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아홉가지 감사- 3

3
  
손양원은 점심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기차를 타고 바람같이 날아가 전남 계엄사령부 순천 분소(分所)에 당도했지만, 위병소(衛兵所) 앞에서 발이 묶여 꼼짝달싹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 여보시오, 내가 이번 폭동에 자식을 둘이나 잃은 손양원이라는 사람이요, 난 책임자를 꼭 만나야 해요, 나를 들여보낼 수 없으면 그 양반과 전화라도 연결시켜 주시오."
"아, 글쎄, 아저씨 사정은 딱하지만 약속이 되어 있지 않으면 들여보내 드릴 수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연대장님은 계엄사령관이라 함부로 아무나 만날 수도 없고, 지금은 출타 중이라 전화 연결을 할 수도 없으니, 시간 낭비 마시고 그만 돌아가세요."

손양원이 위병소를 지키던 군인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멀리서 지프 한 대가 뿌연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분소 정문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그들 앞에 멈추었다. 손양원과 말씨름을 하던 위병(衛兵)은 지프에 타고 있는 장교를 보고는 군기가 바짝 들어서 우렁찬 구호와 함께 그에게 거수 경계를 붙였다.

"멸공!"
"멸공, 그런데 무슨 일인가?"
"예, 사령관님, 이번 폭동에 아들이 죽었다면서 자꾸만 사령관님을 면담해야겠다고 억지를 부려 설득을 해서 돌려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손양원은 대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전남 지역 계엄 사령관 이학순이란 사실을 알고는 귀가 번쩍 뜨여 급히 그에게 매달렸다. 30대 후반반쯤 되어 보이는 계엄 사령관은 키가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군살이 하나도 없는 것이 몸이 무척 단단해 보이는데다 바지선은 칼날 같이 날이 빳빳하게 서 있고 눈매도 부리부리 해서 그 풍기는 위엄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령관님, 전 애양원 교회 목사 손양원이라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 구면입니다."
"예?" 

손양원은 생면부지의 그가 자신을 안다고 하는 데에 깜짝 놀랐고 그에 대한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에 전혀 없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손양원의 면전에서 환히 웃고 있는 계엄 사령관 이학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손양원이 주관한 부흥회에도 참석한 적이 있어, 목사 손양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살이를 자청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꺼리는 나환자를 평생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 손양원을 평소 무척 존경하고 있던 터라 계엄사령관 이학순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부관에게 내렸고, 이 덕에 무사히 영내로 들어가 아들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박태수를 만날 수 있었다.

"박태수, 나와, 면회야!"
"오전에 면회했는데, 지금은 또 누구요?"

면회가 내키지 않는 듯 박태수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아침에 면회를 왔던 그의 아버지가 장남이 쓸데없는 일에 관여해서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대성통곡을 하고 간 바람에 마음이 울적하고 편치 않아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죽인 동인이 아버지가 자네 면회 왔어, 빨리 나와!"

동인·동신 형제의 아버지 손양원이 자신을 면회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밖의 사실에 놀라 잠시 정신이 멍했으나 선뜻 유치장 문을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자신의 손에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가족을 만난다는 사실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는데다 만날 필요성도 못 느꼈고 또 굳이 만난다고 해도 그에게 딱히 할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의 자식들을 죽였다는 것은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에게 이것은 단순한 살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이것을 혁명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 생각했다. 그로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신념과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 비록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지만 그 자신은 자신의 과거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가 있다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뿐, 통곡하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그는 삶에 대한 티끌 같은 미련도 없었다. 그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역성혁명을 주장한 율곡의 제자 정여립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라면 한번은 거치게 되어 있는 죽음을 피할 도리는 없다.

그러기에 백성의 나라를 꿈꾼 정여립처럼 대장부답게 세상을 위해 살다가 가치 있는 죽음을 맞고 싶었던 터였다. 조만간에 사형을 당할 운명이지만, 자신이 꿈꾸었던 대로 인생을 살다가는 마당이라 회한을 가질 일도 아니었다. 그가 내키지 않은 표정을 하고 문을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제법 늙수그레해 보이는 호송을 나온 하사관은 미적거리는 박태수의 태도가 눈에 거슬렸는지 혀를 차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봐, 뭘 그리 꾸물거리나,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나보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당신도 그 아버지를 만나서 한마디 사과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서두르라고, 그래야 당신도 저승에 가더라도 마음이 편할 거 아니야!"

