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입증 힘들어 불기소 많아…성범죄 구성요건·양형기준 재정비해야
[미디어펜=김규태 기자]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 후 문화예술계와 정계 등 사회 전반에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들불처럼 커진 가운데, 정부가 8일 성범죄 대책을 내놓았지만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형법 개정을 통해 업무상 위력·위계에 의한 간음죄와 추행죄의 법정형 상한을 각각 10년에서 5년으로 2배 이상 올리고 공소시효 또한 10년·7년으로 연장했지만 미투를 사법 처벌 문제로만 보는 대책에 한계가 있다는 시각이다. 

법조계는 정부가 가해자로부터의 명예훼손죄 피소 두려움 없이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할 수 있도록 위법성 조각(阻却) 사유를 적용하기로 했지만 이것만 갖고서는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형량을 배로 늘려 처벌만 강화한다 하더라도 이를 위해 필요한 유죄 판단의 기준이 엄격해 성범죄 입증이 힘든 실정은 바뀌지 않아 불기소가 많다는 지적이다.

특히 범죄 입증을 위한 증거 수집이 성폭력이 일어나는 실제상황에서 여의치 않은 것을 고려하면 피해자와 가해자 간 진술의 신빙성을 재판부가 판단해야 하는데, 이는 미투 폭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검찰 출신의 한 법조계 인사는 "미투 폭로를 하더라도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사법 처벌까지 가길 원치 않는 경우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일반인의 경우 미투 폭로가 관심을 끌지 못한 채 폭로자만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다"며 "폭로 자체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상에 있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정부가 이번 대책에서 고발에 나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미투 폭로자에게 원칙적으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적용하지 않고 무료 법률 지원을 늘리기로 했지만 이 또한 각 재판부에서 판단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박균택 법무부 검찰국장은 8일 대책 발표 자리에서 성범죄 구성요건에 대해 "현재 미국 일부 주와 독일에서 폭행 협박이 아니라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처벌하고 있지만 해외 입법 사례가 많지 않다"며 "각계각층 여론을 수렴해 결정해야 할 문제라 이번 논의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 경찰청은 9일 '미투' 가해자 중 연극연출가 이윤택 씨를 비롯한 8명에 대해 정식 수사를, 11명은 수사 전 단계인 내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사진=연합뉴스

법조계는 현행 형법 및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관련해 "성폭행(강간)에서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되어야 강제적 성관계가 이뤄진 것"이라며 "정부가 형량을 높여놓아도 적용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피해자가 보기에 '합당한' 처벌이 되기 어렵다"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법조계는 성범죄 성립 요건에 대해 "가해자가 부인하면 진실게임 양상으로 가버린다"며 "증거 확보가 어렵고 업무상이라는 문구의 해석에 다툼의 여지가 많아 성범죄의 위계 위력을 입증하기 쉽지 않다"고 밝혔다.

현행법상 명예훼손죄 성립 요건에 따라 성범죄 폭로도 이를 피할 수 없다는 법조계 지적도 여전하다.

이에 대해 박 국장은 8일 "현재 미투 피해자들의 폭로는 내용이 진실이고 공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가 없을 것으로 본다"며 "허위가 아닌 사실을 말하더라도 명예훼손죄를 없앨 경우 과거 행적이나 성적 지향을 폭로하는 것에 대한 보호장치가 없어질 수 있어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을 아꼈다.

법조계는 이번 범정부대책에 대해 성범죄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 등 구성 요건과 양형 기준을 따져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우선이라고 보았다.

또한 시대가 흘러가면서 성 인식은 빠르게 변했지만 1953년 제정된 낡은 형법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성범죄 처벌을 막는 걸림돌로 작동하고 있다는 법조계 평가도 있다.

정부가 성범죄 판단에 대한 논의를 앞으로 어떻게 끌어가 실효성 있는 제도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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