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아홉가지 감사-4·5
 
4

손양원은 박태수와의 면회를 마친 후 곧바로 본관 2층에 있는 계엄 사령관 집무실을 찾았다. 이학순은 막 순천 지역 계엄 상황에 대한 점검 회의를 마치고 나온 터라 얼굴색이 다소 피로하고 힘이 없어 보였지만, 손양원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았다.  

"목사님, 면회는 잘 하셨습니까?"
"예, 그런데, 박태수 그 친구 신병 처리는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사형을 면하기 어렵겠지요."
"사령관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은 혹시 그 친구 감형을 받을만한 사유는 없을까요?"

이학순은 느닷없는 그의 말에 뜬금이 없다는 듯 몹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위를 떠나 박태수는 손양원의 피붙이를 둘이나 죽인 살인자였다. 자식을 죽인 살인범의 형량을 낮출 수 없는지 묻고 있는 손양원의 모습이 굳이 계엄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학순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 별일이구만!'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손양원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목사님,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뭡니까? 더군다나 목사님 아드님을 죽인 놈 아닙니까?"
"그렇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손양원이 자신의 속마음은 털어놓지 않고 산중 스님의 선문답처럼 말을 하자,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단순명료한 것이 몸에 밴 군인이 아니라 할까봐 이학순이 아주 직설적으로 물었다.

"목사님, 에둘러 말씀 하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를 해주세요, 그래야 도울 일이 있으면 제가 돕지 않겠습니까?"
"사령관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부탁을 드리기 전에 정말 그 친구한테 정상을 참작해줄만한 것은 없는지, 꼭 한번 살펴 주실 수 없겠는지요?"
"꼭 필요하신 건가요?"
"예, 좀 알았으면 합니다."

손양원이 두어 차례 같은 얘기를 반복하자, 이학순은 피의자에 대한 조사 내용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것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그가 사건의 당사자라 알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처럼 존경받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해 더 이상 그에게 시시콜콜 캐묻지 않고 곧 바로 전화를 걸어 부관에게 그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게 했다.

오 분 쯤 지나 부관이 가져온 자료를 살피던 이학순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경감할 만한 사유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크게 고려할 것은 못 될 것 같습니다."
"그 경감 사유라는 게 어떤 건지요?"
"나이가 적어요, 만으로 열여덟입니다."
"예!"

깜짝 놀란 손양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각 같은 얼굴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박태수를 손양원은 적어도 그의 나이가 이십대 초반은 더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열여덟이라니, 오, 세상에!'

손양원은 이학순의 전언에 기가 막혔다.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학생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고 놀라움과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쳤다. 

'아무리 이 아이가 큰 죄를 지었어도 이 어린 아이를 죽게 할 수는 없어!'

그는 박태수처럼 어린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모두가 어른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박태수를 구명해서 그에게 새로운 속죄의 기회를 꼭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이어진 이학순의 얘기가 그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목사님 큰 아드님이신 동인군을 살해한 사건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과실에 의한 것이라 진술하고 있어 이것도 정상을 참작할만하지만, 동신군도 살해했고 나이는 어려도 젊은 빨갱이들의 괴수쯤 되는 놈이라, 단순 과실이나 나이를 들어 형을 경감한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형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하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그 자에 대한 사형처벌을 면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학순에게 박태수에 대한 감형문제를 넘어서 사형 면제까지 물어오는 손양원의 눈빛은 진지하다 못해 마치 자식의 구명을 바라는 애타는 사형수 부모의 눈빛처럼 몹시 간절해보였다.

이 눈빛은 박태수에 대한 손양원의 마음이 단순히 종교인으로서의 의례적인 호의가 아니라 그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걸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학순은 가해자를 사지에서 구하려하는 손양원의 너그러운 태도에 감동을 받기보다는 생각이 정리가 안 된 탓에 이 상황이 너무 난해해 혼란스럽기만 했다.

'대체 왜?'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같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그에게 답을 주는 대신 대체 그가 무슨 마음에서 그런 희한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 골똘히 그의 얼굴을 살피고만 있었다.

"......." 

