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⑬] 진흥왕 친정하자 이선후퇴

도살, 금현성 전투 이후 실각했다는 주장도...고령탓도 있었을 듯

   
▲ 김인영 언론인
이사부(異斯夫)는 신라 진흥왕조에 최고 권력자이자, 신라 영토를 대규모로 확장한 장수로서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한 기록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가야 김씨 출신인 김유신은 『삼국사기』 「열전」에 3부에 걸쳐 그의 인생스토리며, 전쟁 참여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지만, 정작 왕족이며 최고의 권부에 오른 이사부는 「열전」에 몇줄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그의 성과 이름조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르게 나온다. 경주에 가면 김유신의 무덤은 왕족만큼이나 크게 만들어졌는데, 이사부는 어디에 뭍혔는지 흔적조차 없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지워지지 않았다. 후대에 발견된 돌 조각(적성비)에서, 멀리 『일본서기』에서, 위작논란에 휩싸인 『화랑세기』에서 그의 흔적이 묻어나온다. 그만큼 지워도 지울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사부의 출생과 사망의 기록마저 신라사의 정사라고 할만한 『삼국사기』에서 지워진 이유가 그의 존재를 지우고 싶어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배경을 살펴본다.
 
   
▲ 경주 사라리에서 발견된 4세기의 신라 투구 /사진=경주박물관 제공

1) 진흥왕 친정체제

진흥왕 11~12년 (550~551년) 사이의 『삼국사기』 기록을 읽을 때 몇가지 미묘한 변화 기류를 감지하게 된다.

첫째, 진흥왕 초기 권력을 장악한 이사부의 이름은 도살성·금현성 전투 이후 사라지고, 거칠부와 김무력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다.

둘째, 도살성·금현성 전투(550년)에서 나제(羅濟)동맹이 깨졌다가, 551년부터 554년 관산성 전투까지 4년간 신라와 백제는 동맹체제를 이어갔다.

이런 변화는 진흥왕이 성년이 되면서 권신을 밀어내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권신이라 함은 이사부를 말한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진흥왕은 성년이 되기까지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을 받았고, 조정의 권력은 군권을 장악한 이사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이사부는 진흥왕 초기에 병부령은 물론 재상 일을 장악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선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이사부의 부인이 됐다고 기술했다.

인간에게 나이만큼 무서운 게 없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권력을 향유하던 이사부도 이제 60대 후반을 넘기고, 진흥왕은 젊은 청년으로 성장해갔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없다고도 했다.

진흥왕이 즉위한지 12년째 되는 551년, 나이는 18세였다. 왕은 나라의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나라를 열었다'는 뜻이다. 본인이 어머니의 섭정 또는 이사부의 대리통치를 벗어나 직접 통치하겠다는 뜻이다.

그러자니 어머니 곁에 있는 권신 이사부를 밀어내야 했고, 두 번째 권력가인 거칠부와 가야 김씨의 도움이 필요했다.

진흥왕은 전선에 나가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이사부를 경주로 불러들이고, 군권을 거칠부와 김무력 등에게 준다. 나아가 임금은 전투로 빼앗은 지역을 직접 순시하며(巡狩), 피정복 주민을 다독이는 정치행사를 가졌다.
 
진흥왕이 친정체제를 구축한 이후의 행적을 『삼국사기』를 통해서 보자.

①12년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케 해 10개 군을 취했다.

②14년 (553년) 백제 동북부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③15년 (554년) 백제 성왕이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공격해 백제 왕을 죽였다.

④16년 (555년)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했다.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국경을 정했다.

이사부는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군이다. 하지만 젊은 진흥왕은 노장을 경주로 끌어들여 참모로 삼고, 스스로 군사들을 지휘하며, 영토 확장에 나선 것이다.
 