제법 나잇살이 있어 보이더니 호송을 나온 군인의 눈썰미는 아주 매서웠다. 박태수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동인·동신 형제가 죽임을 당한 것이 세상을 잘못 만난 탓이지 그들의 허물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 나도 사람인디 사람 도리는 해야지!'

박태수는 호송관의 질책에 불현듯 이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가 정사각형의 작은 면회실로 들어서자, 알 모양의 동그란 안경을 낀 아주 작달막한 남자가 조용히 일어나서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스틸 컷.

손양원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박태수를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너무 선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만 해도 손양원은 그의 모습을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거나 애꾸눈이거나 독사눈을 하고 있는 인상이 아주 험상궂은 악한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악한의 인상이 다 험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던 그가 박태수의 인상을 굳이 괴물 같은 치한의 모습으로만 그려보았던 것은 동화속의 흑백논리와 선악이 대립구도가 부지불식간에 그의 사고체계에 습관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긴 하지만, 온몸이 망신창이 되어 있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던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들을 죽인 범인을 정상적인 모습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보통의 사람으로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박태수 군이요?"
"예"
"난 동인이 아비되는 목사 손양원이요."
  
혁명의 당위성과 정당성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던 터라, 박태수는 피해자의 가족을 만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큰 죄책감을 못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손양원이 여전히 미소를 띤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그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고 눈을 둘 곳을 몰라 잠시 허둥거렸다.

어디선가 본 눈빛이었다. 인자한 외조부의 눈빛을 닮을 것도 같았고, 작은 설날 부엌에서 대나무 물통에 들어앉은 자신의 등을 밀어주던 아버지의 그 다정했던 눈빛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자신의 뺨 위에 떨어지고 있는 그 시선은 봄볕이나 가을볕처럼 여간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으나 동시에 그것에 비례해 부담스럽기도 했다.

손양원이 박태수를 만나기 전에 그를 상상했던 모습처럼 박태수 역시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비추어 면회실로 오면서 자신이 겪게 될 일들에 대해 나름의 상상을 했다. 증오와 경멸에 찬 싸늘한 눈빛, 자신을 비난하는 거친 욕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무자비한 폭행. 그리고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마땅히 그들에게 반발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그들의 손에 내 맡길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해자인 자신이 피해자 가족들의 억울한 마음을 만분지일이라도 풀어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죽인 철천지원수를 만나 저주를 담은 욕지거리는 물론이고 뼈도 못 추릴 정도로 몽둥이찜질을 해서 물고를 냈을지 모른다.

동인·동신 두 형제의 아버지 손양원은 놀랍게도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도 세상의 때가 터럭만큼도 묻지 않은 순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태수는 순간 말 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은연중에 자신이 눈을 감았거나 자신만 모르고 있던 자신의 어두운 내면이 그의 선한 눈빛에 의해 온 세상에 환히 드러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엔 내 생각만 옳다는 사고의 편협함,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조급함, 자신만이 결백하다는 믿는 완고한 결벽증, 이 같은 오만과 독선에다 혁명을 빙자한 잔혹함, 반성을 모르는 이기심까지 자신의 모든 그늘이 다 드러나는 것 같았고, 그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낄수록 자신의 존재감이 한없이 왜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키가 장대 같고 이십대 한창의 나이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데다 목숨까지 바쳐 혁명의 길에 나섰던 사내대장부가 오 척을 겨우 넘는 이 조그마한 남자의 부드러운 눈빛에 짓눌려 떨고 있다는 것이 그는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그에 대한 경외심으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박태수는 손양원이 내민 손을 엉거주춤 잡았고,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챈 손양원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들겼다.
 
"박 군, 부담 갖지 말아요, 그리고 불편하게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자 앉읍시다."
"죄송헙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당께요."

박태수의 입에서는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과의 말이 너무나도 손쉽게 불쑥 튀어나왔고, 이 때문에 그 자신은 물론이고 손양원도 놀라고 있었다. 손양원은 자신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박태수를 보면서 그가 밉기보다 안타까움이 더 앞섰다.

'어찌 이런 조신한 청년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지난 며칠 간 시령부내 유치감에 갇혀 지낸 통에 세수는 물론이고 면도도 못해 머리칼은 산발을 한 것처럼 덥수룩하고 얼굴도 새까맸으나 눈빛만은 샛별같이 초롱초롱했고 자세도 샌님처럼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폭동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한 폭도의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점심은 좀 잡수셨소?"
"아, 예"

박태수는 민망함에 늙은 홍시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손양원은 그의 답을 듣지도 않고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고 박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사님!"