낯짝에 구멍이 나도록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학순의 눈빛에 손양원이 당황해 얼굴을 붉히자, 비로소 이학순은 자신이 그에게 결례를 범했다고 생각했던지 얼른 자세를 고쳐 앉고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정말 그놈을 살리고 싶으세요?"
"물론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들의 죄는 알고 보면 다 어른들의 죄입니다, 그 아이에게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어요."

그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이학순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손양원의 생각이 너무 순진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목사님, 이 조선 땅에 선거를 통해 나라를 세운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다섯 달 남짓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불과 5개월입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는 젖먹이 갓난아기입니다. 나라가 형세가 이처럼 허약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형국입니다. 다시 말하면 난세입니다. 목사님 이럴 때 제일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기강을 세우는 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고 제2, 제3의 폭동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학순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현 상황이 비상시국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었다. 좌·우익의 반복과 대립으로 소요와 폭동이 잊을만하면 벌어졌고, 개성 주변의 서부전선에서는 남북한의 치열한 교전도 거의 매일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니, 평화로운 시기보다 법 집행에 더 엄정해야 한다는 사실도 옳은 말이었다. 아무튼 계엄 상황 하에서 법 집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박태수로서는 죽음으로부터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다.

수갑을 찬 손에다 족쇄를 더 채우고 거기에다 올무까지 씌워 숨통을 조이듯, 그의 화려한 죄목이 그를 운신도 못하게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상해 치사, 살인교사 및 방조에다 국가 전복 내란 혐의가 그에게 씌워진 죄목이었다. 봉건 왕조 시대였다면 본인은 사지를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이나 살을 바르고 사지가 잘리는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돈에 팔촌까지 온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중범죄였다.

하지만 손양원은 인간의 죄악을 세속의 잣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인간의 죄에 대해 정죄(定罪)를 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태수는 미성년자였다.
   
"사령관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그 아이의 행동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당연히 엄한 조치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아이가 미성년자라는 사실만은 꼭 감안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령관님께서도 신앙심이 매우 깊으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을 드리는 건데, 이 아이가 지은 죄를 세상의 눈으로 보지 말고, 판단을 하느님께 대신 맡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님도 우리 스스로 사람의 죄를 정죄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학순은 그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탓에, 손양원의 집요한 간청과 설득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역시도 입으로는 엄벌을 천명했지만 박태수가 미성년자라는 걸 알고는 무척 꺼림칙했었다. 다만 명분이 없어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신의 판단에 맡기자는 손양원의 제안이 그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래도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분이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외국에서는 수사에 협조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감해 주는 플리 바게닝(Plea Bargaining) 제도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걸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고 또 좌익들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이들을 품는 정책도 병행해야 국민들을 화합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손양원은 계엄사령관 이학순을 만나러 오기 전에 박태수를 구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생각하고 이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고 온 터라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어 이학순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양반, 목사야, 변호사야?'

손양원의 아이디어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 같아 이학순의 어두웠던 얼굴이 갑자기 밤을 환히 밝히는 보름달처럼 밝아졌다

"좋소, 일단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목사님, 정말 그 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예, 말씀드리지요. 첫 번째는 저를 위한 것입니다."
"예?"  

이학순이 손양원의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슴에 증오를 품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으면, 제 자신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죽은 아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제 자식들은 그 아이에게 죽임을 당해 고인이 되었지만, 소중한 제 자식이 죽은 그 의미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하느님께서 저희 아이들을 일찍 거두어 가신 뜻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식을 죽인 죄의 대가로 그 아이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게 한편 통쾌한 느낌이 들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하느님이 제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바는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죽음에 깃든 하느님의 깊은 뜻을 깨우치고 이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안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이 세상을 좀 따뜻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법대로 죄지은 사람을 벌해서 사회 질서를 엄격하게 바로잡는 것도 좋지만, 원수를 조건 없이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지 그리고 용서가 이 세상을 얼마나 따듯하게 만드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밝히고 있는 손양원의 얘기에 이학순이 눈시울을 붉혔고, 그의 뇌리 속으로는 작년 이맘 때 광주 시내 충무 교회에서 개최한 부흥회에 참석해 강론하던 손양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방 후에 손양원이란 이름 석 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다 보니, 부흥회 당일 호남은 물론이고 전국 각처에서 그를 보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향기로운 꽃을 찾아 날아드는 벌떼처럼 집회장으로 몰려왔다.

