 신뢰를 주기 어렵다.

이런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는 것이 금석문이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비문, 목간, 도자기, 칼, 무덤내 유물 등에서 문자들이 타이머신처럼 1천5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론 글자가 지워지거나 깨져 확인 가능한 글자가 몇 되지 않는데다 가까스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아도 해석이 어렵다. 밀레니엄을 지나고도 몇세기를 거친 고대인이 현대인에게 주는 통신문은 거의 난수표에 가깝다. 고대의 비문이 천년의 세월이 지나 발견되면 금석문 연구자와 역사학계는 한바탕 잔치를 벌인다. 우주인이 남긴 메시지를 해독하는양 서로의 해석이 다르다. 1,500년 후의 후손들이 오늘 찍은 신문 기사를 완벽히 해독하기 어려운 것과 다름 없지 않겠는가.
 
김부식과 승일연이 쓴 사서들은 삼국의 흔적이 사라진 고려 시대에 출간된데 비해 삼국시대 금석문은 당시 사람이 쓴 살아있는 기사다. 유학자와 스님이 사서를 쓸 때에는 그들이 속해 있는 가치관과 종교라는 프리즘을 통해 역사의 빛깔이 다르게 표현될 수밖에 없지만, 금석문은 당대의 뉴스매체이므로 신라인 자신들의 가치관과 용어가 생생하게 배어나온다.
 
이사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사부는 경상북도 동쪽 구석에 치우친 부족국가를 한반도를 호령하도록 키운 영웅이지만, 그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면 허탈감을 느낀다. 중요한 대목에서는 항상 자료가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김유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열전>에서 3회에 걸쳐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어쩌면 김유신보다 더 위대한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몇자 되지 않는다.
 
이런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는 것이 이사부가 활동하던 6세기의 금석문 적성비다. 지금까지 발견된 금석문 가운데 이사부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단양신라적성비가 유일하다. 그나마 글자가 지워지고 해독이 어려운 문구가 태반이다. 다행스럽게 적성비 첫문장에 이사부의 이름이 나오고, 그 단어 하나로 진흥왕때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캐낼수 있게 된다.
 
   
▲ 단양 적성에서 내려다본 남한강.

2) 대중등

1,500년전 고대인들이 타임캡슐에 묻어둔 재료를 꺼내들고 이사부 시대의 상황을 그려보기로 하자. 적성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년 □월중에 임금(진흥왕)이 대중등(大衆等)에 교사를 내리시니 훼부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와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와 사탁부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등이 교사를 받들어 관장했다."
 
적성비에서 이사부의 한자 표기는 이사부지(伊史夫智)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사부(異斯夫)와 한자가 다르다. 지(智)는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어미로 오늘날 '씨' 또는 '님'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한자의 차이는 있지만, 음으로는 '이사부'가 그대로 살아나온 것이다.
 
내로라는 고고학자, 금석학자들이 모여 신라인들이 쓴 암호를 해독했다. 향찰식도, 한문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발견된 비문중 가장 난해한 문장이었다는 평이었다. 일부에 상충되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 윤곽이 잡혔다.

내용인즉 "진흥왕이 이사부와 비차부, 무력 등 10명의 고관에게 교시를 내려 신라의 국경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치다 숨진 야이차와 그 가족을 비롯해 적성사람(고구려인)의 공을 표창하고, 나중에도 야이차처럼 충성을 바치면 포상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소백산맥(죽령)을 넘어 고구려 땅을 뺏은 뒤 점령지 민심을 다독이는 차원에서 신라에 협조한 현지인에게 포상을 내리는 국가정책을 돌에 새긴 일종의 헌장인 셈이다.
 
적성비가 세워진 연대는 대략 진흥왕 11년(550년)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에는 550년에 이사부가 진흥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고, 이듬해(551년)에 거칠부가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취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사부가 점령한 도살성과 금현성이 적성 주변에 위치하고, 거칠부가 고구려를 치며 한강 유역의 대규모 땅을 확보하는 전진기지가 바로 죽령을 넘어 남한강 변에 위치한 바로 이 적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적성비에는 죽령을 넘어 단양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 고관 9명의 이름과 소속, 관직명이 나오고, 고관 10명중 가장 먼저 이사부가 등장한다. 이사부가 이들 고관중 우두머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문에서 이사부를 지칭하는 글자는 다음과 같다.

'大衆等喙部伊史夫智伊干(대중등훼부이사부지이간)'

대중등(大衆等)이란 대등(大等)과 동의어로 파악된다. 대등은 '신료(臣僚)'라는 뜻으로, 고위관직을 의미한다. 신라는 다수의 대등을 두었다. 비문에 기록된 10명의 고관 중 이사부와 두미지(豆弥智), 서부질지(西夫叱智), □□夫智, 내례부지(內禮夫智) 등 5명이 대중등에 포함됐다. 대등은 귀족의 구성원으로 특정한 임무를 분장받지 않으면서 신라왕국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데 참여했다.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분석해보면, 임금이 소속해 있는 훼부(啄部)[탁부라고도 읽는다], 사훼부(沙啄部)[사량부(沙梁部)라고도 했다], 그리고 본피부(本彼部) 출신만이 대등에 임명됐으며, 골품상으로는 진골(眞骨)을 중심으로 한 고급귀족이어야 했다.

적성비에 나오는 대중등 5명의 관직을 보면, 이사부가 2등급 이찬, 두미지가 4등급인 파진찬, 서부질지, □□부지, 내례부지 등 세명이 5등급인 대아찬이다. 신라에서는 5등급까지는 진골 출신만으로 구성되므로, 이들 5명이 모두 진골인 셈이다.
 
대등의 모임은 대등회의(화백회의)이며, 회의를 주재하는 우두머리가 상대등이다. 이사부는 이 5명의 대중등 가운데 우두머리로 회의를 주재하고 통솔하는 상대등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단양 적성비에서 5명의 대중등은 모두 훼부, 사훼부 소속이며, 두 부는 내물왕 이후 왕조를 이어간 김씨들이 관할하는 구역이었다.

5명의 대중등 가운데 4명이 훼부 소속이고, 서부질지만이 사훼부 소속이다. 그 아래 관직으로 나오는 고두림(高頭林)성 군주인 비차부(比次夫)와 무력(武力)은 훼부와 사훼부,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도설(噵設)은 사훼부, 물사벌성(勿思伐城) 당주(幢主)인 조흑부(助黑夫)는 훼부 소속이다. 야이차(也尔次)만이 현지 적성 출신이라 소속 부가 없다. 위의 9명은 모두 훼부, 사훼부 출신으로 서라벌에서 올라온 왕경인(王京人)이었다. /김인영 언론인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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