탁자 위엔 소고기와 깨를 볶아서 기름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 삶은 닭 한 마리, 사과 2알, 감주를 담은 술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생일상 같이 잘 차려놓은 탁자 위의 음식을  바라보는 박태수의 얼굴은 그에게 고맙다기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난감한 입장을 말하는 난처한 표정의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손양원은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건네듯 닭다리를 하나 뚝 떼어 그에게 건넸다.

"왜정 때 나도 옥살이를 5년 해봤소, 그래서 옥살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잘 먹어야 잘 이길 수 있소, 드시오."  

박태수는 손양원이 억지로 쥐어준 닭다리를 바라보며 잠시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생각 끝에 그에게 물었다.

"목사님, 궁금한 기 있당께요?"
"뭐가요?"
"왜 지한테 호의를 베푸신다요?"
"왜 이상해요?"
"암요, 이게 정상은 아닌 거 같은디."
"그럼, 무어가 정상이란 말이요?"
"자식을 죽인 원수를 만났으믄 먼 욕을 하등가 뺨을 때리등가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라."
"내가 그렇게 해 주길 바라오?"
"차라리 그렇게 해주면 감사할 일이지라, 시방 목사님이 나에게 하는 거 봉께 나를 놀리는 거 같기도 허고 나를 시험하는 거 같기도 허고 아무튼 기분이 허벌나게 나쁘당께요."
 

죄책감에다 손양원에 대한 원망까지 더해진 박태수의 감정이 점점 격해지면서 얼굴에 노기를 띠었고 언성도 다소 높아지고 있었으나, 그의 진의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양원의 호의 때문에 지나치게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또 두렵기도 했다. 사실 그의 분노는 손양원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불안에 대한 분노였을 뿐이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다. 하지만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도저히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자신의 상식으로는 불가능이라고 생각한 일이 버젓이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손양원과의 이 짧은 만남에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신념은 가난한 젓갈 장수의 아들을 지금까지 단단하게 지탱시켜 준 뿌리 깊은 나무였다. 박태수는 이 신념이 무너질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간의 갈등의 역사였다. 계급과 계층을 초월한 사랑을 믿지 않았고, 평화적인 평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력 혁명을 통해 평등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을 믿지 않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상들도 증오했다. 또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청산 대상으로 거론했던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목사 손양원이 자신의 자식까지 죽인 원수를 찾아와 면회를 하고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호의까지 베풀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예사롭지 않은 경험 때문에 그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금과옥조처럼 믿어 온 확고한 계급투쟁에 대한 신념에도 의심이 눈길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당연히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하게 그어져 있던 선·악과 피아에 대한 경계와 구분이 그의 머릿속에서 흐릿해지고 모호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신념이 무너진다면, 자신의 과거는 잘못된 것이란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과거가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박태수는 이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와 인생의 문제였고 나아가 자신의 과거가 부정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기도 했다.

'난 혁명가야, 조선의 혁명가라고, 내가 어떻게 나를 부정한단 말인가? 인민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나를!'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신념을 포기해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기 보다는 설혹 모순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투성이의 그 신념을 안고 장렬한 죽음을 맞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 온 가치와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란 숭고한 길을 함께 걸어 온 동지들에 대한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죽은 순간만은 절대 추한 모습으로 눈을 감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잠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흩뜨려놓았던 허접스런 미몽을 단숨에 떨쳐 내고는 정색을 했다.  

"아무튼 인자는 더 이상 얘기 안 하고 싶응께 돌아가시랑께요!"

박태수가 다소곳했던 처음 태도와는 달리 독사눈을 하고는 갑자기 얼굴을 싸늘하게 하여 등을 돌렸다. 하지만 손양원은 그의 감정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웃음까지 지어가며 여유를 더 부렸다. 

"허허,  박 군,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나셨소?"
"......"

박태수는 숫제 입을 열지 않으려 듯 눈을 감은 채로 입을 꼭 다물었고, 이를 보고  손양원이 실소를 머금었다.

"사내대장부가 말하기 싫으면 말을 않으면 되지, 시답잖게 눈까지 감을 필요가 뭐가 있나? 내 눈엔 박군이 아기처럼 땡깡 부리는 사람 같소."
"뭐시라고요?"
"아니면, 겁이 나서 도망치는 중이던가!"

손양원의 말에 박태수의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며 불덩이처럼 빨개지더니 손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흥분을 했다.    

"도망을 치다니요? 무엇이 겁이 나서 도망을 친당가요? 참말로 어이가 없당께, 지는 혁명가란 말입니다, 혁명가랑게요!"