집회장에 나온 상당수 사람들은 간질, 정신병, 우울증, 신경쇠약 혹은 암이나 중풍 같은 난치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손 목사에게 안수 기도를 받아 치유의 기적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소망으로 몸이 후끈 달아 있었다.

이들이 그에게 먼저 안수 기도를 받으려 서로 밀치고 당기는 실랑이를 벌이다 사달이 나는 바람에 경찰까지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아무튼 그날 이학순은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말의 뜻을 온몸으로 실감했고, 예수가 손양원을 본다면 아마도 자신의 13번째 제자로 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광주 부흥회에서 받았던 진한 감동이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나면서, 그에 대한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자신의 귀전에서 다시금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말을 잃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진 이학순은 어린아이 같은 이 작은 남자를 자신의 면전에 두고 자기 홀로 그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고, 창살을 뚫고 들어온 서산의 붉은 노을빛이 그들을 한 폭의 그림으로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 영화 '포화속으로' 스틸 컷.


5

손양원이 이학순을 만난 다음 날 박 태수는 가족들이 들여보낸 자신의 감청색 사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석방이 믿기지 않는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석방이라니? 사형이 아니고 석방이라니? 대체 이기 어찌 된 일이 당가?'

그는 옷을 다 차려입은 다음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 되어 볼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교도관에게 슬며시 물었다.

"대체 왜 내가 석방이 된 것이요?"
"잘은 모르지만, 사령관 님 지시라는 것만 알고 있네, 아무튼 자네 운이 엄청 좋아, 모두 다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하던데 구사일생 혼자 살아남은 걸 보면 자넨 천운을 타고난 것 같아. 아무튼 축하 하네"

자신과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이 모두 다 죽음을 맞게 될 것이란 교도관의 전언에 마음은 무척 아팠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 했듯이 사선의 문턱에서 되돌아 나오는 길이라 그 아픔도 잠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자신이 어떻게 구제를 받게 되었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궁금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자신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순천 땅에서 젓갈 장사만을 해온 집안이었다. 글을 배운 사람이 전혀 없는 일자무식의 까막눈 집안으로 자신의 대에 와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권유로 자신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자기 집안으로서는 현대식 교육의 시초였다.

당연히 가까운 친척 가운데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없었고, 사돈의 팔촌까지 눈을 씻고 샅샅이 뒤지고 찾아보아도 자신의 바람막이가 되어 줄 든든한 배경은 물론이고 약으로 쓸  개똥같은 존재도 없었다.

그가 교도소 정문을 나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아버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태수야, 이놈아!"
"아, 아버지!" 

맏아들이 당연히 사형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해 극도로 심한 마음고생을 한 탓에 세월을 모르고 스무 살 청춘처럼 새까맸던 그의 아버지의 머리칼이 새벽 서리를 가득 맞은 듯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보자기에 싼 하얀 두부 한모를 그에게 먹인 후에 함석지붕을 머리에 다 찌그러져 가는 길가 귀퉁이의 허름한 인근 주막으로 그를 이끌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거는 없고, 진짜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 있다."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라니니요?"
"너 구해 준 분 말이다."
"예! 그 분이 누구시랑께요?"

아버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나서 그의 커다란 두 귀가 쫑긋 섰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아들이 따라 준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키고는 말도 없이 무슨 일인지 눈시울만 붉혀 그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박태수는 심상치 않은 아버지의 얼굴 표정 때문에 괜히 주눅이 들어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앞에 놓인 막걸리 잔을 입에다 대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아버지, 무슨 일인디요?"
"태수야!"
"예"  
"너를 구해 주신 분은 말이다, 후......."

그의 아버지는 복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어 마른 입술만 깨물면서 머뭇거리다 막걸리를 손수 부어 한 사발을 들이킨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말이다, 니가 죽인 동인이 동신이 아버지, 손 양원 목사님이시다." 
"......"

