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에너지부, 사우디 대상 핵기술 판매 승인
한국 수주 가능성 저하…밸류체인 붕괴 현실화
[미디어펜=나광호 기자]미국이 사우디에 핵기술을 제공하기로 하면서 해외 원전 수주를 통해 국내 원전산업 밸류체인을 유지하겠다던 정부의 계획에 암운이 드리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릭 페리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최근 사우디에 대한 자국 기업들의 원자력기술 판매를 승인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올 연말 예정된 사우디 원전 수주다. 미국은 1400MW급 원전 2기 건설을 놓고 한국·러시아·중국 등과 경합을 벌이고 있으며,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우라늄 농축 허용을 비롯한 옵션을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은 이번 사업 참여를 통해 원전산업 밸류체인 재건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1979년 쓰리마일섬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한 이후 30년 가까이 신규 원전을 건설하지 않으면서 관련 산업생태계가 무너진 것으로 평가되며, 실제로 2012년 원전 4기를 짓기로 했으나 부품조달 비용 등 사업비 문제로 손을 놓은 바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이 본관 접견실에서 칼리드 알팔레 사우디 에너지산업광물자원부 장관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청와대


사우디와의 관계 회복도 미국이 노리는 사항으로 꼽힌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제유가·이스라엘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동 국가들의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최근 골란고원 주권과 관련해 전통적 우방국인 사우디마저 미국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시리아·레바논·요르단 등에 접한 전략적 요충지로, 특히 요단강으로 이어지는 헤르몬산을 포함하고 있어 물이 귀한 이들 국가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그러나 사우디가 이란·예멘 등에서 높아지는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장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번 승인과 원전 수주를 엮는다면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 수주 가능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사우디가 중국 또는 러시아와 원전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핵무기 확산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의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페리 장관은 최근 휴스턴에서 개최된 컨퍼런스에서 이에 대해 "미국은 원전 수출로 핵무기 확산을 막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업계는 이와 더불어 사우디가 지난해 12월 미국 기술로 원전을 짓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을 근거로 한국의 수주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간 한국전력공사가 사우디에서 현지 로드쇼를 진행한 것을 비롯해 정부 차원에서 움직임을 보였지만, 미국 만큼의 옵션을 제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28일 체코 기술대학교 원자력공학부 이고르 옉스 학부장 일행이 한수원 고리·새울본부를 방문했다./사진=한국수력원자력


현재 한국수력원자력 등을 중심으로 체코·폴란드·루마니아 등에서 원전 수출을 타진하고 있으나, 지난해 7월 영국 무어사이드 원전 우선협상자 지위를 잃은 상황에서 사우디 원전 수주에 실패하게 되면 2020년 신고리 5·6호기 이후 찾아올 공백을 버티지 못하는 업체들의 도미노 도산이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전 기자재 공급망은 2~3년 주기로 발주되는 원전 건설에 맞춰져 있어 수출을 통한 밸류체인 유지가 가능할 때까지 신규 건설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종두 두산중공업 상무도 "사우디 원전 수주 성공시에도 하청업체들에게 낙수효과가 돌아가는 데는 3~4년이 걸리지만, 그때까지 견디는 업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는 "원전건설 중단으로 밸류체인이 붕괴된 해외사례가 한국이라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면서 "정부는 해외 원전 수주를 통해 국내 산업 밸류체인을 유지하겠다고 말하지만, 한국 원전의 가장 큰 장점인 '가성비'가 사라지면 무엇으로 수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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