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귀천 3·4

3
 
태종대 바닷가, 돌아올 낭군을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렸다는 여인을 가리키는 망부석을 향해 눈길을 던지며 그녀가 물었다.

"태수야!"
"응"
"넌 학교 졸업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말에 태수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주저 없이 대뜸 말했다.

"여수 애양원에서 목회를 할 거야"
"왜? 좋은 곳도 많은데......" 

연분홍 원피스에다 빼딱 구두를 신고 한껏 멋을 내고 데이트를 나왔던 그녀는 그의 말에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희자는 태수가 졸업을 하면 곧 바로 그와 결혼을 하고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할 수 있다면 대학 교수로 미국에 남아 그와 아이를 낳아 기르며 그 곳에서 살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인 애양원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고 싶다는 태수의 말은 그녀의 부푼 꿈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 애양원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하다 해도 장래 문제에 대해 자신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두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서운했다.

그녀는 잠시 흐트러졌던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듯 해풍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단정하게 쓸어 모아 가지런하게 묶고는 긴 목을 빼어 사슴같이 큰 눈방울을 밝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윤기 나는 흑발 아래 숨어 있던 백옥 같은 그녀의 얼굴이 뜨거운 태양빛을 받으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 거렸다. 마치 한 줄기 바람에 흔들리는 백합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이 세상에서 엄마 다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깊은 향기에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를 바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행복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꿈같기만 했다.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현실의 행복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고, 그녀와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불안했다. 사지에서 양부(養父)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난 것도 천재일우의 행운이었다. 여기에 더해 자신이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도 다시없는  행운이었다.

그는 그녀와의 사랑이 깊어 가면 깊어 갈수록 점점 더 불안했다. 행운이 잇달으면서 자신과 같은 살인자가 이 행운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연인은 그야말로 아무나 함부로 탐을 낼 수 없는 부산에서 내놓으라 하는  명망가 집안의 고명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하지만, 가난한 젓갈장수 집안의 아들이 어찌 선계에서나 살고 있을 법한 그녀를 넘볼 수 있단 말인가. 언감생심이었다. 더구나 호사다마라 하지 않았던가.

어디선가 질투의 화신이 불쑥 나타나 공든 탑을 무너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되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꿈같은 행복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연기처럼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도 없을 것만 같아 겁이 났다. 

이 때문에 비릿한 젓갈냄새에 인이 빅인 촌놈이 그녀를 욕심내는 것이 비록 염치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없는 세상은 꿈에서조차도 상상하기 싫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그는 매사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빈대 잡으려다 초간 삼간 다 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만큼 언행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무턱대고 그녀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속죄의 마음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난 거기에서 시작해야 돼! 지은 죄가 많아서......"
"지은 죄? 아니 성서적으로 볼 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모두에게 원죄라는 것이 있잖아?"
"아냐, 그런 거 말고"
"그게 뭔데?"
"몰라도 돼."
"무슨 말이 그래, 몰라도 된다니?"

토라진 듯 희자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등을 돌렸고, 태수의 건장한 팔이 등나무 줄기처럼 쭉 뻗어 나오더니 그녀의 등을 살짝 감싸 안았다.

"삐쳤어?"
"그럼 자기 같으면 안 그러겠어?"
"미안해"
"말로만?"
"그럼, 어떻게 해줄까?"
"음......"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더니 그녀가 말했다.

"그럼, 노래 불러 줘"
"나 노래 못 부르잖아?"
"그러니까 불러 달라는 거지, 잘 할 때까지."  
"그럼 뭐 불러?"
"정말 불러 줄 거야?"
"불러 달라며?"
"그럼, 고향생각 불러 줘"

예술적인 외모와 달리 음치로 소문 난 박태수라 노래라면 젬병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노래하는 자리는 늘 도망을 치고 뒤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던 그였지만, 사랑하는 정인 앞이라 그런지 오늘은  대뜸 용기를 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봄기운이 완연한 오월이라 바닷가로 놀러 나온 상춘객들이 주변에 우글거렸으나 태수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고 허연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푸른 파도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목청을 빼어 우렁차게 아주 열심히 불렀다.

그의 노래는 톤이 너무나도 일정해 책을 읽는 것인지 시조를 읊는 것인지 웅변을 하는 것인지 창을 하는 것인지 도저히 구분을 할 수가 없었고 간혹 높은 음을 낼 때는 사발 깨지는 소리까지 뒤섞여 당최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알 수 없어 가히 그의 노래는 미지의 세상을 노래하는 수수께끼만 같았다.

이 때문에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행락객들은 한편의 코미디를 보듯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지만, 그의 정인인 희자만은 오월의 신부보다 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라면 눈앞에서 자신들을 유혹하는 저 푸른 바다에 몸을 던져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앵두를 닮은 입술을 놀리며 그와 함께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번 떠나 온 후에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내 마음 속에 사무쳐
자나 깨나 너의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
나 언제나 사랑하는 내 고향 다시 갈까
아, 내 고향 그리워라
 
   
▲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 스틸 컷.