2) 나제동맹 노선 갈등

진흥왕 11년 (550년)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뺏고 뺏기는 치열한 혈투를 감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두 나라 군대가 힘이 빠졌을 때 두성을 빼앗는데, 이때 이사부의 군사 행동의 원칙은 나제(羅濟)동맹을 깨는 것이었다. 『삼국사기』는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두 성을 빼앗으라고 명했다고 기록하지만, 이사부가 지소태후와 함께 진흥왕에 대해 대리정치를 하고 있던 시기여서 사실상 이사부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수십년 간의 동맹을 깬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다음해 진흥왕이 친정체제를 수립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진흥왕은 죽령 이북의 고구려땅에 대해 침공을 명하면서 이사부가 아닌 거칠부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백제와의 동맹을 복원한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조」에 따르면 진흥왕은 거칠부와 여덟 장군을 시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도록 명령했다. 백제가 먼저 공격에 나서 서쪽 지역의 평양을 격파하고, 신라의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군을 빼앗는다. 고현은 지금 북한 땅인 강원도 철령이다. 백제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는 사이에 신라의 거칠부 군대는 강원도 영서 일대를 일거에 점령하는 것이다.
 
이사부에 의해 깨졌던 나제동맹이 한해 사이에 복원됐다. 이 번복 과정에서 동맹을 깬 이사부는 이선으로 후퇴하고, 나제동맹 복원을 주장하는 거칠부등이 진흥왕을 설득해 고구려의 서쪽은 백제가, 동쪽은 신라가 공격하는 협공전략을 채택해 성공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료에는 나오지 않지만, 1년 사이에 중대한 외교전략이 수정되는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에 누군가 희생양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백제에게 원한을 산 이사부를 후선으로 뺀 것이 아닐까. 그 틈을 거칠부가 파고 든 것이다.
 
나제동맹은 가까스로 복원됐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2년후인 553년, 김무력은 임금의 명을 받아 백제 동북지역의 옥토, 즉 한강유역을 공격해 신라 땅으로 만들었고, 진흥왕은 그 땅을 신주(新州)고 칭하고 무력을 군주로 봉했다. 그 와중에서도 백제 성왕은 딸을 진흥왕에게 줘 결혼동맹을 유지하려 하지만, 거울의 금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파경(破鏡)을 선언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로 돌아섰다. 사랑하던 연인들이 헤어지면, 더 무섭게 미워하게 된다. 두 나라는 이제 한쪽이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원수지간으로 변하게 된다.
 
   

3) 이선후퇴

이사부가 실직 군주에 임명될 때 나이를 20세로 보면, 도살성, 금현성 전투 때엔 65세로 고령이었다. 전장에 나가기가 어려운 나이다. 굳이 전장에 나가도 말을 타고 병사를 지휘하고 독려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사부는 늙어 갔고, 자연스레 젊은 왕이 정국 운영을 주도하게 됐다. 진흥왕이 친정한 이후 거칠부의 위상이 두드러 졌다. 거칠부는 국사 편찬의 공로로 대아찬에서 파진찬으로 승진하고, 고구려를 쳐서 강원도 영서지역에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는 공을 세웠다.

역사학자들 가운데 진흥왕 친정 이후 이사부가 진흥왕에 의해 실각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거칠부가 고구려를 침공해 10개 군을 획득했을 때 관직이 대각찬(大角飡)이었다. 대각찬 또는 대각간은 상시적인 관직은 아니지만, 17등급 관직의 최상위 등급으로, 이사부가 말년에도 유지했던 2등급 관직인 이찬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거칠부의 이름은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창녕비, 마운령비, 황초령비에 등장한다. 진흥왕이 새로 확장한 영토를 순수할 때 거칠부가 지근거리에서 수행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사부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진흥왕 순수 창녕비에서 진흥왕은 “과인은 어려서 즉위해 정사를 보필하는 신하에 맡겼다”(寡人幼年承基 政委輔弼)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정사를 보필하는 신하는 이사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사부가 실각했다는 기사는 없다. 다만 수도 금성에서 주요 현안에 대해 임금에게 자문하고 젊은 장수들에게 전략 전술을 지도하는 역할로 일보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뒷방 늙은이로 전락해 퇴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가야 전쟁에서 70대 후반의 노장이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가 신라 왕국의 조정에서 어른으로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라가 부를 때 그는 마지막 봉사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젊은 사다함을 앞세워 대가야 전투에 나서게 된다. /김인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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