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기술과 공정 혁신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최근의 산업 전쟁은 기업 개별의 경쟁력을 넘어 거대 자본과 행정력을 앞세운 ‘국가 대 국가’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에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등 자원 없는 국가의 설움을 겪고 있다. 특히 1등 기술을 보유하고도 시스템의 뒷받침 없이는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이에 미디어펜은 3회에 걸친 기획 연재를 통해, 사투를 벌이는 기업들의 현주소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우리 산업 시스템의 현실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미디어펜=조우현 기자]최근 몇 년 사이 한국 기업들이 직면한 ‘중국의 위협’은 단순히 저가 공세나 기술 추격에 그치지 않는다. 미·중 패권 전쟁 속에서 지정학적 리스크와, 어느 한쪽도 선택하기 힘든 ‘딜레마’를 강요하고 있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과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 사이에서 수년째 교착 상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난감한 부분은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 국가적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확한 가이드라인 없이 ‘정답 없는 문제’를 마주한 기업들은 오로지 개별 역량과 기술로 중국 등 해외 기업과 맞서고 있다. 국가 전략의 공백을 기업의 생존경쟁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5년 10월 30일 부산 김해공군기지 의전실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가드레일’에 묶이고 ‘보복’에 떨고… 앞뒤 막힌 국내 기업
지난 2022년 통과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CHIPS Act) 가드레일 조항은 국내 기업들에 사실상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미국의 보조금을 받으려면 중국 내 설비 투자를 포기해야 하고, 중국 시장을 지키려면 미국의 첨단 장비 반입 규제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중국은 단순한 제조 거점을 넘어 전체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장이다. 중국을 쉽사리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이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기자동차, 배터리, 석유화학 등 우리 주요 제조산업군 대부분이 직면한 딜레마다.
정부를 등에 업은 중국 제조업은 값싼 제품과 물량 공세로 전 세계 시장에서 덤핑 효과를 낳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기술 수준과 제품 품질마저 국내 기업을 따라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전 세계 1등이었던 디스플레이나 TV 시장은 물론 석유화학 업종 역시 중국 기업에 잠식 됐으며, 자동차, 반도체 등 하이테크 산업마저 추격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시장 수요가 부족한 한국은 북미 시장과 유럽 시장 등 전 세계 시장에서 관세 등 보호무역주의가 거세지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리스크는 국가의 몫, 책임은 기업의 외주”
지정학적 충돌로 발생하는 대가 역시 기업이 고스란히 치르고 있다. 실제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부터 최근 직면한 미중 패권 전쟁까지, 외교적 마찰이 빚어질 때마다 보복의 화살은 기업을 향했다. 최근 미국의 정치적 압박도 항상 국내 기업을 볼모로 삼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의 태도를 ‘책임의 외주화’라고 꼬집는다. 미국과 중국이 자국 기업을 위해 직접적인 현금 보조금과 행정력을 총동원해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동안, 한국은 외교적 난제를 기업의 협상력에 맡긴 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해외 공장을 짓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불확실성 역시 오롯이 기업의 재무적 부담으로 남겨져 있다.
정부의 외교가 모든 산업을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대표적으로 반도체나 자동차 산업 등 주요 분야를 방어한다 해도 철강 등의 산업까지 정부의 외교가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산업계에서는 정부가 경쟁력 약화로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철강이나 석유화학 등 산업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 ‘개인기’의 유통기한… 시스템적 방패 시급하다
그동안 삼성, SK, LG 등 글로벌 거점 기업들은 수십 년간 쌓아온 네트워크와 독보적인 기술력이라는 ‘개인기’로 숱한 위기를 넘어왔다. 하지만 진영 대결이 기술 표준과 자원 무기화로 번지면서 개별 기업의 역량만으로는 방어선을 지키기 어려운 임계점에 도달했다.
국가 대 국가의 싸움판에 기업이라는 장수들만 맨몸으로 내보낸 격이라는 우려가 깊다. 이제는 ‘기업이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방관적 낙관론을 버리고, 자원 안보와 외교적 협상력을 결합한 국가 차원의 ‘산업 방패’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미·중 갈등 사이에서 기업이 각자도생하는 구조는 결국 국부의 유출과 산업의 공동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국가가 명확한 전략적 로드맵을 제시하고 외교적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제거해줘야 기업들이 비로소 기술 개발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