아들을 죽인 장본인을 어렵게 찾아온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할 말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기왕지사 말이 나왔고 서로 갈 길이 다른 터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어물쩍 넘길 것이 아니라 입장은 서로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잠시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박태수가 정신을 차리더니 개운치 않은 뒤끝을 남기지 않으려 자신의 감정까지 명료하게 정리하고 나선 것이다.

"목사님이 무슨 생각으로 저한테 와서 이런 요상한 짓을 허고 말을 허는지 몰라도, 지 맴을 흔들어 볼 요량이었으면 꿈 깨시는 기 좋을 것이요,  얼매 안 있어 뒤질 놈이라 생각혀서 지를 동정하시는가 본디, 지는 그렁거 필요없응께,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싸게 돌아가랑께요. 절대로, 절대로 맴이 바뀌는 일이 절대 없응께, 어설픈 짓 그만 하고 싸게 돌아가시시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고 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손양원은 고리눈을 하고 독설을 퍼붓고 있는 박태수의 모습이 왠지 더 가련해 보여 씁쓸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손양원의 안색을 슬쩍 살피던 박태수는 그가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제는 만정이 떨어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야겠다고 작정하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라고 목사님, 똑똑히 들으시오, 지는 혁명을 했어라, 그러니 동인·동신이 죽인 것도 후회 안 한당께요, 죽는 것도 안 두렵당께!"

스무 살 청년은 자기 최면을 걸어 자신의 모든 것을 합리화시킨 다음, 도발하듯 당돌하고 고집스럽게 한바탕 자기 생각을 열렬히 토해 내었는데, 말을 마칠 즈음엔 어느덧 그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손양원으로서는 박태수가 흘린 이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어쩐지 가슴 한쪽이 칼끝에 베인 듯 쓰라리고 아팠다. 그래서 그는 슬며시 일어나 자신에게 목례를 하고는 뒤돌아서는 박태수를 불러 세웠다.

"박 군, 일어나는 것 말리지 않겠네, 하지만 나도 자네에게 한마디 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나?"

그의 말에 박태수가 등을 보인 채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는 석상처럼 서 있었다. 

"난 자네를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네, 미워도 하지 않는다네, 자네를 칭찬할 마음은 물론 없지만 자네가 열심히 산 것만은 인정하네. 자네가 늘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혁명이란 말도 자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니, 자네도 나름 인생을 가치 있고 숭고하게 살았다 생각한다는 말일세.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내 자식들이 죽은 것도 원통하긴 하네,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누굴 탓할 일이 아니라 난 생각하네, 자네나 우리 아이들이니 세상을 잘 못 만난 탓이고, 어찌 보면 이 나라와 이 땅이 한번은 이런 시련을 겪을 운명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는 말일세. 하지만 여보게, 백번 양보해도 하나 몹시 아쉬운 점이 있어 이건 내가 꼭 자네에게 말을 해야겠네!"
"......"

손양원이 다시는 자기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내쫓으려는 박태수의 의식적인 노력과는 달리 뽑아내려하면 할수록 더 깊이 파고드는 손가락 끝에 박혀 있는 가시처럼 손양원의 말은 큰 공명을 일으키며 점점 박태수의 온몸으로 퍼져나가 뼛속 깊이까지 물들였고, 마침내 도리질을 치던 박태수의 눈시울도 붉히게 했다. 

"여보게,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나?"
"......"
"자네가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하는 걸로 보아 자네도 자네 스스로 아주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그래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죽음 앞에 벌벌 떠는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 보다는 천 배 만 배 낫지.  하지만 여보게 그게 다는 아닐세, 난 말이야 진정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은 말이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네. 국법이 지엄하니 사람을 죽인 자네가 살 수 있을지 그건 내가 알 수 없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다르시네, 자네가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를 한다면 주님께서는 자네를 용서하실 뿐더러 자네에게 영원한 안식을 보장할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네. 나는 자넬 이미 용서했다네, 그러니 이제 자네에게 남은 것은 주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뿐 이라네, 잘 돌아가시게, 주님이 자네를 잘 돌보아주시길 빌겠네!"

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호기심과 의심을 이기지 못해 등을 돌리는 바람에 끝내는 자신이 구하고자 했던 사랑하는 여인 에우리디케까지 잃어버린 오르페우스의 경솔함과 달리 박태수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숙명으로 다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시지프스처럼 끝내 등을 돌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갈 길을 갔다.

하지만 손양원의 눈에는 그의 볼을 타고 내리던 눈물이 결국 그의 어깨까지 들썩이게 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양원은 창살을 뚫고 쏟아져 들어온 한 무리의 빛 가운데 서서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있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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