4

"니 이거 확실한기가?"
"아이고 행님 까막눈도 아이고 대학까지 댕기는 양반이 신문을 보고도 모르겠소!"

너무 흥분한 탓인지 운동으로 단련이 된 이성호의 큼지막한 손이 덜덜 떨렸다. 별 생각 없이 홧김에 박태수의 뒷조사를 해보라고 똘마니에게 지시했던 것인데, 이성호는 태수에게  이 같이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눈을 부비면서 몇 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지막 확인 차 신문을 가져 온 들개라는 별명을 가진 똘마니를 다그쳤다.

"너 이기 사실이 아이면, 우짤끼고?"
"정 그러면 나를 자살 바위에서 꽉 밀어뿌소, 나 박살 나구로."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땅꼬마 같은 손양원 옆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한 더벅머리 청년은 한눈에 보아도 박태수가 틀림이 없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들 눈에 쉽게 뜨이는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와 특별히 잘 생긴 멋진 외모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어, 자신을 숨기고자 하는 그에겐 자신의 수려한 외모가 여간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48년 11월 5일 실린 '신의 심장을 가진 남자'라는 이 기사는 여순 사태 때 두 아들을 좌익 청년들에게  잃어버린 목사 손양원의 미담에 관해 다루고 있었다.

"살인에다 빨갱이 짓까지, 허참, 뭐 이런 좆같은 새끼가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대학을 들어와서 꼴값을 떨어? 하, 이거 정말 성질나 죽겠네."

신문 속의 박태수를 독사 같은 눈으로 뚫어질 듯이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앞에 태종대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던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떠오르며 그의 화를 더더욱 부추겼다.

"이거 지금 당장 인쇄소에 들고 가 찍어, 그리고 학교에다 막 뿌려, 알았나!"
"예, 행님"

그의 지시에 몸이 다부지고 날렵하게 생긴 들개가 그에게 허리를 90도로 구부려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얼른 다방을 나섰고, 이성호는 다방 문을 열고나가는 들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양복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박태수, 이 새끼, 니는 인자 죽었다, 그라고 인자는 꿈 깨라 새끼야, 오늘부로 희자는 내 끼다."

이날 밤 이성호가 풀어 놓은 그의 똘마니들이 인쇄소에서 제작한 신문기사를 무더기로 학교 곳곳에 뿌렸고,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온 학교에 도배가 된 이 신문기사를 보고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대경실색을 했다.

하지만 박태수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을 까맣게 모른 채 룸메이트인 운서와 함께 어제에 이어 오늘 아침까지 예수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주: 예수가 한 소년에게서 빵 5개와 물고기 2 마리를 받아 5천명의 굶주린 사람들은 배불리 먹였다는 기적)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다가 아침 강의를 들으려 책가방을 챙기는 중이었다. 이때 별안간 누군가가 방문을 부서질 듯이 크게 두들겼다. 

눈앞에 바다를 두고 있는 외진 언덕에 자리 잡은 숲속의 오두막 같은 작은 기숙사, 이 기숙사의 고요한 아침을 깨뜨린 예의 없는 난폭한 방문객 때문에 아침 사냥에서 돌아와 느긋하게 부리로 벌레를 쪼고 있던 새들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쁜 날개 짓을 하며 후다닥 나무에서 달아나고 있었다. 

"아침부터 누구야!"

소리에 예민한 운서도 짜증이 나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방문을 열었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희자씨!"

사색이 된 그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는 모습이 몹시 슬퍼 보이기도 했다. 운서의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태수도 무슨 일인가 싶어 가방을 챙기다 말고 얼른 나왔다.

"어쩐 일이야? 아침에......"
"......"

태수만 보면 지저귀는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그녀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슬퍼 보이는 눈빛은 그에게 매우 복잡한 느낌을 주었다. 공허해 보이기도 했고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고 쫓기는 사람처럼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희자야, 무슨 일이야?"
"......"

그녀는 행여 놓칠세라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손에 쥐가 나도록 꽉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말없이 그에게 건넸다. 그녀의 손바닥이 얼마나 땀으로 흥건했는지 종이가 축축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고깃고깃 구겨진 종이 속에 감추어진 진실이 다시금 세상에 드러나면서 태수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게 사실이야? 태수씨가 사람을 죽였어?"
"......"
"말해봐, 자기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미안하다......"

그때서야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낙숫물처럼 방울방울 떨어졌고, 그녀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태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휘청거리며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때마침 불어 온 해풍에 군락을 이룬 정원의 목련이 한기(寒氣)에 몸을 떨듯 애처롭게 파르르 떨었고, 그녀의 눈물이 된 하얀 꽃잎은 사방으로 흩날리며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 뒤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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