아버지의 말에 박태수는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순간 말을 잃었다.

얼이 빠졌는지 넋이 나갔는지 박태수는 한참을 초점이 없는 멍한 얼굴로 가만 앉아 있었다.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제야 정신이 조금 나서 온몸을 휘감아 도는 죄책감에 오한이 든 사람처럼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록 몸을 덜덜 떨었다.

"아버지, 이를 어찌 혀야 헌다요? 어찌 해야 한당가요?" 
"......" 

한 집안의 생때같은 자식을 둘이나 죽이고도 그들의 아버지 앞에서 인두겁을 쓴 사람처럼 모른 척 외면했던 자신의 뻔뻔했던 행동이 면목이 없었던지 박태수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 아들의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 하얀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입가에 잔뜩 묻은 허연 막걸리를 옷소매로 훔친 다음 아들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말 했다.   

"태수야!"
"예"
"넌 어떤 사람을 부모라 생각허냐?"
"시방 그기 무슨 말이어라?"
"부모의 자격 말이여."
"그기......" 
"태수야, 부모란 말이여, 생명을 주신 사람을 부모라 부르는 거여, 니 첫 생명은 우리가 준 것잉께 내가 니 애비가 맞어, 허지만도 지금 니 생명은 그게 아니여. 지금 니 목숨은 손목사님이 준것이여, 너한테 생명을 주신 분은 손 목사님아라, 그렁께 인자 니 아부지는 손 목사님이여, 시방 내 말이 무슨 말인 알것는가?"
"예, 아부지......"

자신이 아무런 가책도 없이 죽인 동인·동신 두 형제들은 물론이고  손 목사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감히 몸 돌 바를 몰라 금방이라도 대성통곡을 할 듯 박태수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막걸리 두 되에 웬만큼 취기가 올랐는지 발그레 얼굴이 달아오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이 못마땅했던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사람처럼 목청을 높여 다그쳤다.  

"돼았어 이놈아 청승 그만 떨어, 그렇게 맴이 약한 놈이 사람은 왜 죽여 이놈아? 다 니 놈이 한 짓이여! 그렁게 눈물 쥐짜지 말고 잘 들어, 알었냐, 잉! 손 목사님이 니를 우째 생각헐지는 모른겠다만, 인자 너는 죽든 살든 손 목사님 아들잉게, 무조건 그 뜻을 따라야 혀, 알것냐!"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짐을 받듯 박태수를 다그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에게 기별을 받은 손양원이 슬그머니 주막 문을 열고 들어섰다.

"태수야, 아버님 오셨다, 인사 드려라......."

박태수 부자는 손양원의 출현에 임금님이라도 등장한 듯 상기된 표정으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박태수는 서둘러 허리를 깊숙이 굽혀 넙죽 인사를 올리고는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아버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손양원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머리를 조아린 박태수에게 다가가 그의 떡 벌어진 어깨를 꼭 감싸 안고는 그의 귀에다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태수야, 네 아버지께서 널 나에게 주셨다, 그러니 네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사람 더 덤으로 생긴 거야. 넌 행운아이니, 감사하는 마음은 가질 수 있어도 울 필요는 없어, 나 역시 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네 두 형제를 잃고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긴 널 새로 얻었기 때문이야, 그 아이들도 내겐 소중했지만 두 아이의 목숨 대신 널 얻었으니 넌 세상을 떠난 네 형제들보다 두 배는 더 귀한 몸이 된 것이야, 그러니 울지 마라!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우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시비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위로하는 일이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걱정마라, 이미 넌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덩치가 산만한 박태수가 울음을 참지 못해 기어코 땅꼬마 같은 손양원의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였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아버지도 시큰거리는 콧잔등을 참기 어려웠던지 눈시울을 붉힌 채로 한숨을 쉬다가는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큰 소리를 내어 코를 한번 풀고 나서는 슬그머니 주막을 빠져 나와 신작로 가에 서서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따, 저 썩을 놈의 하늘은 오늘따라 왜 저리 징그럽게 푸르디야!"

그의 아버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죄 없는 하늘을 한번 타박했다가 자신의 생트집 같은 푸념이 민망했던지 조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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